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8화 (8/111)

#08

“황후 마마, 향선 홍의 존전에 다령하였사옵니다.”

“들라 하라.”

시비가 인도한 곳은 대궁의 편전이었다. 금성 곳곳에 외따로이 놓인 전각들과 확연히 다른 위압감에 홍의의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사방에 시립한 위병들은 커다란 창을 바닥에 짚고서 제 앞을 지나치는 홍의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시선이 닿은 곳마다 살갗이 절로 옴찔옴찔했다. 하지만 티 내지 않고 비장한 표정으로 열린 문 앞에 섰다. 휘황찬란한 양식과 더불어 너르게 펼쳐진 편전의 까마아득한 상석에 황후가 앉아 있었다. 그 옆에 면사를 쓴 태자도 보였다. 홍의는 순간 현기증이 일어 가련한 모양새로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우리 홍의가 왔구나.”

황후는 제 아들의 어깨를 쓰다듬다가 홍의를 발견하고서 다정히 반색을 하였다. 홍의의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가까스로 공손히 읍을 올리고 한동안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황후 마마를 뵙습니다. 그간 평안하셨사옵니까.”

“평안하다마다. 헌데 너는 간밤에 고초가 많았다 들었다.”

“…….”

“해서 다과상이라도 내어 너를 맞을까 하였으나 내 감환에 드신 폐하를 대신해 세목을 돌보느라 여의치가 않았구나.”

“황송할 따름입니다.”

“간밤의 소동은 태자에게 모두 들었느니라.”

‘해서 저의 눈깔을 이런 모양으로 파 줄까, 저런 모양으로 파 줄까, 원하는 대로 파 주겠노라 부르신 건가요….’

홍의는 씁쓸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호호호, 재기 넘치는 태자에게 우리의 작당이 들통나고 말았다니, 참으로 객쩍고 우스운 일이로구나. 그렇지 않으냐?”

“…예, 예?”

“이미 그르친 일을 재삼재사 이야기해 봐야 하등 쓸데없을 것이고, 태자가 다행히 이 어미의 지청구를 받아들여 홍의 너의 가르침을 받겠노라 하는구나.”

“…….”

홍의는 불경스럽게도 두 눈 동그랗게 뜨고 감히 태자의 얼굴을 쏘아보고 말았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낌새를 보아하니 간밤에 자신이 태자의 얼굴을 보았다는 사실을 황후는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황후께 일러바치지 않은 것인가?’

얼굴이 보여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이라도 할 터인데, 여전히 그 칙칙한 검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탓에 태자의 의중을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 홍의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게다가 비밀이 까발려진 상대에게 굳이 교육을 받으려는 저의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암만 생각해도 미심쩍은 일이었다.

“앞으로 너는 태자의 색신이 되어 최선을 다해 주군의 양기를 보하도록 하라. 일만 잘 성사된다면 내 친히 땅과 집을 내리고 보옥을 내릴 것이니.”

만족스러운 웃음을 띤 황후의 옆에는, 잠이라도 들었나 싶을 만큼 미동도 없고 말도 없는 태자가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홍의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괴상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간신히 대꾸하였다.

“향선 홍의, 성심을 다해 명을 받들겠습니다.”

편전을 나서서 넓고 화려한 안뜰에 선 홍의는 잠시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다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보았다. 이토록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불행이라니,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지껄이던 새옹이 놈의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처음 해운과 얽힌 그날부터, 홍의의 삶은 파란만장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아부지 보고 싶다. 소의야 게 잘 있느냐. 홍의는 중얼중얼 헛소리를 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대궁을 빠져나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모든 일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대충 태자와 후궁이 합방하는 것을 뒤에서 살펴보고 황후에게 어찌 입만 잘 털면 되겠거니 싶었는데 완전히 독박을 썼다. 태자의 스승이라니. 게다가 성교육 스승이라니. 사실 홍의는 새옹이 지적한 바대로 방사를 글로 배워서 지식만 많을 뿐 실전에 있어서는 어리보기 샌님이었다. 게다가 홍의가 공부한 책들은 대부분 여인의 신체를 다루는 법만 자세히 풀어 놓았을 뿐, 사내에 관해서는 구구절절 적혀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사내의 신체에는 그다지 관심이 가질 않아 홍의가 속속들이 공부하지 않은 것이지만.

‘하아. 다 필요 없고, 해운에게 먹였던 정력제를 태자에게도 먹이지 뭐.’

뭐 하러 시간 낭비하며 헛심을 쓴단 말인가? 홍의는 소매에서 한지로 싼 정력제를 꺼내 들고 허공에 던졌다가 받았다가 하였다. 사실 요즘 몸이 허한 듯해 심심풀이 삼아 만들어 본 것이었는데 이리 요긴하게 쓰일 줄은 미처 몰랐다. 어쨌든 이걸 먹고 나면 기력이 솟다 못해 없던 고추까지 솟아날 정도라고 하니 분명히 태자에게도 효험이 있을 터였다.

‘…….’

홍의는 궁장을 따라 걷던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간밤에 마주친 태자의 얼굴이 잊히질 않는다.

‘아름다웠어.’

다시 걸으며 홍의는 고개를 주억였다. 어딘지 순결함마저 감도는 미모였다. 도경의 곱상한 사내만 죄다 모아 두었다는 다향원에도 그마마한 미남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 희한한 눈동자의 색 덕에 흡사 이 세상 것이 아닌,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하강해 온 천인이라 하여도 믿을 정도였다. 본 적 없는 미색이었다. 홍의는 지금껏 누구의 외모에도 이토록 감탄한 적이 없기에 더욱 열없었다.

‘헌데, 대체 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걸까.’

홍의는 계속 궁장을 따라 걸었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그 눈동자의 색 때문에?’

걸으면서 고개를 갸웃하였다.

‘그것이 과연 궐내에 떠도는 태자가 도깨비니, 흉한이니 하는 괴담보다 더한 흉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어찌하여 황후는 내게 그런 살벌한 협박을 자행하면서까지 태자의 얼굴을 숨기지 못해 안달인 것인가?’

어쩌면 그런 해괴망측한 소문들도 모두 황실이 조정한 여론 세태가 아닐까. 정녕 태자의 미래가 걱정이라면 후사를 이을 게 아니라 그 답답한 면사부터 벗어젖혀야 했다. 본디 벽해는 아름다움을 숭상하는 나라, 이 땅에서 나고 자라 향선의 정신에 입각한 홍의는 결국 아름다움이 세상을 화평하게 한다는 다향원의 이념과 기치를 굳게 믿고 있었다. 만사화통이 바로 코앞에 있거늘, 그깟 눈동자 색이 무어라고, 황족이라는 자들이 앞서서 미련퉁이처럼 구니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다.

홍의는 조금 전 대면한 태자를 떠올렸다. 딱딱한 목석처럼 황후 옆에 앉아 있던 그를. 앞이 잘 뵈지도 않을 검은 면사 안에서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지 돌연 궁금했다.

바스락. 바스락.

툭. 투둑.

“응?”

골몰에 잠겨 발밤발밤 걷기만 하던 홍의가 막 다향원의 뒷길로 진입하려는데, 문득 귀에 설은 소음이 울렸다. 바람결에 나뭇잎 스치는 평범한 소리가 아니라 무언가 인위적인 느낌의 소음이었다. 그것은 비단 옷깃이 맞부딪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발아래 깔린 나뭇가지가 툭툭 부러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홍의가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별안간 뒤쪽에서 단단한 두 팔이 나타나 홍의의 상체를 숨이 막히도록 꽉 죄었다. 양팔까지 한꺼번에 잡힌 홍의는 부지불식간에 소스라치게 놀라 휙 고개를 뒤로 돌렸다. 자신을 제압해 온 누군가의 얼굴 맡에서 낯설지 않은 검은 면사가 바람결에 은은히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근처의 찔레꽃 향기가 아찔하였다.

“…잡았다.”

상대는 속삭이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귓전에 솜털이 바싹 일어나려는 찰나, 문득 기별 없는 왜바람이 불어와 면사를 사뿐 들추었다. 뒤에서 비스듬히 시선을 보내오는 물빛의 눈동자가 내리쬐는 햇발을 받아 무심중간 반짝이고 있었다.

“…….”

“…….”

홍의는 잠시 그 유리알처럼 맑은 벽안에 홀려 얼굴 전체의 표정은 살피지 못하였다가,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바람의 장난질에 면사가 들추어지고 밝은 곳에 낯이 드러나자 태자의 아랫입술이 굳게 깨물리는 것을. 눈매 또한 서늘하게 얇아지는 것을.

퍼억.

태자가 난데없이 홍의의 등을 홱 떠밀었다. 부지불식간의 힘에 밀려 균형을 잡지 못한 홍의는 양팔을 닭 날개 치듯 푸다닥거리다가 앞으로 확 고꾸라졌다. 홍의의 엉덩이가 하늘을 향해 반짝 쳐들렸다. 이마는 젖은 진흙땅에 처박혔다.

“…….”

대체 이게 무슨 개풀 뜯어 먹는 경우란 말인가. 잘 가던 사람 붙들어서 땅에 메다꽂다니. 그것도 맨땅도 아니고 간밤에 비가 흠씬 내려 더러운 땅에. 진흙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소맷자락을 들어 올리며 홍의는 기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마에 붙었던 진흙이 무겁게 콧대를 그으며 흘러내렸다. 개가 물기 털듯 푸르르 몸을 한 번 떨어낸 홍의는 눈살을 왁살스레 찌푸리고 태자를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이제 와 간밤의 앙갚음을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본래 성정이 개차반이라 심심하면 지나가는 사람을 밀어 자빠뜨리는 게 취미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태자는 검은 면사 휘날리며 우두커니 서서 홍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본인이 지엄한 태자의 위라 한들 나라의 녹을 먹는 향선에게 저리 개차반처럼 굴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간밤의 결례는 송구하옵니다.”

“…….”

“하오나 말씀으로 꾸짖어도 될 일에 어찌 옥체를 쓰시어 황족의 체신을….”

말하던 와중,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태자의 뒤에서 별안간 처녀 귀신 하나가 훅 튀어나와 놀란 몸이 펄쩍 비틀렸다. 자세히 보니 그 시비였다. 언제나 불쑥불쑥 튀어나와 홍의의 간담을 꽁꽁 얼려 버리는 그 홍두깨 같은 여인 말이다. 시비는 무표정한 얼굴로 명주실로 엮은 깨끗한 천을 꺼내 들더니 가타부타 설명 없이 홍의에게 다가와 재바른 솜씨로 지저분한 흙 얼룩을 닦아 주고 나섰다. 아연실색하여 넋 놓고 있는 홍의를 일으키고 붉은 정복 자락에 묻은 진흙도 전부 깨끗이 처리하고는 다시 종종종 뒷걸음질 쳐 태자의 한 발 뒤에 선다.

“난데없는 바람이 불어 면사가 젖혀졌으니 전하께서 적이 당황하시어 실례를 범하셨습니다.”

“…….”

“앞으로 방중 비사를 배움받을 스승님이신데 허투루 장난질을 걸 의도는 없었다 하십니다. 저희 전하께서는 본디 당황하시면 말보다 몸이 먼저 앞서시는 분으로….”

“잠깐. 잠깐.”

높낮이 없이 빠르고 무감하게 중얼중얼 염불을 외던 시비는, 홍의가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홍의는 진흙 묻은 정복 자락을 대차게 풀썩이며 태자 쪽을 보았다. 예의 답답한 면사에 가려져 있어 태자의 표정을 살필 수는 없었다. 홍의는 괴란쩍은 표정으로 태자를 응시하다가 이내 시비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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