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고등학교 갈 준비는.”
“잘하고 있어요. 먼저 입시 치렀던 선배가 도와준다고 해서.”
“그럼 됐다. 기말 성적도 신경 쓰고.”
네, 하고 착하게 대답하고 슬쩍 남자의 동태를 살펴볼 수 있는 부엌 테이블에 앉았다. 아무래도 숨기는 게 있다 보니 마음이 불편해서 다리가 발발 떨리려는 것을 한 번 손으로 눌러 멈췄다. 얼마 걸리지 않아서 옷가지를 챙겨 나온 남자가 언제나처럼 회사로 돌아가겠거니, 싶었는데, 어째 방향이 현관이 아니라 손님방이었다. 아니, 아버지가 거길 왜 가요?
“손님방! …은 왜요.”
중간에 약간 삑 소리가 난 것이 민망해 얼굴을 훑는 정연을 남자가 돌아보았다. 무뚝뚝한 얼굴에 의아해하는 기색이 어렸다. 갑작스러운 관심에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겨울옷 나머지는 여기 있다던데. 네 엄마가.”
아. 설마 손님방 한구석에 쌓여 있던 상자가 그건가. 당황한 정연이 제지할 틈도 없이 아버지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이어질 사태를 걱정하느라 눈을 질끈 감은 것이 무색하게, 문고리는 덜걱거리기만 하고 열리지를 않았다. 이화영이 눈치 좋게도 안에서 문을 잠근 모양이었다.
나이스 플레이! 나중에 하이 파이브 하는 법도 가르쳐야지. 이걸로 위기는 넘긴 것 같아 조금 여유로워진 정연이 재차 말을 붙였다.
“문이 고장 났나 봐요. 가끔 혼자 잠기던데, 내일 수리해 주시는 아저씨 불러서 고쳐 달라고 할게요. 옷은 회사 앞 호텔로 가져다드리면,”
“아니, 넌 가서 네 할 공부 해라.”
“…오늘은 일 안 바쁘세요?”
“알아서 하마.”
이건 또 무슨 X고집이야. 정연이 곤혹스러워하는 사이 남자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방문 열쇠의 위치까지 알아내는 추진력을 보였다. 운전 중에 꼭 그런 걸 물어봐야겠냐는 어머니의 가벼운 짜증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끝까지 듣고 전화를 끊은 아버지가 도로 부부 침실로 들어갔다.
이걸 노골적으로 말렸다가는 더 수상해 보일 테고, 그렇다고 진짜 게임 속의 막장 선택지처럼 아버지의 머리를 꽃병 같은 걸로 내리쳐 기절하게 만드는 패륜적 선택을 할 수도 없었던 정연이 몰래 슬쩍 문을 노크하고 속삭였다.
“…숨어요.”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렇게 귀띔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잠시 후 돌아온 남자가 열쇠로 어렵지 않게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에 방 안에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면 문 너머로 속삭인 그 소리가 제대로 들렸던 것 같다. 말이 없어서 둔해 보여 그렇지, 제법 빠릿빠릿한 면이 있다니까.
방 한편에 그득 쌓인 상자를 뒤적이던 남자가 사람도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옷장을 열었을 때에는 긴장으로 잠시 숨을 멈췄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안에는 켜켜이 쌓인 옷뿐이었다.
겨울옷을 죄 챙긴 아버지가 방을 나서다 시선을 바닥으로 향한 채 이런 말을 할 때까지만 해도, 정연은 이번 일을 무사히 넘긴 줄 알았다.
“…저건 뭐냐.”
침대 밑으로 비죽하니 추리닝 저지 자락이 삐져나와 있지만 않았어도 참 좋았을 텐데.
그래, 화영아. 너는 최선을 다했다. 네가 언제 또 침대 밑 같은 먼지 구덩이에 들어가 봤겠니….
성격 급한 아버지가 정연에게 뭐냐 물어봐 놓고 대답하기도 전에 바닥에 쪼그려 앉아 침대 밑을 들여다본 덕분에, 수습의 여지도 없이 이화영을 들키고 말았다. 이렇게 된 거 애를 저 구석에 계속 둘 수도 없으니 팔을 잡아 침대 밑에서 나오는 걸 도와주는 내내 뒤통수가 따끔따끔했다.
먼지가 묻은 이화영의 옷자락을 탈탈 털어 주고, 괜찮을 거라고 말해 줄 틈은 없어 손등만 가볍게 툭툭 쳐 주고 손을 뗄 때까지도 매서운 시선은 여전했다. 시선으로 사람이 닳는다면 아마 정연의 뒤통수는 이 순간 맥반석 달걀 뺨치게 반들반들해졌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남자 옷 - 그것도 정연의 옷 - 을 걸치고 있는 여자애 - 남자애지만 - 를 집에 숨겨 뒀다가 그걸 또 고스란히 적발당한 중3짜리 남자애라, 변명할 여지도 없이 수상하긴 하지.
그렇다고 마냥 해명을 포기할 수도 없으니 무어라 입을 열려는 찰나, 남자가 정연과 이화영에게 훅 가까워졌다. 작게 숨죽이는 소리와 함께 이화영의 어깨가 속살을 잘못 찔린 가리비마냥 한순간 확 움츠러들었다. 남의 집 애를 핍박할 만한 사람은 아니니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된다고 슬쩍 안심시켜 주려는 찰나, 그림자가 드리울 정도로 가까워진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뭐, 문이 혼자 잠겨?”
“…….”
“가끔 준이가 와서 자고 가?”
“…….”
네, 네. 소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어린놈의 자식이, 벌써부터 계집질에 빠져서는….”
음,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들은 말 중에 가장 긴 문장인 것 같은데. 한순간 그런 때에 맞지 않는 생각을 하자면,
짝!
살이 거칠게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뺨이 화끈거렸다. 나름 튼튼한 몸이라고 생각했는데, 성인 남성의 손찌검을 받아 낼 정도는 아니었는지 머리가 훽 돌아갔다. 애초에 피할 생각도 안 한 탓에 몸이 휘청거렸다. 전생에 정연이 무슨 말만 하면 싸가지 없는 새끼라며 사랑의 빠따를 들고 오던 선생도 피하면 더 노발대발하고는 했으니 피하지 않는 것은 반쯤 습관이었다.
몇 대 정도는 얌전히 맞을 생각으로 가만히 서 있자니 찬 바람이 불어 열 오른 뺨을 식혔다. 아, 아까 현관문이 잘 안 닫혔나… 시선을 돌리면,
“주차 자리가 꽉 차서 한참 빙빙 돌았네, 나 왔….”
꼭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시선이 맞닿고, 툭, 하고 어머니의 손에 들려 있던 피자 박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막장 드라마 전개에 익숙한 정연의 뇌내에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보았을 배경 음악이 재생되었다. Cause you’re my girl…. 젠장할! 다음 편 예고.
난 X 됐다.
구태여 부정하자면, 그 뒤로 정연이 바로 X 되지는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부자간에 벌어진 폭력의 현장을 목격한 정연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끌어다 베란다에 틀어박혔기 때문이다. 베란다 겹창 너머로 왜 애를 때리냐, 그럼 나이도 어린 게 여자나 후리고 다니는데 맞아야지 나는 내 자식새끼 버릇없이 키울 생각 없다느니, 평소에 애한테 관심이나 가지라느니, 하는 고성이 오갔다.
그동안 정연은 눈치를 보면서 부엌 테이블에 앉아 발가락이나 배배 꼬았다. 차라리 바로 혼났으면 맘이라도 편할 텐데, 순번을 기다리자니 제법 긴장된다. 참, 어린애도 아니고.
정신없는 틈을 타 방 안으로 들여보낸 이화영은 뭘 하고 있을까. 들여다보고 싶어도 상황이 여의치가 않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 결국 생각을 포기하고 시계를 올려다볼 즈음 베란다의 미닫이문이 퍽,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한정연의 아버지가 성큼성큼 나와 현관문을 열고 나가 버린 건 한순간의 일이었다. 그 짧은 사이에 스치듯 내려다보는 시선이 선명하게 꽂혔다.
“못난 놈….”
틀린 말은 아니군. 정연은 눈만 느릿느릿 껌벅이다, 이어 쾅 닫힌 현관문에서 시선을 돌렸다. 문이 잠겼습니다, 하는 알림음이 울리고 한 박자 늦게, 정연이 차마 내뱉지 못한 한숨을 대신 쉬듯 정연의 어머니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베란다에서 나왔다.
“아들, 얘기 좀 하자.”
“……네.”
지은 죄가 있는 만큼 알아서 납죽 엎드리기로 결정하고 유순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안타깝게도 얼굴 생김새의 한계로 그리 순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한준이었더라면 이런 취조 자리쯤은 눈물 한 번 글썽이는 걸로 빠져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세상이 이렇게 공정하지 못하다.
한참 소리를 질러 대느라 조금 지쳐 보이는 어머니에게 눈치껏 미리 떠 둔 찬물을 슬쩍 밀어 드렸더니, 물 마시는 사이 잠깐이라도 틈을 벌려고 한 야비한 속셈을 눈치라도 채신 건지 이야기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집에 여자친구를 데려오기에는 조금 이른 나이 아니니.”
“…여자친구 아니에요.”
“여자친구도 아닌 여자애를 집에 데려오기에는 더 이르지!”
맞는 말이지만, 정말 진짜 틀린 구석이 조금도 없는 말이지만, 이화영은 애초에 여자도 아니다. 이성 간보다는 동성 간인 쪽이 훨씬 더 건전해 보일 테고 그러면 해명하기에 한결 편해질 테지만, 허락 없이 남의 비밀을 냅다 떠벌릴 수는 없었으므로 정연만 혼자 억울했다.
그래도 집세도 안 내고 사는 주제에 부모님 집에 몰래 사람 하나를 데려다가 앉혀 놨다는 죄목이 있으므로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말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잖니. 너는 항상….”
기가 막히다는 듯 말을 잇지 않고 미간을 꾹꾹 누르는 어머니의 모습에 솔직히 말하자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자식이라고 하나 있는 게 잊을 만하면 사고를 쳐 대니 얼마나 황당하겠나.
정연은 자식을 가져 본 적이 없었지만 만약에 자신이 자식처럼 키운 한준이 어느 날 웬 여자아이를 데려다가 집에 앉혀놓고 둘이서 동거 비슷한 일을 한다고 하면 기절을 넘어 그 자리에서 정신적 충격으로 사망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따끔따끔, 신발 밑창의 모래마냥 가슴을 찔러 대던 죄책감이 조금 더 심해졌다.
“그래서, 지금도 말 안 할 거니?”
“…엄마에게 부끄러울 만한 행동은 하나도 안 했어요.”
“한정연, 엄마는 지금 네가 나쁜 일을 했을 거라고 생각해서 화내는 게 아니야.”
“…….”
“그렇게 계속 네가 너한테 일어나는 일을 숨기면, 정말로 도움이 필요할 때에도 엄마가 모르게 될까 봐 그러는 거잖아. 또 그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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