#50
정연도 그 비정한 세상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으므로, 모처럼 난 자리에 앉은 한준 앞을 지키고 서서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잡고 한 손으로는 단어장을 넘겼다. 외우는 것보다는 Annual을 인간의 배설 기관을 나타내는 영단어의 발음으로 대체해 읽고서 즐거워하던 반 애들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우는 것이 고역이었다.
이게 정신 오염이라는 걸까. 어째서 뇌는 세탁기에 넣고 세제를 듬뿍 부어 돌릴 수 없는 건지, 세상의 불합리함에 정연이 조금 괴로워지려던 찰나 듣기 좋게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연아, 요새 무슨 일 있어?”
“응? 무슨 일?”
무슨 생각 하는지 티라도 났나? 지레 찔린 정연이 애써 덤덤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자, 정연을 따라하려는 양 무릎 위로 펼쳐 두었던 공책을 덮은 한준이 알사탕마냥 반지르르하게 새까만 눈을 마주쳐 왔다.
“혹시 집에 무슨 일 있는 건가 싶어서….”
콕 찍어 집이라니. 반장이 무슨 말이라도 흘린 건가. ‘브루투스 너마저’도 아니고 ‘반장 너마저’인가. 느슨해진 정신에 긴장감을 주는 질문에 아무 일도 없다며 손사래를 치자 한준이 슬쩍 뺨을 부풀렸다. 보편적으로는 중학교 3학년 남학생이 하면 죽여 버리고 싶을 것만 같은 행동이 기가 막히게 어울려서, 정연은 스스로 이마를 한 대 찰싹 치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치만 요새 학교만 끝나면 바로 집에 가잖아.”
“피곤해서.”
“…그리고 계속 집에 오면 안 된다고 하고.”
‘하고’라기보다는 ‘하구우’에 가까운 발음으로 끝이 울적하게 늘어졌다. 여기다 대고 아, 그것도 피곤해서라고 답하면 상처받겠지. 정연은 현명하게 묵언을 택하기로 했다. 진짜로 삐지지도 않았으면서 삐진 것처럼 볼을 부풀린 채 조잘거리는 한준을 더 보기 위해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다.
정연이 수상한 이유를 저 혼자 조잘조잘, 몸은 아이지만 두뇌는 어른인 명탐정마냥 몇 가지씩 늘어놓는 한준이 정말, 다소, 많이, 굉장히, 꽤 귀엽기는 했지만, 정연은 진지한 햄스터를 보며 혼자 즐거워하는 그런 악독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웃으면서 넘어가려고 해도 안 넘어갈 거니까…! 너무 웃지 마.”
어쩌면 맞을 수도 있고. 눈치 없이 혼자 올라가 있던 입꼬리를 손으로 더듬어 끌어 내리고 심각하고 심오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둘러대야 좋을지 몇 초 정도 고민하다 서두를 텄다.
“사실 집에….”
“집에?”
“집에…… 바퀴벌레가 나와서. 대청소 중이거든. 그래서 요새 좀 바빠.”
바퀴벌레라는 마법의 단어에 옆자리에 서 있던 사람이 슬쩍 몸을 피하는 것이 느껴졌다. 막상 피해야 할 애는 삐진 척하던 것도 잊고 눈을 댕그랗게 뜬 채로 큰일이네, 바퀴벌레 한 마리가 보이면 열 마리가 사는 거랬는데, 그런 말을 종알거리고 있었다.
옆자리 사람이 조금 더 멀어졌다. 공간이 넉넉하기만 했다면 당장 지구 반대편으로 도망칠 태세였다. 정연은 그렇게 삽시간에 바퀴벌레 열 마리와 동거하는 사람이 되었다.
“혼자서 청소하고 있는 거야?”
“응. 사람 부르기도 뭐해서.”
“내가 가서 도와줄까? 나도 벌레 잘 잡는데.”
“아니!”
잠시 기겁해서 높아진 목소리에 주변의 눈총이 쏟아져서 정연은 금방 합죽이가 되었다. 젠장, 하기는, 한준은 벌레조차 밟아 죽이기에는 불쌍하다며 손으로 덥석 집어 창밖으로 날려 보내는 천사 같은 마음의 소유자였다. 그렇다고 해서 바퀴벌레까지 집으로 돌아가렴, 해 줄 줄은 몰랐는데. 이 아기 천사 같은 녀석. 험담인지 칭찬인지 분류가 불분명한 상념을 지우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안 그래도 돼. 거의 다 했고, 나도 벌레 잡을 줄 알고, 시험도 얼마 안 남았고….”
끝도 없이 나오는 이유를 끝까지 딴청 한 번 피우지 않고 들어 준 한준이 둥글게 뜬 눈을 깜박이다, 톡 던지듯 물었다.
“연아, 뭐가 그렇게 걱정돼?”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뭐가 걱정되냐고.
네가. 네가 걱정돼. 순하고 다정하고 착한 네가 걱정돼. 그래서 그렇게 위험해 보이지 않는 지금의 이화영하고조차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엮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게는 말할 수 없다. 뻑뻑한 눈가를 손으로 훑어 문지르고 웃어넘기려 입꼬리를 당겼다.
“걱정 안 해. 그냥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너는 신경 쓸 필요 없어.
이 말에 납득했을까. 표정을 살피려는 찰나 한준이 고개를 숙였다. 잔뜩 기울어지던 동그란 머리통은 콩, 앞에 선 정연의 배 언저리에 이마를 박은 채 제 자리를 찾은 듯 멈췄다. 닿으면 분명 따끈따끈할 이마가 몇 겹의 옷에 막혀 미지근한 압력으로만 느껴졌다.
“있지, 나는 연이가 걱정돼.”
꼭 …같아서. 꼭 지지부진한 영화나 게임의 클리셰처럼 지하철 문이 열리는 소리에 한준의 작은 중얼거림이 묻혔다.
이미 가득 찬 지하철 안으로 어떻게든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는 사람들 틈 사이의 할머니 한 분에게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는 한준을 굳이 잡아 무슨 말을 한 거냐고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정연도 짐작할 수 있는 말이었으니까.
아마 그때 같다는 말이겠지. 정연이 기억을 잃고 병원에서 눈을 떴던 때. 지금까지도 자세한 진상은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 또 다른 공략 인물인 최서희와 얽혔을 것이 분명한.
하지만 그때와는 달라.
나는 조금 더 잘할 거야. 그렇게 말로 불안을 덜어 주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라서, 정연은 입을 꾹 다물고 파도의 포말 같은 사람들과 한준 사이에 끼어든 채로 지하철 문이 다시 열릴 때까지 한참을 흔들렸다. 제 옆에 선 소꿉친구에게로 향하는 수상쩍은 손을 비틀고 실수인 것처럼 발을 밟고 팔꿈치로 명치를 찍으면서.
***
웅, 휴대 전화가 가볍게 울렸다.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푹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정연이, 알림을 울린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고 손가락만 놀려 타자를 쳤다.
오후 6:33 [그래서 옷 가격은 언제 알려주실 거에요?]>
지금까지 몇 번이고 물었던 상식적인 질문에 돌아온 것은 가열차기까지 한 매도였다.
<[어디 유전이라도 있?] 오후 6:33
<[세상 모든 일을 ㅈㄴ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네] 오후 6:34
또 이러네. 며칠 전인가부터 꾸준히, 정연의 학교가 끝났을 즈음만을 골라 메시지를 보내 대는 익명의 슬러시남 - 편의상 정연은 상대를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악의는 없다. 정말이다. - 은, 앞을 안 보고 뛰어다니다 남이 음료수를 엎게 한 인간의 도의상 차단은 못 하는 정연의 처지를 아는지 신경을 살살 긁었다.
옷 가격을 알려 달라고 하는 말을 꾸준히 무시하거나 개소리로 회피하고는, 어느 학교에 다니냐느니 몇 살이냐느니 지금 뭐 하냐느니 하는 실없는 질문들만 던져 대고는 했다. 물론 정연은 개인 정보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인 만큼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으므로, 결론적으로 보자면 서로 질문하고 또 서로 개무시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오후 6:35 [굳으로 해결할 수는 없잖아요.]>
성의 있게 대꾸해 주기도 귀찮아진 정연이 아무 말에는 아무 말로나 응대하자는 생각에 툭툭 입력한 문자에, 무슨 드립인지 이해를 못 한 건지 휴대폰이 잠시 조용해졌다. 글자를 뒤집어 보라는 힌트를 주고 나서야 도로 짧은 욕설 섞인 문자가 우르르 쏟아졌다.
문자를 보내려면 알이 필요하던 시대에는 이런 천인공노할 짓은 못 했는데. 세상의 발전이 젊은이 버릇을 망치는구나. 물구나무서서 보고 사천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서 봐도 꼰대 같은 생각을 하던 정연이 휴대 전화를 무음 모드로 변경하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소파 반대편에 앉아 빨래를 개던 이화영이 흘끗 시선을 보냈다.
“슬슬 저녁 먹을 준비 하려고요. 뭐 먹고 싶은 거…,”
있냐는, 지금까지 매번 물어봐도 제대로 된 답은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질문을 던지려는 찰나 도어 록의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띡띡, 말 틈새로 끼어들었다.
이런, 부모님인가. 보통은 오기 전에 문자하시는데, 작은 낭패감을 느끼면서도 허겁지겁 상황 파악 못 한 이화영을 손님방에 밀어 넣고, 조용히 있으라 입가에 손가락을 세워 보이고 급하게 문을 닫았을 즈음 현관문이 열렸다. 저녁나절의 찬바람이 훅 불어와 뺨을 간질였다.
“오셨어요?”
“…그래.”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굵직한 목소리에 뒤늦게 얼굴을 확인했다. 한정연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이 뼈대가 굵은 남자가 구두를 대강 벗어 두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반쯤 뒤집어진 신발을 툭툭 쳐 바르게 놓아두며 입 안으로 뺨을 훑었다. 별일이다. 한정연네 아버지가 집에를 다 오고. 워낙 바빠서 설날에도 잠깐 들러 세뱃돈만 주고 급히 회사 사람들과의 모임에 참여하러 떠나던 사람이.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 남자는 묵묵히 묵직한 종이 백만 들어 보였다. 넘겨 들여다보니 차곡차곡 개인 옷이 그득했다. 슬슬 추워지는 계절인 만큼 가을 옷을 가져다 놓고 겨울옷을 가지러 온 모양이었다.
“바쁘실 텐데 전화하시지 그러셨어요. 전처럼 가져다드리면 됐는데.”
“됐다.”
언제 봐도 말이 짧은 사람이다. 아양 떨 생각 없는 정연에게는 이쪽이 오히려 편하긴 하지만. 부부 침실로 걸어 들어가 옷장을 열고 그 안의 겨울옷을 차곡차곡 꺼내던 남자가 생각났다는 듯 조금 크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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