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1화 (1/111)

#1

도깨비놀음

한봄이었다. 온갖 기묘 화초들이 피어난 금성(金性)의 궁원도 봄맞이에 한창이었다. 궁인들은 이 쾌청한 날씨를 보다 담뿍 느끼기 위하여 너나 할 것 없이 근처의 남천가로 나들이를 꾸민 터였다. 하오의 따끈따끈한 햇볕을 받아 녹녹하게 데워진 물결 위로 투명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주변을 병풍처럼 둘러친 남산의 거대한 산허리에는 뽀얀 물안개가 휘감겨 오르고 있었다.

향선(香仙, 무동(武童)들을 이끄는 풍류랑) 홍의는 정갈히 푸새한 붉은 나들잇벌에 화구통을 맨 차림으로 여흥이 벌어지는 자리에 당도하였다. 입가에 진진한 미소를 머금고 눈앞의 전경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그는 약관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소년처럼 쾌활한 구석이 있었다.

물가의 바위에 걸터앉아 시를 짓고 노는 묵객들, 향비파를 타는 사내와 꽃 가락에 심취하여 손끝으로 박을 타는 여인들, 멀찍이 남천 건너 살구나무 아래에는 입으로 챙챙 쇳소리를 내며 향선 놀이를 하고 있는 삼척동자들까지, 보는 이의 맘조차 절로 화락하게 만드는 벽해국(碧海國) 특유의 진풍경이다.

“도솔천이 따로 있나.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이로구나.”

홍의는 반짝이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서둘러 챙겨 온 화구를 펼쳐 놓고 먹을 갈았다.

붓을 잣대로 남산을 기준 삼아 눈을 굴리며 각도를 살피는데, 때마침 누마루에 올라앉은 풍류 귀족들과 여인들을 발견했다.

주안이 산처럼 쌓였다. 시종들을 호령해 가며 먹을 것 마실 것을 가득 차린 그들은 흥취를 돋우기 위한 방법으로 주사위 놀이를 선택한 듯했다. 귀족들은 허리띠를 풀러 이마에 휘휘친친 동여매고는 큰 일 보는 자세로 쪼그려 앉아 핑글핑글 돌아가는 구에 대고 더! 더! 더! 를 외치고 있었다. 눈까지 벌건 것이 상태가 적이 심각해 보였다.

“얼쑤! 연홍이로구나! 연홍이가 걸려 버렸구나!”

“지화자!”

연홍은 미간을 팍 구겼다. 머릿속에서는 육두문자가 회오리치는 중이었다. 시답잖은 놀이에는 흥미가 없어 구석진 곳에 홀로 앉아 꽃 점이나 치던 중이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이람? 뽀얀 손가락에 조용히 힘이 들어간다. 빨간 작약이 꾹 억세게 쥐어 짜여 곧 유명을 달리하였다.

“콧대 높기로 말할 것 같으면 저것이 벽해의 지존이지, 아마?”

“네 이년! 어서 태를 드러내지 않고 무얼 하느냐?”

“내 오늘 연홍을 태우고 한 마리의 말처럼 광야를 달리렷다! 이랴, 이랴!”

‘…아주 지랄을 벗 삼고 있네.’

이미 연홍의 눈에 그들은 회까닥 미친 말 떼가 귀족의 탈을 쓴 채 네굽질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녀와 같은 처지인 다른 여인들조차 딸가닥딸가닥 말발굽 소리를 효과음으로 내어 주고 있으니 황망할 따름이다.

연홍은 도경의 장거리에서 당혜를 만드는 갖바치의 딸로 태어나 열여섯 살 때 사내들과 정분이나 쌓고 놀라며 금성의 다향원(多香院)으로 끌려 들어왔다. 서민치고 유난히 용모가 곱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다향원에 들어서는 해어화(解語花, 말하는 꽃)로 분류되어 사내들의 유희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다른 계집들처럼 자신의 처지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희희낙락할 수가 없었다. 궁 밖에 살 적에도 장터의 무뢰배들이 수작을 붙이거나 약을 올리면 머리 풀고 바락바락 덤비는 통에 어떤 사내도 그녀 앞에서는 함부로 굴지 못하고 쩔쩔매곤 했다. 여느 여인답잖게 대쪽 같은 성격이 문제라면 문제였을까. 본디 얼굴이 고우면 팔자가 사납고, 팔자가 사나우면 일신이 고단하니 성깔도 그만치 사나워지는 것이 당연했다.

“싫습니다.”

악문 잇새로 나름 사납게 쏘아붙여 본 것이지만 사내들 듣기에는 그렇지 않았는가 보다. 오히려 박 터지는 야유를 흘리며 좋다고 더 해 달라고 손뼉까지 치는 것이었다. 연홍은 기가 막혔다.

“그래, 정 싫으면 내 손으로 벗겨 주랴?”

“저는 싫다고 하였습니다! 여인이 어찌 이런 탁 트인 곳에서 훌렁훌렁 옷을 벗는답니까!”

“네 이년! 본디 이 나라의 도는 남과 여의 구분이나 신분의 분별없이 마음껏 벗고 노는 데 있거늘, 어디서 악을 쓰고 반항하는 게냐?”

그때까지만 해도 저것이 괜한 엄부럭을 부린다며 낄낄거리던 풍류랑들은 연홍의 반항이 계속되자 야차처럼 돌변해서는 그녀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잔뜩 겁먹은 다른 해어화들은 독 안에 몰린 쥐새끼들마냥 누각의 구석으로 몰려가 어찌할 바 모르고 발만 동동 굴러 대었다.

“천한 해어화가 감히 신통 향선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냐?”

향선 하나가 옷깃을 쥐자 연홍이 기함하며 그의 팔뚝을 콱 물어뜯었다. 그러자 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주먹이 하늘로 솟아올랐다가, 여인의 여린 뺨으로 빠르게 휘어지려 했다.

“이보게… 해운.”

“헉.”

별안간 귓전을 폭 적시는 낯모를 사내의 뜨뜻한 숨결에 귀가 약한 해운이 돌처럼 굳었다.

삽시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해운은 이어서 꼬리뼈부터 뒷덜미까지 아스스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한차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사내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연홍은 이를 따닥따닥 부딪치다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연홍아….”

“연홍아, 괜찮니?”

그제야 저편에 숨어 있던 여인들도 우르르 달려 나와 사내들 사이를 헤쳐 연홍을 건져 부축하였다. 분위기가 황망한 가운데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린 해운이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의 시선도 뒤로 향하였다.

향선 홍의가 붉은 정복 자락 휘날리며 씽긋 웃고 서 있었다.

***

“본디 해어화들은 사내들 좋으라고 황제께서 내리신 노리개 집단이다. 그러므로 향선들이 죽으라는 명을 했다면 그 짓시늉이라도 하여야 마땅할지어다.”

“그건 네 생각이고요.”

그리 딱 잘라 대꾸하는 홍의는 편편한 바위 위에 전형적인 한량의 자세로 드러누워 코를 후비는 중이었다. 해운은 분을 삭이려 애썼다. 전할 말이 있다기에 따라오긴 왔는데 아까부터 저치는 바위와 물아일체가 된 마냥 철썩 눌어붙어 뒹굴뒹굴 구르고 있을 뿐이다.

“허면, 신통 귀족인 내가 해어화들에게 애걸복걸 매달리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이냐?”

술기운이 깨어 가자 머리도 아프고 속도 안 좋고 게다가 연홍이 속살도 구경 못 했고. 좌우지간 해운은 모든 게 짜증스러웠다.

홍의는 양팔을 뒤통수에 괴고 하늘을 향해 누워서는, 꼰 발끝을 까딱거렸다.

“자네를 보면 심히 안타까워.”

“뭐가?”

“너무 못돼 처먹어서.”

“…….”

“모든 여인들이 자네를 쥐며느리 똥 보듯이 하잖아. 나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다들 좋다고 따르는데.”

해운은 순간 뒷골이 팍 당겨 잠시 눈을 감고 참을 인 자를 되새겼다.

“하지만 나는 자네의 그 불한당 같은 성미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지.”

의미심장한 언질에 당황한 나머지 해운은 자기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어느덧 홍의는 바위에서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 야릇한 눈빛을 쏘고 있었다.

“남근이 물렁하여 고민이지?”

쿠쿵. 무거운 바윗덩이가 정수리로 떨어져 내린 것 같았다.

“그, 그걸 네놈이 어떻게….”

“일전에 자네와 방사를 나누고 돌아오던 해어화에게 들었지. 아무리 용천지랄을 해도 물건이 제대로 서질 않자 패악을 부리면서 주변의 잡기들을 집어던졌다지. 쯧…. 어찌 그리 금수만도 못한 짓거리를.”

“망할 년! 내 그토록 입단속을 시켰건만!”

제기랄, 젠장, 빌어먹을, 씨불알. 아는 욕이란 욕은 다 비어져 나왔다. 이러한 사실이 다향원에 퍼진다면 앞으로 무슨 낯으로 무동들을 진두지휘할 수 있겠는가. 당장에 그 해어화부터 잡아서 족치겠다는 심보로 매어 차고 있던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가부좌 튼 자세로 턱을 괴고 있던 홍의에게서 곧 땅이 꺼질 듯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찌 그 나이가 되도록 깨치지를 못하나. 여인과의 방사에 있어 중한 것은 벌떡벌떡 잘 서는 남근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허면 무엇이 중하단 말인가?”

되물으면서도 해운은 연신 미심쩍은 표정으로 홍의의 면면을 곰곰이 뜯어보고 있었다.

“비단도 좋고 패물도 좋고 돌처럼 단단한 음경도 좋겠지만, 결국 여인을 사로잡는 것은 다정한 말 한마디일세. 특히나 해어화들은 노류장화로 분류되어 매일 짐승 같은 사내들에게 시달리는 처지가 아닌가. 상황이 그러하니 박정한 개차반보다야 자신을 귀하게 대해 줄 다정한 사내에게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

“…….”

“내 말이 틀렸는가?”

틀린 말인지 맞는 말인지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었다. 단지 해운은 논리에 통감하기보다 처음으로 섞어 본 홍의의 말재간에 기가 막혔다. 해운은 이 나라 황후와 그녀의 정부인 군우령(軍右令, 군사 총독)의 아들이었다. 세간에서 황족 다음으로 쳐주는, 아주 잘 나가는 신통 귀족이라는 말이다. 때문에 같은 향선이라도 인통에 따라 격을 두고 철저하게 서열을 나눠, 평소 신통 아닌 귀족들과는 눈도 맞추지 않고 말도 섞지 않고 데면데면하게 지내 왔다.

홍의는 기껏해야 하급 귀족인 칠별관(柒別官) 문성의 아들이었다. 그럼에도 출중한 외모와 호탕한 성정 때문인지 향선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고, 그를 추앙하여 따르는 무동이 수십 명이었다.

‘별 볼 일 없는 가문의 칠별관 나부랭이가 저토록 각광받는 것이 기이하다 싶었는데, 지금 보니 알 만도 하군.’

매끈하고 사내다운 외모는 차치하고서라도, 검고 맑은 눈동자와 나직한 저음의 음성에는 묘하게 사람을 신뢰하게 만드는 힘이 깃든 것 같았다. 하마터면 저까지 홀릴 뻔한 것이다. 해운은 희뿌연 머릿속을 다잡으려 푸드덕 고개를 털었다. 그리고 다시 못된 심보를 자락자락 드러냈다.

“허튼소리 마라. 양물만 발딱발딱 잘 선다면야 내가 굳이 여인들에게 독살 맞게 굴 이유도 없었어. 네놈이 내 심정을 알아? 꽃을 보고도 취할 수 없으니 부러 더 추욕을 부리는 이 심정을 말이야….”

여기서 서럽다고 하면 몰매 맞을 일이겠지만 어쨌든 해운으로서는 자기 자신이 불쌍하고 안타까워 미칠 것만 같았다. 한 번도 남에게 터놓은 적 없던 속내를 지껄이다 보니 더 그런 듯했다.

“허면, 만일 내가 방법을 일러 준다면 이 이상 추태를 부리지 않겠노라 약조할 수 있겠는가?”

홍의는 여상한 어조로 건수를 던져 왔다. 이것을 물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해운은 가타부타 대답 없이 홍의에게로 다가가 그의 손을 턱 붙들고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탐탁잖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다 이내 소매 아가리를 열어 한지를 여러 겹 풀 먹여 싼 작은 꾸러미를 내밀었다.

“정력제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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