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대답은 않고 물끄러미 보기만 하는 꼴이 영락없었다. 아니 뭐 이렇게 대놓고 겉 다르고 속 다른 인간이 다 있지? 소름이 돋는 와중에도 혹시 그동안 받은 돈 다 토해 내라고 하진 않을까 싶어 홍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내 초상화를 그려라.”
태자가 시큰둥하게 명했고, 홍의는 단칼에 고개를 저었다.
“춘화나 모작했던 환쟁이 실력으로 어찌 감히 어진을 그릴 수 있겠습니까. 받잡기 민망한 하명은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그럼 군부로 가지, 우립 선생.”
태자는 휙 돌아서 길을 잡았고, 홍의는 얼른 태자를 붙들고 벽해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안다며 용포 자락에 묻은 먼지를 털어 드렸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태자는 한 자세로 붙박여 있는 게 슬슬 힘겨워 뻐근한 목을 살짝 꼬았다. 그러다 멈칫했다. 홍의가 양반다리 자세에서 팔짱까지 끼우고는 뚫어져라 태자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붓은 귓등에 꽂은 채였다.
왜 저러는가 싶어 태자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얼핏 살펴본 그림은 이미 거의 완성이 된 상태라 눈동자만 그리면 끝날 것으로 보였다.
“…전하.”
한참을 묵묵하던 홍의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서 보아도 괜찮겠습니까?”
“무얼?”
“전하의 눈동자 말입니다.”
잠시 말이 없던 태자가 얼마 후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허락을 구한 홍의는 무릎걸음으로 천천히 태자의 곁에 다가들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태자의 이마에 차양을 만들어 대었다. 내리쬐던 빛이 잦아들고 시야가 더욱 또렷해졌다. 홍의는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태자의 눈동자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얗고 무심하던 태자의 얼굴이 조금 흐트러졌다. 곧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가 푼 것이다.
흐음. 홍의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꺾어서 가까이 들이닥쳤다. 태자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뺐다. 홍의가 태자의 턱을 감싸며 숨소리처럼 속삭였다.
“가만….”
태자는 찰나가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이 영겁같이 길었다. 아릿한 물비린내와 향기 묻은 꽃바람이 왈칵 풍겨 와, 어지러웠다.
“참으로… 신기하군요.”
홍의는 진심으로 경탄하며 읊조렸다. 손바닥의 각도를 움직여 농음을 조절하다, 고개까지 이리저리 꺾어 가며 자꾸만 가까이 들이닥치는 것이다. 태자는 느리게 눈을 여닫으며 가만히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요 푸른 바닷물 같은 곳에 반짝반짝한 빛 알갱이들이 떠다니지 않습니까. 이리 보면 짙은 남빛 같기도 하고 저리 보면 진청색이고, 청록색, 하늘색, 모두가 한데 얽혀 휘몰아 드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이런 색은 그 어떤 명화공도 표현해 내지 못할 그런 빛깔입니다.”
“…신기하겠지.”
문득 태자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상대를 쏘아보았다. 나지막한 음성은 분명히 자조의 빛을 띠고 있었다.
“왜. 하도 신기하고 괴상하여 뽑아다가 전시라도 하고 싶어?”
당황한 홍의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예? 앗,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소신은 다만, 전하의 눈동자가 마치 삼라만상이 깃든 것처럼 신비하고 경이롭기만 하여….”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다. 태자는 여전히 지척에 있는 홍의의 얼굴을 관찰하듯이 유심히 살폈다. 황후가 어지간한 재목이라고 하도 올려 치기에 궁금하긴 했었는데, 실제로 대면하고 보니 확실히 반지르르한 낯짝이었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차림새가 단정하고, 알맞게 그을린 건강한 피부와 더불어 몸이 제법 좋은 편이었다. 특히 눈동자의 빛깔이 우물물처럼 유달리 검고 깊어서 보고 있자면 은근히 배알이 꼴리기도 했다. 자신에겐 없는 것이니까.
“…송구하옵니다, 전하. 소신의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홍의가 머리를 조아리며 예를 다해 사과했다. 태자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고갯짓으로 화지나 한 번 가리켰다.
홍의는 다시 화지에 코를 박았다. 아마 세심히 관찰한 직후라 이미 머릿속에 새겨져 있는 걸 꺼내 놓기만 하면 되는 과정일 터였다. 더 이상은 이쪽을 보지 않고도 쓱쓱 잘도 그려 나가는 꼴을 보는데 괜히 또 심기가 비틀렸다. 태자는 양반다리로 앉은 무릎에 팔꿈치를 딛고 턱을 괴었다.
“다재다능하네. 승마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
“불알로 걸어 다니고, 아무 데서나 찍찍 싸고.”
“일 절만 해 주십시오.”
아드득 이 가는 소리에 태자는 여전히 턱을 고인 채 슬쩍 웃음살을 올렸다. 골릴 때마다 바로 대거리를 해 오는 꼴이 지는 걸 몹시 싫어하는 성정인 건 알겠다. 상대는 가만히 있는데 연신 시비를 붙여 반응을 살피고 싶은 것이 스스로도 이상스럽긴 했다. 옷이 붉어 그런가. 붉은색은 눈에 잘 띄니까.
“완성했습니다.”
홍의가 양 귀에 꽂아 둔 붓들을 내리며 말했다. 화경이 부리나케 다가와 초상화를 챙겨서는 태자에게 내밀었다. 홍의는 화구를 주섬주섬 모으는 척하면서 태자의 반응을 곁눈질했다. 그런데 그림을 대충 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다시 화경에게로 휙 넘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화경은 그 그림을 도로 홍의에게 가져와 안겨 주었다. 수건돌리기도 아니고 이게 뭔 지랄일까.
“제 그림이 성에 안 차십니까?”
“그림은 좋아. 다만 앞으로 자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이걸 모작해서 장수를 늘려 와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 여러 장 필요하신 겁니까?”
“어. 될수록 많이.”
홍의는 찌그러지려는 얼굴을 애써 꾹꾹 폈다.
“전하, 소신은 벽해의 향선으로서 매일같이 공사가 총총합니다. 이미 그린 그림을 반복해서 그리는 쓸데없는 일에 할애할 시간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만 해도 전하께 이리 납거당하는 바람에 향선들 조회에 빠져서 입장이 아주 난처하게 되었….”
“품삯 많이 쳐줄게.”
“하, 소신이 그깟 돈 때문에 향선으로서의 책무를….”
“은자 열 근.”
…툭. 홍의는 들고 있던 붓을 떨어트렸다.
“왜, 부족해?”
낚싯바늘에 용 걸렸다. 어마어마한 금액에 홍의가 환하게 웃으며 부족하다니 당치 않다고 손사래를 치려다,
“시작할 때 반, 끝나고 반.”
얄미운 덧말에 금세 냉랭한 현자의 얼굴이 되었다.
‘뭐 그래도 은자 열 근이면 빚을 열 번을 갚고도 남을 금액이긴 하지. 대저택 서너 채를 사고도 마소가 오십 마리….’
눈 돌아간다. 구중궁궐에서 고이 자라 물정 모르는 귀공자를 벗겨 먹을 절호의 기회였다. 어쨌든 선금으로 닷 근이면 여전히 남는 장사이기도 하고 말이다. 신속히 타산을 마친 홍의는 진중하고도 다소곳하게 읍을 올렸다.
“향선 홍의, 비록 한미한 가문의 장자이지만 성심을 다해 전하의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태자는 잠시 물욕의 화신 보듯 냉담하게 바라보다 말했다.
“됐으니까 그림 간수나 잘해.”
“…예?”
“이 그림에 대해 어떠한 말도 새 나가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하라는 말이야. 만일 조금이라도 소문이 돈다면 선금으로 내린 은자 닷 근까지 도로 뱉어 내야 할 테니.”
“헉. 다향원에 눈이랑 귀가 몇 갠데 이를 조심하라 하십니까? 소신더러 놀 짬이나 쉴 짬마다 그림을 그려라 명을 내리셨는데, 그것은 남들 눈에 띄지 않고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임을 헤아려 주십시오.”
“금성은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금성에서 돈 소문이 장안에 퍼지기까지 하루도 채 안 걸리고. 민인들은 소문의 내막이 궁금한 게 아니라 그저 심심한 입에 씹을 거리를 찾는 거니까.”
“…….”
“그러니 경계해. 그대의 입도, 남의 입도.”
마침 차양이 접히고 해사한 햇발이 쏟아졌다. 오만하게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던 미태 어린 청년의 새하얀 능선이 투명하게 드러났다. 홍의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딱 다물고 뚫어져라 태자를 바라보았다. 이때 처음으로 이 치기 어린 젊은 군주에게 마음이 쓰였다.
“…전하. 신의 질문을 곡해 말고 들어주십시오.”
태자가 말하라는 듯 눈만 한 번 깜빡였다.
“돌이켜 보면 전하께오서 금성의 관료들뿐 아니라 민인들에게도 종종 날을 세우고 적대시하는 경향을 보이시는데, 그들이 앞서 전하를 욕해서입니까?”
태자는 묵묵히 보았다.
“만일 그러하시다면, 매일 스스로를 감추기에 급급한 전하께 그들이 어찌하여 충성을 바쳐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는 않으니까요.”
“…해서, 내 소문이 도는 것은 모두 내 탓이라는 말인가?”
“애초에 누군가를 탓할 필요도 없지요. 민인들을 책망하기에 앞서 전하께서 먼저 그 답답한 면사를 벗어젖힌다면 만사가 화평하지 않겠습니까?”
태자가 대꾸 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홍의는 진지하게 태자를 응시했다.
“저한테만 그 아름다운 미모 드러내지 마시고, 만천하에 봬 주시라는 말입니다.”
“…아름답다고?”
그 말에 별안간 못 들을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 태자의 미간이 확 찡그려졌다. 집중하여 또렷했던 푸른 눈동자도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무엄하다고 느낀 것 같았다. 홍의는 좋은 맘으로 직언을 해도 받질 못하는 인간이라면서 속으로 잠시 툴툴거렸다. 결국은 태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몸을 돌려 섰다.
“전하의 명대로 그림들은 최대한으로 그려 올리겠습니다. 또 앞으로는 전하 앞에서 추태 부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동안의 저는 제발 잊어 주십시오.”
“…….”
“허면 소신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다향원으로 돌아가 향선으로서 직분을 다하여야지요.”
냉랭한 표정으로 나름 각을 잡고 아뢴 홍의는 붉은 정복 자락 휘날리며 바위를 휙 내렸다. 완벽한 풍류랑의 모습으로 무릎 꿇어 인사를 올린 뒤, 그놈의 풍류랑 미소를 지어 보이며 멋들어지게 목란골을 빠져나가던 홍의는 골짝 어귀에서 유령처럼 등장한 옥지를 보고 또 꽥 비명을 질렀다. 옥지는 혼자 온 게 아니라 돌치와 깜치를 뒤세우고 오던 길이어서, 홍의가 꽥꽥대자 그에 놀란 검둥개들도 왈왈 짖어 대었다. 이윽고 홍의는 돌치에게 엉덩이 자락을 물어뜯기면서 나무 위를 허정허정 기어오르고 있었다.
“…‘아름답다’라.”
태자는 나무 위에 붉게 나리는 옷자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