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4화 (4/111)

#04

댓바람부터 붉은 정복을 꾸렸다. 유오를 떠나자며 매달리는 무동들도 뿌리치고 씩씩거리며 다향원 내정을 가로질렀다. 마침 연무장 근처의 정자에서 시시풍덩한 잡담을 나누고 있는 한 무더기의 신통 귀족들이 보였다. 홍의는 지체 없이 그들 앞으로 걸어갔다.

“어? 이게 누구야, 나의 절친한 붕우인 홍의가 아닌가?”

상석에 앉아 있던 해운이 대뜸 알은체를 해 왔다. 사내들의 시선이 동시에 홍의에게로 쏠렸다. 신통 가문의 능구렁이들은 죄다 여기 모여 있구먼. 홍의는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끼고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섰다. 평소 살가운 사이라고 할 수 없던 홍의의 등장에 사내들은 일제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해운만이 튕기듯 벌떡 일어나 홍의의 어깨를 끌어안고 시답잖은 입치레를 해 댔다.

“내 일전에 자네에게 큰 은혜를 입고 곧바로 어머니께 달려가 공을 치하하였네. 이제 우리 신통 가문의 휘하에 들어 더욱 도탑게 지내보는 것은 어떠한가?”

멋모르고 미주알고주알 떠벌리는 해운에게 잠자코 앉아 있던 신통 귀족 하나가 툭 묻는다.

“은혜라니, 해운, 자네가 홍의 따위에게 무슨 은혜를 어찌 입었단 말인가?”

“어? 어어…. 어어?”

차마 발기 부전 치료 약을 받았다고 토설할 수는 없어 해운은 갑자기 귀가 먹은 척을 했다. 멍청한 놈이었다. 홍의는 속으로 ‘따위? 따위?’ 곱새기며 콧김을 세차게 뿜고 있었다. 신통의 귀족들은 저희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으며 계속해서 홍의의 위아래를 살폈다. 대놓고 빈정거리는 사내도 있었다.

“저런 자와 어울렸다간 우리의 격마저 떨어진다고.”

“해운 자네는 우리 신통 향선들의 수장이 아닌가? 가문을 생각한다면 벗을 가려 사귀셔야지.”

내내 듣고 있던 홍의가 이윽고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허구한 날 모여서 하는 일이라곤 주색잡기에 오입질뿐인 놈들이 신통이랍시고 으스대기는. 미안하지만 나는 어리석은 짓거리에 열 올리고 할애할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결코 네놈들과 한패가 되어 어울릴 수도 없겠지.”

그에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펄펄 날뛰는 향선들을 간략하게 무시하고, 홍의는 멀뚱멀뚱 서 있던 해운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나와 따로 이야기 좀 하세.”

매화 숲을 막아선 돌담 앞에 멈춰 선 홍의는 그제야 휙 뒤를 돌아보았다. 묵직해진 고환에 자기도 모르게 깡총 뜀을 뛰며 즐거이 따라오던 해운은 그 매서운 눈초리에 당황하여 두 눈을 멀거니 끔적거렸다.

“말해 봐라.”

“무얼?”

홍의는 나지막이 이를 갈았다.

“대체 황후 마마께 무어라 고해바쳤기에 이 사달이 난 건지, 네놈의 주둥이로 낱낱이 지껄여 보란 말이다.”

그러자 해운은 이렇게 성질을 부리는 홍의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답답한 얼굴을 했다.

“아까부터 당최 무슨 말을 하는 겐가? 내 골골샅샅이 이야기했잖은가. 나는 자네에게 보은하기 위해 어머니께 간 것이라고.”

“…….”

“자네의 기묘한 정력제와 춘화집 덕분에 내 불알의 혈기를 되찾았고, 작일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도 자못 반성하던 참이었네. 어머니께서도 이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기뻐하셨는지, 앞으로는 자네를 우리 신통 가문의 산하로 들여 형제처럼 지내라 하셨네. 이거야말로 경사가 아닌가?”

‘경사 같은 소리 하네.’

홍의는 헛웃음이 나왔다. 똥인지 된장인지 맛을 봬 주어야 하나? 허우대만 멀대 같아서는 방정맞게 입방아나 찧고 다니는 꼴이라니. 처음에는 소매 걷어붙이고 드잡이라도 할 요량이었지만, 천진난만한 얼굴로 마냥 기꺼워하는 꼴을 보니 손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하긴. 저놈이 이리될 줄 알고 그랬겠는가.’

애초에 오지랖을 부린 자신의 탓인 것 같아 앙다문 입 안이 썼다. 홍의는 돌담에 등을 기대섰다. 오가는 이 없는 고요한 숲을 등지고 나란히 선 두 향선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홍의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매인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워 그랬고, 해운은 그런 홍의의 눈치를 보느라 그랬다.

“태자 전하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네.”

줄곧 빈 곳만을 바라보던 홍의에게서 나직한 음성이 새 나온 것도 그때였다. 해운은 뜬금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태자 전하에 대하여? 갑자기 그건 왜?”

“자네는 태자 전하와 같은 태를 빌어 난 형제가 아닌가. 그럼에도 정녕 태자 전하의 얼굴을 뵌 적이 없다고?”

홍의는 해운의 생김새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젊었을 적 벽해 최고의 미남자였다던 대윤과 마찬가지로 제일의 미인이라 칭송받는 황후의 아들답게 어디 하나 모난 곳 없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매사 덤벙이기 일쑤인 데다 성격이 심각한 개차반이라 그 지미한 용모가 하등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뿐. 아무튼 동복형인 해운의 미모가 이 정도인데, 그 아우인 태자가 흉측하다는 소문은 아무래도 신빙성이 없다고 느껴졌다.

“으음….”

해운은 어쩐지 한참 동안 대답을 우물거리다가 이내 입을 떼었다.

“나는 어릴 적에는 이 금성이 아니라 아버지 대윤 공의 사가가 있는 도경에서 자랐네. 해서 종종 어머니를 뵈러 금성에 놀러 왔고, 어머니는 내게 동복아우인 태자 전하를 소개해 주었다네. 헌데… 그때도 마찬가지였네. 전하는 그 누구에게도 도통 얼굴을 보여 주려 하지 않으셨어. 어머니께서 말씀하기로, 별스러울 만큼 낯을 가리고 신경질이 심한 아이라서 그렇다던가.”

그리 별스러운 인간을 어찌 교육하라는 말인가. 홍의는 일순 울고 싶었다.

“이제 와 하는 말인데, 그분은 내 동복아우였지만,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나는 그분이 두려웠네.”

해운은 미간을 지긋이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막 해운의 나이 여덟 살, 태자의 나이 여섯 살이 되었을 때였다. 그날도 해운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도경의 사택을 벗어나 금성 나들이를 나간 참이었다. 사실 해운은 말수 적고 늘 얼굴에 쓰개를 드리운 채 유령처럼 동동 떠다니는 듯한 별난 아우와는 놀고 싶지 않았다. 그때도 가문의 어른들 사이에서는 어린 태자에게 재액이 끼었다느니, 새벽이면 수십의 도깨비 떼를 따라 밤마을을 나돈다느니 하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지엄한 명을 거부할 수는 없어 하는 수 없이 태자궁의 솟을대문을 넘었고, 그날, 태자와 마주쳤다.

어린 해운은 괴괴할 만큼 적막이 흐르는 안뜰로 조심스레 들어섰다. 사방이 고요하고, 스산한 바람결이 윙윙 소리를 내며 허공을 휘돌았다. 그런데 얼마 후, 해운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붙잡힌 듯 얼어 버렸다. 태자궁의 뒤뜰에서 커다랗고 사나운 검둥개 두 마리가 튀어나와 시뻘건 잇몸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피가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줄도 몰랐다. 검둥개들의 눈에는 핏발이 자락자락 서 있었고 뾰족한 잇새에서는 끈적거리는 거품 침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곧이라도 달려들어 모가지를 콱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두려움이었다. 그렇게 오줌만 줄줄 지리며 이러구러 못 하고 와들와들 떨고 있는데, 마침 뒤뜰의 전각 뒤에 숨어 있던 조그만 태자 전하가 목을 길게 내빼고 이쪽을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태자는 시커멓고 흉측한 도깨비 가면을 쓰고 있었다. 검은색과 황토색과 빨간색이 뒤섞여 난잡하기 그지없는 것이 두 눈을 내리뜨고 형형하게 해운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기우뚱, 도깨비 가면이 천천히 기울었다.

넓은 안뜰이 컹컹 울릴 만큼 사나운 개 짖는 소리에 맞춰 심장도 쾅쾅 울려 대었다. 무시무시하였다. 이윽고 도깨비 형상을 한 태자가 전각 뒤에서 슬그머니 몸을 내밀었다. 그제야 번쩍 정신이 든 해운은 그 자리에서 비명을 지르며 온 힘을 다해 미친 듯이 달아났다.

그 기괴했던 만남은 어린 해운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또한 그 기억의 조각이 태자에 대한 막연한 무섬증으로 자리 잡아, 그 뒤로 두 번 다시 태자궁을 찾지 않는 계기가 되었다.

“성정이 까칠하여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는 건 말이 안 돼. 결국 전하의 흉허물을 가리려는 어머니의 술수인 게지. 실로 전하께서 말짱하다면 근 이십 해를 그리 숨어 사실 이유는 또 무어란 말인가?”

해운은 태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아 괜히 팔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머니는 공교롭게도 전하의 성교육을 담당했던 정모뿐만 아니라, 태자비와 황제를 모시는 후궁들까지 총동원을 하여 태자 전하와 합방을 시키려 했다네. 헌데 모두 실패로 돌아갔지. 그 괴악망측한 얼굴을 보고 기겁을 하여 어마뜨거라 줄행랑을 쳤다던가?”

“…….”

“신명은 아름다운 육체에만 깃들기 마련인데, 곧 황위에 오를 태자께서 그리 너주레한 모습이라니… 가문의 우려가 많아. 대체 아름다운 우리 어머니의 배에서 어찌 그런 흉한이 났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하하. 하하하.

홍의는 실성한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헛웃음 소리를 내었다.

‘허면 뭐란 말인가. 당최 황후는 무슨 심보로 그런 골칫덩이를 나에게 홀라당 떠넘겼단 말인가.’

빠져나갈 구멍조차 없이 매섭게 죄어치던 그 날카로운 눈빛을 떠올리자 이내 뼛골이 사늘해졌다.

“헌데, 자네가 태자 전하는 왜 궁금해하는 건데?”

해운은 가늘게 뜬 눈으로 홍의를 흘겨보았다. 이미 제 입으로 어살버살 다 까발려 놓고는 이제 와 그것을 추궁하고픈 모양이었다. 홍의는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리고 담에 기댔던 등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뚫어져라 해운의 얼굴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왜 이래?”

홍의가 말없이 바싹 다가와 붙자 해운은 당황하여 눈을 깜빡거렸다. 홍의는 집게 손으로 해운의 입술을 꼭 잡아 앞으로 쭉 늘렸다.

“음 음음 음음음! (이 무슨 짓인가!)”

“앞으로 한 번만 더 주둥이를 재게 놀렸다간, 네놈의 세 치 혀를 쪽 뽑아 돌돌돌 말아 버릴 것이다. 또한, 네놈이 나이 스물셋에 발기 부전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장안의 만담꾼에게 죄 풀어 버릴 것이다.”

높낮이 없이 일갈하는 홍의에게서는 그야말로 살의가 흐르고 있었다. 이 입찬 제비 놈 때문에 앞으로 당할 고초를 생각하면, 충분히 죽이고 싶었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해운은 퍽 유순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열심히 주억였다. 고환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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