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검고도 투명한 세계
“콧바람이 쐬고 싶다.”
안뜰에 선 태자가 높낮이 없는 어투로 면사 안쪽에서 뜬금없이 중얼거렸다. 그에 재바른 옥지는 댓바람부터 미리 주간에 들러 바라지해 두었던 고소한 소고기 주먹밥과 포혜와 약과를 바리바리 싸 가지고 일각도 안 걸려 도로 나타났다. 마침 태자의 곁을 지키고 섰던 화경이 보따리를 나눠 들었다. 화경은 태자와의 첫 대면 날 홍의를 인솔해 온 사자 중 한 명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태자를 가장 측근에서 모시는 호위 무사라고 했다.
“돌치랑 깜치도 같이.”
볕이 몹시 쨍해서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이마에 대며 막 댓돌 위에 내려서던 홍의는, 처음에는 돌치랑 깜치가 누구인지 몰라 그냥 겉귀로 흘려들었다. 이윽고 다른 궁인이 목줄을 맨 검둥개 두 마리를 질질 끌어오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조용히 돌계단을 다시 뒷걸음쳐 올라 기둥 뒤로 빛보다 빨리 몸을 숨겼다. 슬렁슬렁 주변 냄새를 맡으며 걸어오던 검둥개들이 안뜰에 사람이 모인 것을 발견하고는 폴짝폴짝 뜀박질을 해 대는 바람에 궁인이 아이쿠, 하다가 끈을 놓쳐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검둥개들은 검은 귀 펄럭거리며 잽싸게 이쪽으로 달려왔다.
애앵. 애앵. 깨이잉.
홍의는 눈과 귀를 의심하였다. 간밤에 보았던 그 살벌하고 용맹한 사냥개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태자의 발밑에 선 검둥개들은 귀를 한껏 젖히고 혀를 길게 빼어 헥헥거리다 이내 저를 좀 봐 달라고 흙바닥에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온몸을 앙당그레 비트는 것이었다. 태자가 손수 보들보들한 뱃가죽을 얼러 주자 좋아서 사족을 못 쓰며 깽알깽알 자지러진다. 어쩐지 그 모습이 더 괴기스러웠다. 검둥개들이 저를 본체만체하고 제 주인에게 애교를 떠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홍의는 얼른 댓돌을 밟고 안뜰에 내렸다. 어험.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했다.
“허면 소인은 이만 다향원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
“명일 찾아뵙겠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픈 마음에 공손히 머리를 숙인 뒤 답변도 듣지 않고 문간으로 냅다 튀려는데, 면사 쓴 태자가 쯧, 하고 혀를 한 번 찼다. 그러자 검둥개들이 발딱 몸을 일으켜 앉더니 두 마리가 동시에 홍의를 노려보면서 그르렁대는 것이 아닌가.
‘아나, 너네만 이빨 있냐? 이 돌탱이 깜탱이 자식들아.’
흠칫한 것도 잠시였다. 안 그래도 신경이 과민해져 울컥 불뚝성이 오른 홍의는 이에 질세라 잇몸까지 까 드러내고 똑같이 그르렁대기 시작했다. 인간이 개 흉내를 구사하여 위협해 오는 것은 난생처음 당하는지라 당황한 검둥개들이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그대는 어딜 가는데?”
태자가 시큰둥한 음성으로 물었다. 홍의는 얼른 이를 도로 집어넣고 태자를 향하여 얌전히 조곤조곤 아뢰었다.
“오늘은 벽선각(碧仙閣)에서 원주 미함 공과 향선들의 조회가 있는 날입니다.”
“흐음…. 안 가면 어찌 돼?”
“미함 공께 맞아 죽습니다.”
사실 태자도 근래 들어 와병 중인 황제를 대신하여 정사가 다망한 줄로 아는데, 댓바람부터 청유를 나가다니 살짝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홍의가 잠자코 생각에 잠긴 동안, 마침 말구종이 탄탄하고 커다란 행마를 끌어와 안뜰에 부렸다. 태자가 종의 도움도 없이 높은 말 등에 훌쩍 가볍게 오르는 것을 본 홍의의 얼굴이 괴팍하게 일그러졌다.
“전하께오서 말을 다 타십니까?”
“삼척동자도 타는 걸 내가 왜 못 타?”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빌어먹을 모자 공갈단 같으니라고. 어쩐지 황후의 가랑가랑한 웃음소리가 귓전을 스치는 듯했다. 심기가 상할 대로 상한 홍의가 팩 돌아서서 대문을 빠져나가려는데, 고삐를 쥐고 말의 목을 어루만지던 태자가 툭 시비를 걸어 왔다.
“그대는 말을 탈 줄 모르는 건가?”
문간을 넘으려고 한쪽 다리를 올렸던 홍의는 그 자세 그대로 멈춰서 휙 돌아보았다.
“아뢰옵기 망극하오나 전하, 방금 소인에게 하문하셨습니까? 말을 못 타느냐고?”
“소문을 듣자 하니 그대의 고환이 태평양 고래 고환이라던데.”
“…….”
“고환이 너무 커서 가랑이가 배겨 못 타는 건가?”
홍의가 귀를 의심하며 입을 쩍 벌리고 있는데, 옥지와 화경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태자는 화경에게 눈짓을 했다. 그에 화경이 들고 있던 봇짐을 내려놓고서 여전히 목석처럼 굳어 있던 홍의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홍의가 상황 판단도 하기 전에 힘 좋은 화경이 홍의를 번쩍 안아 올려 어깨에 둘러메었고, 홍의도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 화경의 머리채를 잡고 왁살스레 흔들면서 갖은 발악을 하였다.
“곱게 태워 드려라. 불알 안 다치게.”
태자는 심드렁히 주문했다. 화경은 응당 상전의 명을 받자와 발광하는 홍의를 곱디곱게 태자의 앞자리에 사뿐 던져 드렸다. 털썩. 미끈한 소가죽 안장에 두 다리를 조신하게 모은 채 옆으로 앉은 홍의가 스스로의 볼썽사나운 꼬락서니에 경악할 새도 없이, 태자가 등자에 건 발을 확 차올렸다.
놀란 말이 요란하게 울면서 푸르르 몸을 떨더니 흙먼지를 일으키며 날쌔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굴러떨어져 편자 박은 발굽에 머리통이라도 까였다가는 고대로 즉사하는 것이다. 홍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태자의 양팔 사이에 갇혀 온몸을 오그렸다. 이 꼬라지를 동료들이나 무동들에게 보였다간 삼 년 내리 조롱거리가 될 터다. 일단 얼굴이라도 가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말 위에서 덜커덩덜커덩 뒤흔들리던 홍의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에라 모르겠다, 태자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태자가 들쓴 면사의 끝자락이 홍의의 미간을 간질간질 간질이고 있었다.
***
말은 태자궁을 나와 곧장 금성의 구지를 지나더니 다리를 넘어 남산으로 들어섰다.
산어귀를 지난 중턱 깊숙한 곳에는 황실이 특별히 청유지로 찾는 목란골이 있었다. 높고 큰 절벽이 주변을 요새처럼 둘러친 그곳에는 험준하고 높은 골짜기 새로 흘러내리는 폭포와 그 아래로 넓고 맑은 호수가 있어 멱을 감고 소풍을 놀기에 아주 맞춤이었다. 홍의는 새하얀 폭포가 안개 너머 쏟아지는 아름다운 장관에 잠시 자신의 처지도 잊고 감탄하였다.
“심심하면 오르는 남산이건만, 이리 좋은 곳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홍의는 자기도 모르게 달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뽀얀 물안개에 이마가 싸하게 젖어 드는 느낌이 들었다.
“황족들만 출입할 수 있도록 지정해 둔 곳이거든.”
‘흐음. 백성들이 구경한다고 닳는 것도 아닐 텐데 욕심들도 많으시지.’
화경은 너른 호숫가의 상수리나무에 말들을 매어 두고 그늘 아래 자리를 깔아 챙겨 온 도시락을 펼치고 있다. 홍의는 바지를 종아리까지 걷어 올리고 넓고 편편한 너럭바위에 앉아 차디찬 물에 발을 담갔다. 사방의 깎아지른 절벽과 그 속에 안긴 녹음 사이로 터질 듯이 물오른 야생화들이 짙은 향기를 뿜고 있었다. 폭포 너머의 다채로운 무지개와 쪼르르 나무 타는 날다람쥐, 나뭇잎을 떨치고 푸드덕 날아오르는 어여쁜 청조. 차근차근 빠짐없이 아름다운 풍광을 담아내던 홍의의 시선이 문득 말없이 서 있던 태자에게로 가 닿았다. 콧바람을 쐬겠다던 그는 여전히 성가신 면사를 들쓴 채다. 어쩐지 제가 더 답답한 느낌이 들어 홍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태자는 고개를 반쯤 들고 어딘지 모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 면사를 쓰고 보면 눈앞이 침침하지는 않으십니까?”
홍의는 슬슬 물가에서 발을 빼고 접힌 바짓단을 다시 내리면서 은근슬쩍 물었다. 태자의 얼굴이 홍의 쪽으로 향한다.
“항시 그리 칙칙한 면사에 가리어 계시니 시야가 어두워지실까 저어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잠시간 홍의를 마주 보며 대답 없던 태자가 이내 아까 보던 곳으로 다시 고개를 튼다.
“잘 보여.”
“뭐가 보이시는데요?”
“그대 소물인 거.”
“…….”
홍의는 몰래 주먹을 쥐어짜다가 애써 웃는 낯을 해 보였다.
“전하께오서 저를 뒤꼍의 멍멍이들보다 더욱 심한 멸시를 하시는 것 같은데… 자꾸 이러시면 소신이 속상합니다. 그리고 저는 평균이에요. 소물 그거 아니고요….”
“돌치랑 깜치도 그대만큼 빨리 싸진 않을 텐데.”
“…….”
“이건 뭐 거의 토끼가 찍 하는 수준이라….”
“약!”
“…….”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약 때문이라고.”
홍의는 한파에 노출된 것처럼 쩍쩍 굳어지는 안면으로 애써 바득바득 웃어 보였다. 태자는 조용히 면사만 휘날릴 뿐이다.
“전하께서 정녕 자세히 모르시는 듯하여 재차 말씀드리오나, 소신도 나름 한 가닥 한답니다. 저 좋다고 쫓아다니는 해어화들 줄 세우면 쩌어기 구지를 꽉 채우고요.”
“허튼소리 하지 마. 어떤 미친 여인이 손가락 찍을 쫓아다녀.”
“…….”
“손가락 찍이라니. 다른 것도 아니고 손가락에 찍이라니.”
태자는 읊조리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 대 치고 튈까.’
흰 눈을 뜬 홍의가 무시무시한 역심을 다죄는 동안, 마침 태자는 멀찍이 떨어져 있던 화경에게 손짓을 하였다. 화경이 헐레벌떡 달려와 짐을 풀었다. 그것들을 곁눈으로 살피던 홍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것은….”
너럭바위에 줄지어 놓인 것은 갖가지 화구였다. 게다가 평소의 홍의라면 비싸서 엄두도 못 내는 옥판선지에 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붓까지 있었다.
“전하, 그 일을 함구하기로 약조해 주신 지 여섯 시진도 채 안 지난 것으로 압니다만.”
홍의가 괴팍하게 두 눈을 치뜨자 태자는 면사를 벗었다.
“그대의 그림은 춘화라고 보기에는 형편없는 수준이지만, 색채감이나 인물 표현력은 궁중 화공들보다 출중하더군.”
“…….”
“특히 그림 선이 섬세하고 꼼꼼해서 처음엔 여인이 그린 그림인 줄 알았어.”
“…전하, 설마.”
홍의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꼬았다.
“최근 우립의 춘화집을 싹쓸이해 간 그 귀공자가, 설마 전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