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11화 (11/111)

#11

“어디 불편한가?”

“아, 아닙니다, 전하. 이제 잔사설을 마치고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가겠습니다.”

“흠, 그래.”

태자는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좋다는 양 코로 낮게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 웃음이 살짝 거슬려서 홍의는 멈칫했다가, 이내 고개를 털며 서책들을 펼쳐 놓았다.

“무릇 양기가 부실하여 파정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은, 다름이 아니라 아직 극화된 성감을 찾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뚝. 땀이 종이 위에 떨어졌다. 아직 봄 날씨라 서증이 오려면 한참 멀었는데 왜 이렇게 더운가 싶다. 머릿속도 붕붕 뜨는 것처럼 몽롱하다. 몸살이라도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태자가 담담하게 물었다.

“극화된 성감? 그게 뭐지?”

“아, 전형적인 남성의 성감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의학서에 저술된 바로는 그것이 남성에게 있어….”

“아, 좆을 말하는 건가.”

“예, 좆을 말하는 거좆….”

“…….”

…응? 홍의는 방금 자신의 귀로 들은 단어가 귀에 설어서 황망한 표정으로 태자를 바라보고 말았다. 그에 비해 태자의 표정은 더없이 여상하기만 했다. 당황하여 눈을 깜빡거리던 홍의는 혹여 자기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되물었다.

“바, 방금 전하의 구중으로 좆이라고 하신 겁니까?”

“사내의 가장 큰 성감이라면 좆이 맞잖아. 그대는 그걸 너무 어렵게 돌려 말하는 것 같은데.”

“…….”

무얼까. 어쩐지 지금까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것 같다. 어느덧 태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돌아와 말하는 것을 툭툭 내던지듯이 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괴리감을 느낀 홍의는 천천히 눈을 깜빡거리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어렵게 돌려 말한 것이라면, 전하께선 너무 직선적으로 말하고 계신 게 아닌가 하는….”

“직선적인 건 내가 아니라 그대지.”

태자의 시선이 미묘하게 흘러내렸다. 그 푸른 눈동자 속에 알 수 없는 미소가 가득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 말이 진짜였네.”

태자는 조금 더 집중하여 보겠다는 듯 상체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정말 아무나 보고 벌떡벌떡 세우는구나.”

“…….”

말뜻을 헤아리다가 무심코 아랫도리를 내려다 본 홍의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만큼 팽창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거시기가 옷자락을 찢을 만큼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혼란한 가운데 홍의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꺾어 탁상 위의 빈 찻잔을 보았다.

…당했다, 씹불알.

“누구 말대로 명약이긴 한가 보네. 그렇게 팽팽하게 세워 올린 걸 보니.”

태자는 말 중간에 실소를 섞으면서 대놓고 홍의를 비웃고 있었다. 당했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늦은 뒤라던가. 홍의는 참을 수 없는 비절참절의 심정으로 제 아랫도리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허허롭게 고개를 젖히고 눈을 질끈 감았다.

‘낫살 처먹고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안일했다. 뒤늦게 부처님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염불을 외워 보지만 이미 성난 아들놈은 가라앉을 낌새가 없었다. 태자는 태연자약하게 상체를 일으키더니 침상 아래로 두 다리를 내리고 걸터앉듯 하였다. 호리호리 마른 몸태로 미끄러지듯 걸린 하얀 포 덕에 여전히 천상에서 하강한 미남자 같았다. 두 다리를 넓게 벌리고 양팔을 뒤로 받친 태자는 습관처럼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 짓궂게 푸른 눈을 빛냈다.

“역시 건강하단 말이야.”

천상의 미남자는 연신 빈정거리길 멈추지 않았다. 대꾸도 못 하고 이만 갈던 홍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고 나섰다. 핏발 선 홍의의 두 눈에 서책을 싸 가지고 왔던 보자기가 들어왔다. 그것을 집어 와 대충 앞섶을 가린 홍의는 주눅 들지 않고 위풍당당 맞서기 시작하였다.

“곧 보위를 이으실 태자께서 시정잡배도 안 할 천박한 장난질이라니요! 관민이 입을 모아 나라를 걱정하는 것도 십분 이해되는 대목이로군요!”

“…….”

양팔을 허리에 얹고 버럭버럭 왜자기는 모습이 자못 맵차기는 하였으나 치마처럼 고이 두른 다홍색 보자기가 그 용맹함을 반감시키고 나섰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은 가운데 눈치 없는 초파리 한 마리가 두 사람 사이를 앵앵거리며 가로질렀다.

“그 약이 그리 몸에 좋다고 호언장담했던 건 그대잖아?”

“설마하니 존귀하신 태자 전하께서 저잣거리의 왈패들도 마다할 망극한 장난을 치시리라 신이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전부터 느낀 건데 말이야. 그대는 나한테 주눅 들지도 않고 따박따박 대거리를 하네.”

“…….”

“내가 무섭지 않아?”

문득 공기가 싸늘해졌다. 홍의는 저 눈빛을 안다. 주로 사내아이들이 재밌고 특이하고, 자기보다 약하여 괴롭히기 좋은 뭔가를 발견했을 때 저토록 짓궂게 눈을 빛내곤 했다. 그 빛깔만 다를 뿐 이상야릇하기는 마찬가지여서 홍의는 잠시 등줄기가 오싹하였다. 그렇다면 면사를 들쓰고 있던 태자는 내내 자신을 저런 눈빛으로 보았던 것인가. 내내.

“생각할수록 재밌어.”

“…….”

“감히 내 눈의 비밀을 보았고, 나를 덮쳐 뒤통수에 혹이 나게 만든 데다, 출처가 불분명한 약까지 먹이려고 들어….”

바닥에 발을 딛고 한 발, 한 발, 다가오는데 홍의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태자의 걸음걸이가 조금 더 빨랐다. 마침내 코앞까지 다가온 그는 홍의보다 약 두 치쯤은 키대가 큰 탓에 얼굴을 살며시 내리고는 시선을 비스듬히 맞춰 왔다.

“이제는 그 오만무례한 세 치 혀로 내 좆을 세워 보시겠다?”

언제 그렇게 해사하게 웃었냐는 듯 서늘하게 노려보는 태자의 푸른 눈동자에 얼음이 박혀 드는 것 같았다. 삭풍을 맞는 듯 온몸이 다 아릿하였다. 차마 맞붙은 눈을 피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당황하여 얼어 있는데, 마침 태자가 한 발 물러나 주는 것처럼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깔더니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나긋이 일렀다.

“잘 봐, 우립 선생.”

“…….”

홍의는 쩌적 얼어붙었다.

“인생이라는 게. 고작 약관을 살고 무얼 얼마나 알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산다는 건 그냥. 모욕을 견디는 거더라고.”

태자는 말하는 중간마다 새빨간 책의를 들쓴 책들을 턱턱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곧이어 둥그런 탁상을 꽉 채울 만큼 책이 가득 쌓였다.

“어떻게 생각해, 우립 선생?”

마지막 화집을 툭 던지며 방점을 찍는다.

‘…저 인간이.’

홍의는 대놓고 갈리려는 이를 필사의 힘으로 눌러 참았다.

“향선이 나랏일은 등한시하고 이따위 천박한 야화첩이나 만들어 판 게 들통나면 어찌 될 것 같은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태자의 간악한 협박 때문인지, 아니면 들이부은 미약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스워.”

태자는 조롱하면서도 따로 웃거나 경멸을 내보이지 않았다. 표정은 폐허처럼 비어서 스산하고 건조한데, 붉은 입술만 혼잣말하듯 움직거렸다.

“남들 몰래 이런 야한 그림이나 그리는 주제에… 나를 시정잡배 취급하고. 고결한 척, 흠이 없는 인간인 척 입바른 소리나 하다니.”

“…….”

“낯짝이 얼마나 두꺼워야 그런 게 가능하지.”

홍의는 두 눈을 감고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답도 없는 상황이었다.

“오해이십니다. 지나친 억측은 거두어 주십시오.”

“지나친 건 그대 행실이고.”

“…소신은 한미한 가문의 장자로서 그저 먹고살기 위해 춘화를 그려 왔던 것뿐입니다.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가장 빠르고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요.”

“춘부장은 아셔? 그대가 이러고 다니는 거?”

“…….”

“그대를 따르는 무동들은?”

아버지와 무동들까지 들먹이자 홍의가 들쓰고 있던 무표정이 기어이 무너지고, 순식간에 안색이 푸르뎅뎅해졌다. 태자는 사냥에 성공한 짐승처럼 기묘하게 눈을 빛냈다.

“그들도 알까? 자신들의 주군이 사내들 자지 세우는 그림이나 그려 판다는 걸 말이야.”

“전하.”

충격에 충격이 거듭되자 머릿속이 핑 돌았다.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어 홍의는 자기도 모르게 태자의 양 팔뚝을 잡쥐며 바싹 다가들었다.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다. 위협처럼 잡았다기보다 제발 그만두라는 뜻으로 붙든 것이었다. 황족, 그것도 황태자의 신체에 접촉하는 일은 실제로 엄중한 제약이 따르지만 그조차 분별하지 못할 만큼 홍의는 당황하고 있었다.

태자는 그런 홍의의 무례한 행동이 놀랍기는 했어도 의외로 싫지는 않았는지, 한층 나긋해진 음성으로 속삭였다.

“물론 나는 안 서. 그대의 춘화는 정말 형편없거든.”

“…함구해 주십시오.”

태자의 소매를 쥔 홍의의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그래, 급선무는 엎질러진 물이 아니다. 상대의 뒤를 이토록 골골샅샅이 캐냈다는 것은 무언가 바라는 게 있기 때문일 터다. 홍의가 착잡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려니 태자는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홍의의 위아래를 한 번 훑었다. 젖은 뱀이 몸을 타는 듯 소름이 돋아 손가락이 절로 안으로 곱았다.

“그럼 도망치지 마?”

말끝을 높이며 확답을 종용하기에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는 손수 다기를 들어서 찻잔에 남은 차를 따랐다. 그리고 홍의에게 내밀었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이 작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더 마시면 죽습니다.”

홍의가 차분히 대거리하기 무섭게, 태자는 찻잔을 좀 더 들어 올려 정수리를 향해 기울였다. 홍의는 두 눈을 꾹 감고 입 모양으로 나무아미타불, 하였다. 다 식어서 뜨겁진 않았지만 매작지근한 찻물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적시고 콧대를 긋고 관자놀이를 긋고 옷깃을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몹시 불쾌했다.

“더워 보여서.”

“…….”

스물한 살의 젊은 태자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독종에 개차반이었다. 얼굴만 예쁘지 하는 짓은 독사가 따로 없었다. 참담함에 눈을 한 번 껌벅이자 속눈썹에도 맺혀 있던 찻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가뜩이나 땀으로 목물한 듯 젖어 있는 몸뚱이에 과분한 물세례였다. 차츰 홍의의 호흡이 빨라졌다.

“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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