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홍의는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로 정면을 응시했다. 코앞에 태자의 나란히 선 두 다리가 보였다. 위소는 난데없이 등장한 협탁 속에 든 사내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며 허둥지둥 내실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거기 누구 있느냐! 여기 괴한이 들었다! 게 아무도 없느냐!”
내실 너머의 긴 복도에서 위소의 카랑카랑한 고함이 연신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자객?”
태자의 얼굴 맡에서 말소리 비슷한 속삭임이 흘러나온 것도 그때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상황이 믿기 힘들고 괴이하고 복잡하고 두렵기만 하여서 나는 누구인지 여긴 어디인지를 속으로 셈하느라 바빴던 홍의는, 그 낮은 음성을 듣고 정신이 번쩍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대체 어찌 알고 이 문을 열어젖혔는지는 거두절미하고 일단, 살아야 했다. 살아남아야 했다. 홍의는 차마 협탁 속에서 빠져나갈 엄두도 못 낸 채 그저 온몸을 옹송그린 그 자세 그대로 천천히,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리, 무릎, 가슴, 목덜미… 이윽고 검은 반투명 면사를 드리운 얼굴이 보였다. 면사 때문에 형태만 어렴풋이 보였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괴괴한 침묵은 계속되었다. 태자에게서는 고요한 숨소리만 흘러나왔다.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혀가 돌아가질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홍의의 호흡이 점차 거칠어지고 있었다.
문득 태자가 뒤를 돌아 걸었다. 홍의는 모골이 다 송연했다. 태자가 벽 한 켠에 걸려 있던 대도를 찰그랑 뽑아내었던 것이다. 홍의는 그제야 경악에 차서 양팔을 쭉 뻗어 앞으로 턱 내밀고 우물을 빠져나오는 귀신처럼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탁.
지이이익. 지이이익.
왜 저러는 것인가. 나한테 왜 저러는 것이야. 홍의는 바닥에 엎디어 거의 울먹거리고 있었다. 태자는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인 채로 칼끝으로 내실 바닥을 긁으며 느긋하게 걸어오는 꼬락서니가 분명 이 상황을 즐기는 것으로 보였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던가. 역시 태자 놈은 도깨비였다. 그중에 으뜸가는 상도깨비 자식이었다!
아직 엉덩이는 협탁 속에 집어넣은 채 상체만 간신히 빠져나온 홍의의 코앞으로, 시퍼런 칼날이 번뜩거렸다. 콰쾅! 때맞추어 벼락도 내리쳐 주셨다.
“사, 살려 주십시오!”
“…….”
홍의는 그제야 허겁지겁 소리쳤다.
“소인은 자객이 아닙니다! 황후의 명을 받자와 대내에 든 것일 뿐입니다! 이 협탁도 황후께서 빌어다가 여기 기어들어 가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해서, 눈깔을 콱 뽑아 버리겠다고 하셔서 연약하고 청순한 소인은 그저 따를밖에 다른 도리가….”
정신없이 왜자기며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간신히 협탁을 빠져나왔을 무렵, 태자의 발이 등허리로 턱 올라왔다. 홍의가 울먹이며 돌아보았다. 태자는 칼날을 어깨에 걸친 채 고개를 기울였다.
“향선인가.”
“예, 예! 향선입니다! 자객이 아니라 이 나라의 향선입니다! 황후 마마의 명으로 이곳에 든, 향선 홍의입니다!”
“…입이 가볍군. 죽어라.”
태자는 그럴 거면 왜 물어보았는지, 아무튼 다시 칼을 들어 올렸다. 그 서릿발이 화안하였다. 이대로라면 이판사판, 너 죽고 나 살자 판이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불수의근의 작용처럼 불쑥 용솟음쳤다.
이를 악문 홍의는 젖 먹던 힘을 다하여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발밑에 놓였던 상대가 돌연 개구리 자세로 폴짝 허공을 박차고 오르자, 몸의 중심이 흔들린 태자가 잠시 포를 밟고 비틀거렸다. 그 모습에 홍의의 눈이 크게 뜨였다.
‘…헉! 국본이 넘어간다!’
제 코가 석 자인 줄도 모르는 홍의는 무의식중에 황태자를 부축하려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오히려 홍의의 손길에 놀란 태자가 함께 뒷걸음을 치다, 결국은 둘이 동시에 뒤로 넘어갔다.
쩔그럭 땡강, 칼날이 매섭게 바닥을 굴렀다.
“으윽….”
“아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홍의가 얼얼한 무르팍에 신음하고, 아래 깔린 태자 또한 쇳소리를 내며 아릿아릿 아린 뒤통수를 잡았을 때, 내내 쓰고 있던 금관이 태자의 머리통에서 떨어져 나와 떼구루루 내실 바닥을 굴렀다.
“…….”
“…….”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일렁였다. 특히나 홍의의 동공이 팽창하여 터질 듯 크게 뜨였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태자. 태자는 흉한이라 하였다. 대머리에 사팔뜨기에 이가 숭숭 빠진 흉측한 몰골이라 하였다. 허나 지금 눈앞에 있는 태자는 그야말로 절세의 가랑. 매일 좋은 것을 먹고 바르는 피부는 백옥처럼 희면서 귀태가 뜨르르하였다. 검고 촘촘한 눈썹은 그린 듯했으며, 콧대는 손수 세운 듯이 오뚝하였고, 홍보석처럼 붉고 윤기 나는 입술은 향긋하게 보였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더없이 특별하게도, 눈동자가 물색을 머금고 있었다.
태자의 눈동자가 물빛이었다. 겉면은 너르게 펼쳐져 그 속에서 여울여울 휘도는 가람빛. 또는 볕이 좋은 날 문득 고개를 들어 잠깐 올려다본 하늘의 연하고 푸른빛…. 하늘과 바다를 그대로 옮겨다 가둬 담은 듯한 벽안이 느리게 깜빡깜빡 여닫혔다. 홍의는 너무 눈에 설어 잘못 본 것인가 하였다. 이런 색의 눈을 한 이는 대명천지 본 적도 없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넋을 놓고 무아지경으로 상대의 두 눈을 바라보는데,
콰광,
다시 우렛소리가 내실을 울리고 시야를 쨍하게 하였다.
태자의 입매가 비틀렸다.
“…봤구나.”
서늘한 얼굴 위로 암울한 음영이 콰광, 번뜩이듯 훑고 지났다.
***
“들었는가? 간밤에 태자궁에 자객이 들었다는구먼.”
“그 자객 객기 한번 오지네그려. 멋모르고 태자궁에 들었다가 몸 성히 돌아온 자가 몇이나 되는가?”
“나는 칼 찬 자객보다 태자가 더 무섭네.”
“나도 검둥개보다 태자가 더 무섭네.”
“해서, 그 자객은 잡혔다던가?”
이튿날 다향원의 연무장에서는 간밤에 태자궁에서 일어났다는 자객 소동이 요긴한 화젯거리로 쓰였다. 언제 그렇게 비바람을 쏟아부었냐는 듯 눈이 부시도록 맑은 날이었다.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렀고 싸늘한 공기 중엔 상쾌한 흙내가 떠돌았다. 삼삼오오 무리 지어 이야기꽃을 피우는 청춘 남녀들, 수련하는 무동들의 의기 넘치는 기합 소리, 휘파람새 우는 소리, 쌉싸름하고 청신한 바람결.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홍의는 연무장의 가장 구석진 곳에 쪼그리고 앉아 우울하게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글렀다. 망했다. 조졌다… 두서없이 그런 말들만 머릿속을 동실동실 떠다녔다.
간밤에 무슨 정신으로 그 무시무시한 태자궁을 빠져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태자는 홍의를 죽이지 않았다. 아니, 죽일 새가 없었다. 그새 위소의 비명 소리를 들은 궁인들이 허겁지겁 내실로 들이닥치는 바람에 태자는 서둘러 면사를 뒤집어쓰고 얼굴부터 가리는 데 급급했다. 협탁은 엎어져 있었고 바닥엔 칼이 굴러다녔다. 위소는 진즉에 꽁무니를 뺐고 홍의는 졸지에 자객이 되었다. 정황을 아는 궁인들과 정황을 모르는 궁인들이 필사적으로 진위 여부를 가리는 혼란의 와중, 홍의는 처음 자신을 인솔해 왔던 사자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살았으니 되었다고 안일하게 기뻐할 때가 아니었다. 홍의는 서글픈 눈으로 먼 산을 응시하였다. 태자의 얼굴을 보면, 눈알을 뽑겠다고 하였다. 태자의 얼굴을 보면 눈도 뽑고 혀도 뽑고 귀도 먹게 하여서 조물조물 살뜰하게 병신을 만들어 주겠다고 하였다. 황후께서 말이다. 근데 봤다. 홍의는 봤다. 이제 태자가 황후에게 가서 간밤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기만 하면 모든 상황 종료였다. 홍의의 모가지는 싹둑 잘려 군부의 홍살문 앞 꼬챙이에 꿰일 것이고, 새옹은 주군이 잘못했네, 하고 땅을 치며 울 것이었다. 또 아내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졸지에 장남까지 잃은 아버지는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울 것이며, 열다섯 살 난 여동생 소의는 오빠 닮은 목각 인형 깎아다가 홍의의 무덤 앞에 올려 줄 것이며…. 생각하면 눈물만 났다. 홍의는 먼 산을 보던 시선을 거두고 쓰리게 눈을 감았다. 인생무상. 산은 산이고 강은 강이로다.
‘…아니 근데, 당최 내가 무얼 그리 잘못했다고?’
괴상망측한 도깨비 얼굴을 흙바닥에 쓱쓱 그려 넣던 홍의는 문득 나뭇가지를 뚝 분질러 버렸다.
‘죽이려고 달려들기에 살자고 덤벼든 것이 잘못인가?’
‘보이니까 본 걸 가지고 뭐 눈깔을 뽑아서 효수한다고? 애당초 싫다는 나를 그 관 같은 곳에다가 집어넣고 지켜보라던 것은 또 누구고?’
‘아니 저희 아들들 물건에 하자 난 것을 왜 애먼 나한테 생짜를 놓고 난리야?’
‘고로 나는 죄가 없다! 이 이기적인 모자들아!’
어차피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상황 봐서, 새옹과 무동들과 가솔들을 데리고 청유를 나가는 척하다가 황후 손 안 닿는 곳으로 내빼야겠다. 그렇게 결론 지은 홍의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팩 집어 던지고 위풍당당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의 님.”
“흐어랏차!!”
난데없이 울리는 음성에 홍의는 온 사지를 꼬아 가며 놀랐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돌아보니 어젯밤 홍의를 내실로 안내하던 태자궁의 시비가 서 있었다. 낮에 보니 분위기가 한층 더 음산한 것이 어깨 너머에서 검은색 아지랑이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왜! 나 수련할 건데! 나 지금 엄청 바쁜데!”
“황후 마마께서 속히 홍의 님을 찾으십니다.”
“뭬이야!!”
빌어먹을. 벌써 위기다. 그 여자는 잠도 없는지 새벽 댓바람부터 칼을 갈고 난리였다. 홍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비는 우중충한 표정으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간밤에 모의가 들통나 큰 고초를 겪었음을 알고 위로하고자 하심이지, 다른 뜻은 없다 하셨습니다.”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이미 황후와 엮일 때마다 사달의 크기가 훅훅 팽창하는 꼴을 뜬 눈으로 겪어온 홍의로서는 픽픽 콧방귀만 나올 따름이었다. 홍의는 눈초리를 가늘게 하고 시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혼자 온 것이냐고 묻자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낌새가 기이하긴 하였다. 예고한 바대로 홍의를 죽일 작정이었다면 연약한 여비가 아닌 칼 찬 위병들을 보내 반항 한번 못 하도록 포박하여 끌고 갔을 터인데.
“따르시지요.”
시비는 예의 무표정하게 읊조리고는 휙 돌아서 앞서 걸었다. 간밤에 어두운 곳에서 봤다가 밝은 곳에서 다시 보니 홍색 갖신을 신은 발이 확연히 눈에 들어와 그나마 무서운 것이 덜했다. 홍의는 한 차례의 심호흡 후에 양 주먹을 꽉 쥐고 시비의 뒤를 따랐다. 죽기 아니면 살기, 그도 안 되면 까무러치기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