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홍의에게 말했다. 부디 세상에 난 모든 것을 사랑하라고.
‘말도, 개도, 사람도, 하다못해 이우는 꽃조차도 모두가 천신의 소중한 피조물이란다. 그렇게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죽어서도 대지의 기억으로 남지. 그러니 이 어미는 마땅히 우리 홍의의 가장 따스한 추억이 될 게야.’
홍의는 문득 검지를 들어 올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것을 제 코 밑에 들여다 대고 스스로의 숨결을 간질간질 느껴 보았다. 그때는 너무 어려 천지 분간을 못 하고 어머니의 말뜻도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금씩 나이가 들고 많은 것을 겪은 작금에는 그 뜻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문제는 알 것 같기만 하다는 거였다.
‘어머니, 저는 역시 글렀나 봅니다.’
어머니는 살아 계실 적에, 천둥벌거숭이처럼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니며 이 집 거름통에 빠졌다가 저 집 푸성귀 밭을 헤집었다가 옆 마을의 심술패기 공자를 우물에 빠뜨렸다가, 하루 온종일 일각도 안 빠트리고 오늘이 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사정없이 놀아 젖히는 홍의를 심히 염려하셨다고 했다. 또 지금이야 나이 먹고 어지간히 두루뭉술해졌다지만, 어릴 적엔 성질이 불같아서 마을 악동들을 전부 휘어잡고 다니며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는 놈이 있으면 산마루 꼭대기까지 쫓아 올라가 흠씬 뚜드려 패 주어야만 직성이 풀리곤 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천성적으로 의롭고 정의감이 넘치는 편이라 마을의 남아들이 일월성신 섬기듯 홍의를 따르고 좋아했다는 점일까.
아아. 그때가 그립다. 궐은 너무도 차가운 곳이다.
홍의는 슬픈 눈으로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실로 그는 오전 내내 마에 사로잡힌 것처럼 우울하기만 했다. 태자. 고자. 탈궁 실패. 이번 생은 망했다…. 대체 그 여인의 아들들은 왜 다들 그 모양이란 말인가? 한 놈은 발기 부전이고 한 놈은 지루라니, 이쯤 되면 가문의 내력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 하였던가.’
돈이야 늘 급하고 귀했다. 어머니는 오랜 세월을 앓았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병구완에 들어간 약값은 상상을 초월했다. 칠별관 말직인 아버지 문성의 녹봉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금액이었다. 결국 소금엣밥은커녕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할 판국이 되자 문성은 이자가 쉬이 몸을 불리는 돈에까지 손을 뻗었다. 어머니의 절명으로 약값은 굳었지만 삽시간에 늘어난 이자를 갚느라 가세가 허덕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새옹의 말대로 이것은 인생에 다시없을 절호의 기회일지 모른다.
‘…기회를 가장한 불행일 수도 있고 말이지.’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두 개의 의견이 대립을 이루었다. 홍의는 멀미가 다 나려고 했다.
꼽추처럼 등을 한껏 곱송그리고 양팔을 죽 늘어뜨린 자세로 터덜터덜 내정을 가로지르던 홍의가 문득 멈칫하였다. 그의 반들반들한 이마로 순간 인위적인 그림자가 진 것이다. 홍의는 발 앞에 금빛 넝쿨이 수놓인 자색 치맛자락을 보았다. 눈만 힐끔 들어 상대의 얼굴을 살폈다가, 이내 식겁하여 허리를 펴고 예를 갖추었다.
“황후 마마.”
난데없는 황후의 등장에 내정 곳곳에서 창 대련을 하거나 무예의 기술을 단련하고 있던 무동들조차 깜짝 놀라, 허둥지둥하던 것을 멈추고 무릎을 꿇었다. 황후는 물기를 머금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 눈동자로 흡족하게 내정을 살펴보았다.
“무동들은 괘념치 말고 하던 수련을 계속하라. 내 친아들처럼 아끼는 홍의와 긴히 담소나 나눌까 하여 왔느니.”
황후의 낭랑하고 또렷한 음성이 내정 곳곳에 퍼져나갔다. 무동들은 일제히 고개 숙인 상태에서 머리를 갸웃거리며 쑥덕이기 시작했다.
‘황후께서 홍의 님을 친아들처럼 여긴다니 금시초문인데?’
‘홍의 님이 평시에 고환으로 걸어 다닐 만큼 정력계의 알짜라더니 기어이 일을 치고 말았군.’
‘왕불알 홍의 님의 대승이로군.’
홍의는 흡사 처박듯이 고개를 내린 채 누구도 보지 못하는 공간에서 조용히 온 얼굴을 구겼다. 탈주가 시급했다.
***
불경스럽게도 황후의 안전에서 눈초리가 저절로 뱁새처럼 되려 했다. 홍의는 백주부터 일부러 다향원까지 쳐들어와 무동들 다 보는 앞에서 친목을 과시한 황후의 심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옴치고 뛸 구석도 없이 전후좌우 전부 다 막혀 버렸다. 실로 약삭빠른 여인이 아닌가.
“태자가 본디 낯가림이 심하다는 건 너도 아는 바일 테지.”
궐의 시녀들이 매실 가루와 꿀을 섞어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는 따뜻한 차를 타 가지고 왔다. 홍의의 뱁새눈을 짐짓 못 본 체하며 황후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먼 산을 보았다.
“태자에게 색신을 언급하였더니 질색을 하며 거부하더구나. 어휴, 그 아이 성정이 워낙 특이하고 까칠해야 말이지.”
심각한 정신 병증을 고작 특이한 낯가림 따위로 치부하는 황후의 뻔뻔스러움에 경악을 하고 있는데, 뒷말이 풀어지고 홍의의 시커멨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허면 소인은 이제 그만….”
“허나 황제께서 날로 쇠하시고 관민이 모두 태자의 됨됨이를 우려하니, 태자는 하루라도 빨리 후사를 생산하여 선대를 계승하고 황실의 기틀을 보호해야만 한단다.”
“그리되면 소인과는 전혀 상관이….”
“해서 사주팔자를 잘 조합하여, 우리 가문의 어여쁜 영애를 데려다가 새로이 태자의 후궁으로 들일 참인데.”
“허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도….”
“태자가 부실하여 끝끝내 합을 이루지 못하고 모두 허사가 될까 심히 저어가 되는구나.”
“마마 그냥 결론부터 말씀하시는 게….”
“그러니 거사가 있는 날, 홍의 네가 양 전의 교합하는 모양이나 그 방식, 절차를 골골샅샅이 살펴보고 우리 태자에게 어떠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또 그 문제에 적절한 대처 방안은 무언지, 자세히 연구하여 보고토록 하라.”
거기까지 들은 홍의의 관자놀이에 호두 주름같이 깊고 심오한 자국이 빠직 패였다. 기어이 홍의를 써먹고야 말겠다는 황후의 의지가 너무도 확연한 것이다.
“허나 정모들도 알아내지 못한 것을 미욱한 소인이 어찌….”
억지로 웃어 보이며 조심스레 거절의 뜻을 전해 보지만 황후는 싱글싱글 웃어 보일 따름이다.
“내 너를 믿느니라.”
믿음이 저렇게 우격다짐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래도 직접 몸으로 가르치는 것보다는 이게 나으려나 싶어 홍의는 별수 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합방은 잡귀가 끓지 않는 윤달로 삼았으니, 명명일 삼경이 그 길일이라 하는구나.”
니예니예. 내일이건 모레건 글피건 그것이 무어 중하겠습니까요. 삐딱해진 속내평을 억지로 단속하면서 그제야 찻잔에 손을 뻗어 연녹색 매실차를 입 안에 머금었다.
“태자의 옥경을 잘 봐 두어라.”
풉. 하마터면 입에 머금었던 차를 댓줄기처럼 쭉 뿜어낼 뻔했다.
“같은 사내의 몸이니 정모들보다는 더 잘 알 것 아니냐.”
“하하…. 망극하오나, 황후 마마, 소인은 다른 사내의 양물은 한 번도 관찰한 바 없어 자신이 없사옵니다.”
“자신감을 가져라. 다른 사내의 것이라 여길 필요 없이 그저 네 물건 들여다보듯 하면 되느니라.”
이대로 가다간 차가 얹힐 것 같아 그냥 찻잔을 탁상 위에 놓아 버렸다.
“태자는 너의 존재를 모르니 침상 근처에서 잘 관찰할 수 있게 맞춤한 공간을 따로 만들어 두었다. 거기 숨어 들어가 살피면 되느니라.”
“예? 태자께서 모르신다고요?”
짜증이 극에 달하자 홍의는 저도 모르게 본성을 드러내고 말을 까질렀다.
“아니, 들켰다가 치도곤을 당하려고요? 그리되면 소인의 목숨은 대체 누가 부지해 준단 말입니까?”
대충 침상에 휘장을 치고 그 너머에 앉아서 콧구멍이나 파며 구경하려던 작전이 무참히 깨어졌다. 숨어서 살피라니? 더구나 교합을 마쳤어도 양 전이 방을 비우기 전까지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은신해야 할 텐데, 상상만으로도 기가 빨려서 홍의의 탱탱하던 양 볼이 흡사 걸귀처럼 안쪽으로 훅 패여 들었다.
“심려 말아라. 이번 일만 잘 성사된다면 내 너를 양자로 삼아 너희 가문이 안온하도록 대대손손 잘 돌봐 줄 터이니.”
홍의는 흠칫했다. 나라의 실세인 황후의 치마폭 아래 들어가는 것은 기실 곤궁한 처지인 홍의뿐만 아니라 모든 향선들이 꿈꾸는 바였다. 하지만 아무리 권력이 좋고 돈이 좋대도 가뜩이나 말 많은 황태자의 지밀에 끼어들었다가 목숨을 위협받고 싶지는 않았다. 이쯤에서 얼크러진 상황을 끊어야만 했다. 홍의는 남은 객기를 긁어모아 황후와 진중히 눈을 맞췄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황후 마마. 마마의 명은 일개 향선으로서 분에 넘치는 광영이오나 아무래도 소인이 받잡기에 너무 크고 높은 사명인 듯하여….”
황후는 그런 홍의의 말을 싹둑 잘라 허공에 집어 던졌다.
“모레 이경에 태자궁의 사자들을 다향원으로 보낼 것이다. 잘 채비하고 있다가 은밀히 따르도록 하라.”
“…….”
“마지막으로 하나 더 당부해 둘 것이 있다.”
“아 예, 황후 마마. 예. 예. 얼마든지 말씀하시지요.”
배알이 꼴린 홍의는 황후가 보지 못하는 탁상 밑에서 발끝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행여 네가 태자의 면사를 들추려고 했다가는….”
나지막이 전언하는 황후의 검은 눈동자에 순간 날카로운 살기가 스쳤다.
“내 너의 눈을 뽑고, 혀를 자르고, 귀를 먹게 하고… 감히 황족을 모독한 죄 많은 시체를 군부 앞에 효수할 것이다.”
“…….”
“명심, 또 명심하여라.”
그리고는 식전부터 바쁘다면서 총총총 치마폭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정자를 내려가시었다. 그녀를 따르는 긴 대열의 맨 끄트머리를 쫓던 시녀 한 명이 문득 홍의를 힐끔 돌아보고는 안쓰럽게 혀를 찼다. 홀로 남은 홍의가 정자 바닥에 몸져누운 채 힘없이 눈을 까뒤집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