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잠시 복잡한 혼란을 겪던 홍의는 한참 뒤 차분히 입을 떼었다.
“황후 마마께서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미욱한 소인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태자가 파정에 이르지 못한다.”
“…….”
‘태자께서 지루라굽쇼?’
홍의는 퍽 당황스러웠다.
‘헌데 그 이야길 왜 나한테 하는 건데?’
황후는 한번 운을 떼더니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나가기로 맘먹은 듯 의자까지 바싹 끌어다 앉았다.
“용정을 이끌어 내기 위해 의원들을 통해 최고의 약재를 써 봐도 별다른 효험이 없더구나. 정모의 말로는 태생적으로 양기가 부실한 탓이라는데, 내 그 말을 듣고 기함을 하였다. 태자가 어린 시절부터 사내치고 격검을 싫어하고 말타기도 멀리하던 터라 기이하다 여기긴 했으나 이런 식으로 동티가 날 줄은 몰랐느니라.”
황후는 이내 목소리를 낮추었다.
“해서 태자의 양기를 보할 특약 처방으로 색신을 붙일까 하는데.”
그 말을 듣자 머릿골에 담긴 물이 파도치는 것 같았다. 의자채로 뒤로 넘어갈 뻔한 몸을 애써 억누르는데, 황후는 두 눈을 지그시 위로 치뜨며 매서운 시선을 쏘았다.
“네가 태자의 스승이 되어 올바른 색도를 가르칠 수 있겠느냐?”
“…….”
거부하면 죽이겠다는 표정이었다.
***
허허로운 목덜미를 연신 손으로 훔치며 확인한다. 꼭 턱 아래 시퍼런 칼날이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그 언저리가 싸늘하고 온몸의 터럭이 곤두서는 탓이었다. 사내로서의 길, 사내로서의 삶, 오롯이 사내로서의 안녕만을 생각하며 살았던 홍의에게 있어 황후의 제안은 너무도 뜬금없었다.
물론 벽해국에서는 남색이 금기가 아니었다. 특히 꽃 같은 미남 미녀가 도처에 널린 다향원에서는 누군가를 사랑함에 있어 크게 남녀의 유별을 따지지 않는 편이었다.
‘다향원’은 금성의 유서 깊은 귀족 기숙 학교이자 수련관이었다. 벽해의 시조인 진성대제와 건국 공신 도선 공이 정계의 등용문으로써 귀족가의 미동을 모아 무, 악, 예, 서, 시, 화를 두루 가르쳤는데, 재상의 자제 중 이 여섯 가지 과목을 어느 정도 통달한 자에게만 ‘향선’의 위를 내려 무동들을 이끌게 하였다.
젊고 아름답고 건강한 청년들이 매일 모여 함께 공부하고 청유하고 사냥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데, 자자구구 따질 것이 무에 있는가. 그러다 보니 한때는 유행처럼 단수(斷袖)가 번져, 잘생긴 향선끼리 뜨겁게 몸을 섞고 서로 연모하여 사귀는 일이 다향원의 한 문화로 자리 잡은 적도 있다고 했다.
문제는, 홍의만은 유독 남색에 선을 그었다는 것이었다.
홍의는 지금껏 연이 닿았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어린 시절 멋모르고 연모했던 앞집의 어여쁜 소녀, 다향원에 들어 신분의 격차로 멀어져야만 했던 해어화 달래…. 이렇듯 연정의 상대는 죄다 여인이었다. 훗날 혼인을 한다면 그 여인과 대대손손 천년 해로 하려고 방중 비사를 공부한 것이지, 사내에게 써먹으려고 공부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무엇보다 정확히 황후의 명령이 어떤 뜻인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양기를 보하라는 말인즉슨 태자를 몸으로 위로하여 파정을 도우라는 뜻인가, 아니면 그에 맞는 방중술을 따로 교육하라는 뜻인가? 후자라면 그나마 나을 성싶지만 둘 다 몸서리쳐지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당연히 받아들이셔야지요.”
그런데 이 일을 의논하자마자 새옹은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전투적으로 말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황후 마마와 태자 전하의 총애를 동시에 받는다면 훗날 주군께서 부제 향선에 오를 때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실 겁니다. 또한 원주(院主, 다향원의 주인)에 올라서도 위신을 단단히 하시어 보다 수월하게 다른 향선들을 행호령할 수 있겠지요. 부디 주군의 행보에 저희 무동들 수십의 목숨이 달렸다는 걸 한시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서슬이 시퍼렜다. 새옹의 기에 눌려 억지로 내뱉는 말대답 소리가 잔뜩 기어들어 갔다.
“하지만 난 비역질에는 통 자신이 없는걸….”
“굳이 비역이라고 단정 지을 건 또 뭐랍니까? 황후께서 색도를 가르치라 하셨다면서요? 몸이 아니라 입으로 교육하는 방법도 있는 것입니다.”
“입으로?”
홍의가 흠칫하자 새옹은 뱁새눈을 떴다.
“그 입 말고요.”
“…그래.”
홍의는 눈에 띄게 풀 죽어 있었다. 매사 자신만만하던 인사가 저리 축 처져 있으니 새옹도 얼마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속타산이라는 것을 좀 하시라고요. 주군께서 이번 일에 성과만 올리신다면 빚 청산은 따 놓은 당상이 아니겠습니까? 이까짓 요상한 그림 쪼가리나 파느니 그쪽이 훨씬 이득이지요.”
처소에 굴러다니는 화선지를 가리키며 새옹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가세가 급격히 기운 탓에 홍의가 녹봉만으로는 빚을 감당할 수 없어 남몰래 어설픈 화공 흉내를 내고 산 지 수년째였다.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어 낮에는 수련을 하고 갈피짬마다 춘화를 그려서 서적상에 넘기는 식의 부업이었다.
“철정 열 냥짜리 춘화 팔아서 살림살이 나아지길 고대하느니, 태자 전하의 색신이 되는 편이 수지가 맞지 않겠습니까?”
새옹은 평소 잘 짓는 얄미운 표정으로 거듭 이기죽거렸고, 홍의는 짐짓 노해서 인상을 찡그렸다.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내가 진짜 화공도 아니고 딱히 이 일에 자부심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얼마 전부터 어떤 귀공이 제법 비싼 값을 쳐주고 내 춘화를 사들이고 있어.”
“예? 그건 또 어느 댁 색정광이실까요?”
“뭐 신분을 감추고 있는 탓에 자세히는 모르겠구나. 책쾌 말로는 젊은 귀족 자제인 것 같다고 하더라만… 좌우지간, 태자의 색신이 되어 성교육을 도맡는다면 지금처럼 춘화를 그릴 짬도 안 나지 않겠느냐? 귀한 손을 놓칠세라 벌써 신경이 쓰이는 것이지.”
고마운 사람이었다. 새옹은 색정광이라며 모함했지만 그분 덕택에 빚을 절반은 갚았다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사실 홍의의 춘화가 인기가 없는 이유는, 말 그대로 안 야해서 그렇다. 홍의는 춘화집에도 개성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때문에 낱장마다 시커먼 양물과 시뻘건 음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짐승처럼 흘레붙는 남녀의 그림만 가득한 여타의 춘화집과 차별성을 둔답시고 인물들에 죄 옷을 입혀 두었던 것이다. 당연히 민심은 홍의를 잡아 죽이려고 했다. 비싼 값을 치르고 잔뜩 기대하며 열어 본 춘화집에 막상 속살이 전무하다니, 멀거니 하늘만 올려보다 개한테 사타구니 물린 꼴과 다를 바가 없잖은가? 결국엔 구매자들이 다 같이 호미 들고 모여서 서적상을 장악하고 농성까지 벌이는 대참사를 빚었으니.
“그렇게 모두가 아니라고 외칠 때, 그분만이 나의 손을 들어 주었지. 그분은 시대를 앞서간 명화공 우립의 작품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알아봐 준 귀빈이었다고.”
새옹은 여전히 똥 씹은 얼굴이었다.
“귀빈이고 나발이고 언제까지 춘화만 그리고 사실 순 없는 거 아녜요… 향선으로서의 미래는 생각 안 하세요? 딴 건 차치하고 일단 태자 전하와 인연부터 잘 맺으시는 것이 주군의 신상에 가장 이로운 길이라고요.”
“…네놈은 태자 전하를 알면서도 그런 소리가 나온단 말이냐?”
“…….”
그토록 여문 새옹의 입조차 그 안건에 이르자 결국 꾹 닫히고 말았다.
홍의는 거듭 한숨을 쉬었다. 올해로 연치가 스물한 세 되셨다는 태자와 실질적으로 대면한 적은 없으나, 항간에 들리는 풍문으로도 그치는 어딘가 남달랐다.
실제로 벽해국의 이념은 사랑이었다. 죽어서 누릴 광명보다 살아 있을 때의 쾌락과 행복과 자유를 추구했다. 즐김의 미학이 여느 성서보다 신봉되었고, 그리하여 황실의 윤허 아래 사내들뿐만 아니라 여인들도 본남편을 제외한 정부를 얼마든지 둘 수 있었다.
황후 옥명을 예로 들자면 본남편인 황제와의 사이에서 황태자를 낳았고, 정부인 군우령 대윤과의 사이에서 아들 해운과 딸 준명을 낳았다. 비단 그녀뿐 아니라 황족들이 공공연히 사통하여 낳은 자식의 머릿수를 따지자면 군대를 삼아도 남아돈다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였다. 한마디로 공주도 왕자도 넘쳐나는 나라라고 볼 수 있겠다.
이렇듯 너나없이 귀한 와중에도, 아주 특별히 더 귀한 손은 있게 마련인데, 그가 바로 이 나라의 황태자였다.
오로지 황제 황후의 적통만이 황위에 오를 수 있다는 지엄한 혈통 제도 아래, 황상의 적자이며 장자이며 독자로서,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황태자의 위에 봉해진 위대한 자, 이 나라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적통 말이다.
뭐 귀한 손이니 다칠세라 병들세라, 모든 궁인들이 호들갑을 떨며 철저히 내실 안에서만 키운 탓에 태자의 동복형인 해운조차 제 아우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낯가리는 것이 병적으로 심해져, 종국엔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아예 꺼려 사신단의 연회나 순행 길에서조차 머리통 전체에 면사를 드리운다고 했다. 그에 다향원의 사내들은 툭하면 소리 죽여 태자의 용모에 관한 이야기를 떠벌리기 일쑤였다.
열다섯에 탈모가 와서 현재는 대머리가 되었다는 소문이 있네.
악귀가 쓰여 볕 쬐는 걸 싫어한다고 들었네.
오른쪽 눈은 왼쪽을 보고, 왼쪽 눈은 오른쪽을 본다고 하더군.
약관의 나이에 대머리에, 빙의에, 사시까지 겹치셨다니…. 참으로 벽국의 미래가.
좌우지간 스스로의 박색을 견디지 못하여 성질까지 개차반이 되셨다니, 수틀리면 궁인들을 겁박하고 심심하면 두드려 패는 것이 일과라고 하는구먼.
해서 태자궁의 시비들이 그리 자주 바뀌는 모양이구먼.
벽해, 이대로 가도 좋단 말인가?
거기에 ‘지루’인 점도 추가하고 보니, 그야말로 말세가 따로 없었다.
그날 밤, 홍의는 꿈을 꾸었다. 한밤중에 칠흑 같은 숲 속에서 징그러운 도깨비에게 쫓기는 꿈이었다. 정수리만 텅 빈 알머리는 달빛을 반사하며 번들거림을 자랑했고 갈비뼈에 비쩍 졸아붙은 살들이 볼썽사나웠다. 쫓아오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몇 발 도망가지도 못하고 붙잡혀 돌아봤을 때, 도깨비는 시커멓게 썩은 앞니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왜 도망을 가는 거지?’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오는 악취와 음침한 목소리가 우렁우렁 사위를 울렸다. 홍의는 덜덜 떨며 되물었다.
‘대, 대체 뉘시기에 저를 쫓으시는 겁니까?’
도깨비가 벌쭉 웃었다.
‘나? 태자.’
“…으아악!”
아닌 밤중에 다향원에서는 새벽 내내 악몽에 시달리는 홍의의 비명이 간헐적으로 울려 퍼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