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15화 (15/111)

#15

뒤늦게 남산을 내려온 태자는 낮참일 무렵 황후궁에 들었다. 황후는 평시 혼자 수라를 들 때보다 상에 꼼꼼히 신경 써 한낮의 끼니치고는 과한 산해진미를 깔아 둔 채 아들을 맞이하였다.

시비들을 죄 물리고 옥지만을 남겨 둔 채 모자는 수라를 들었다. 절육, 잡채, 율무죽, 타락죽, 꿩고기, 닭고기, 우설 찜, 민어, 청어, 정과, 수정과, 세실과… 먹자 할 것은 많은데 딱히 입에 당기는 찬은 없어, 태자는 꼼꼼히 가시 발라 놓은 보드랍고 짭조름한 민어 전을 집어서 입에 넣고 몇 번 씹었다.

“비린 것은 놔두고 육미부터 자시게. 그래야 몸이 더 강건해지는 법이니.”

황후는 손수 우설 찜을 집어 태자의 밥 위에 얹어 주고는, 그래도 흡족하지 않았는지 옥지에게 눈짓을 하여 쇠골 백숙을 끌어다 놓게 하였다. 태자는 그 끈적거리는 뽀얀 물을 보고 욕지기가 올라와 고운 미간을 슬슬 찡그리면서 고개를 조금 돌렸다. 번번이 황후궁에 들 때마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좋다고 내미는 어머님 때문에 곤욕스러웠던 세월이 햇수로만 따져도 자그마치 이십일 년이었다.

“홍의와의 수업은 어떠하더냐?”

탐탁지 않다는 듯 태자의 먹는 모양을 관찰하느라 여념이 없던 황후가 곧 운을 떼었다. 태자는 잠시 멈칫하였다가, 이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제가 잘 가르침받고 있습니다.”

“호호,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그 아이가 사내치고는 영 사특한 재주를 지닌 듯하여 내가 내심은 걱정하였는데.”

“…….”

“이제 파정은 조금 쉬울 듯하느냐?”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흐응. 아쉽다는 듯 제 아들을 건너다보던 황후가 문득 목소리를 한층 낮추며 물었다.

“탕약은 잘 들고 있느냐?”

“…예.”

“헌데 고 숭한 눈은 조금도 검어지는 기미가 없구나.”

“…….”

백숙을 뜨지는 않고 내내 휘휘 젓기만 하던 태자의 수저가 느리게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침에 자릿조반도 들지 않고 승마를 하였다 들었다.”

“바람이 선선하여….”

“거칠게 말타기라도 하였다가 면사라도 나부끼어 행여 고 숭한 눈알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면 그땐 어찌하려고 그랬느냐?”

태자가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자 황후는 안달이 난 여인처럼 좌불안석이다가 결국 목소리를 가늘게 떨었다.

“네가 이 어미의 애간장을 다 녹이고, 그토록 철딱서니 없이 군단 말이냐…?”

태자는 여전히 느릿느릿 백숙 국물을 휘젓기만 했다. 신경질을 쏟아 낸 황후는 끝내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이내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하였다. 눈동자의 색만 빼고 본다면 모자의 얼굴은 한데 놓고 찍은 듯 꼭 빼쏘아 있어서, 마흔에 가까운 제 나이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황후는 마치 태자와 남매지간 같았다.

태자는 어머니의 난데없는 눈물 바람에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투명한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깐 채 묵묵할 뿐이다. 늘 웃다가도 울고, 좋다가도 확 신경질을 부리곤 하는 어머니의 별난 성미도 이 지긋지긋한 탕약과 역겨운 사골만큼이나 오오래 견디고 묵인해 온 곤욕의 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

이윽고 태자는 결심했다는 듯 수저를 들고 백숙 국물을 떴다. 그리고 목구멍으로 꿀떡꿀떡 삼켜 내기 시작했다.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꾹, 꾹 찍어 내느라 바빴던 황후는 문득 태자 먹는 모양을 발견하고는 눈물이 쏙 들어간 얼굴을 해 보였다. 태자가 수저로 국물을 뜨다가 답답하다는 양 아예 그릇째로 입에 부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방울도 남김없이 솥을 싹 비운 태자는 기탄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옥지가 소리 없이 다가와 태자의 얼굴에 면사를 씌웠다.

“소자 이만 태자궁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

태자는 어안이 벙벙한 황후에게 단정히 읍을 올린 뒤, 답인사도 듣지 않고 그대로 내실을 빠져나왔다.

궁인이 즐비한 안뜰이 아닌 후원으로 길을 잡은 태자는 평시와 달리 걸음을 빨리하였다. 허둥지둥 그를 쫓던 옥지가 후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태자는 면사를 거칠게 벗어젖히고 뒤뜰의 화단에 방금 먹은 음식을 모조리 게워 내고 있었다.

“우욱.”

옥지는 곁에 서서 혹여 보는 눈은 없는지 안절부절못했다. 한참을 그리 토악질을 하던 태자는 곧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옥지가 서둘러 명주 수건을 꺼내어 태자의 입가에 묻은 불순물을 꼼꼼히 닦아 내었다. 태자는 가쁜 숨을 삼키며 멍해진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맑고 푸른 눈동자가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초점이 희미하였다.

“…….”

호흡이 제대로 돌아왔을 무렵, 태자는 문득 방금 저가 저지른 토사물 옆에 빼주룩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꽃 한 송이를 보았다. 안절부절못하던 옥지가 다시 면사를 씌우려는데, 태자는 손만 들어 거부의 뜻을 비쳤다. 그리고 천천히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 동안 그 붉은 것을 골똘하게 내려다보는 것이다. 평시 안 하던 행동에 잠시 의아해하던 옥지의 시선도 곧 태자를 따랐다.

“적작약이옵니다. 전하.”

옥지가 자분자분 아뢰었다.

“꽃이 크고 탐스러워 함박꽃이라고도 하옵니다.”

노란 술에 붉은 밑동이 비늘 같은 잎으로 싸여 새침하고 귀여웠다. 태자는 그 탐스럽고 붉은 것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이내 손을 뻗어 물이라도 담뿍 담긴 것처럼 촉촉한 꽃잎을 손가락 끄트머리로 톡 건드렸다. 얼핏 닿았는데도 야들야들하고 보드라웠다.

“…빨갛다.”

태자는 양팔을 무릎 위에 겹치고 그 위에 고개를 누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옥지는 별안간 상전의 행작이 기이하여 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붉다.”

그렇게 또박또박, 느리게 중얼거리고는, 양팔에 이마를 묻었다. 볕을 잘 쬐지 않아 뽀얗고 매끄러운 태자의 푹 숙인 목덜미로 화사하고 요요한 햇발이 나긋나긋 스미고 있었다.

***

바야흐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홍의는 붉은 정복 자락 휘날리며 그 어느 때보다도 비장한 표정으로 무동들을 향해 일갈하였다.

“결사 항전이 코앞이다.”

긴장으로 바짝 굳은 무동들의 면면을 빠르게 하나하나 훑어본 홍의는 고개를 한 번 주억이고는 담장 너머의 동태를 살피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제가끔 무리 지어 다니는 해어화들과 무동들은 담 너머의 상황을 모르는 듯 하하호호 평온하기만 하였다. 눈알을 뙤록뙤록 굴리며 치밀하게 길을 봐 둔 홍의가 이윽고 무동들을 돌아보며 강용하게 외쳤다.

“자, 탕비고로 출발!”

“예, 주군!”

그리고 홍의와 무동들은 다시 어기적어기적 오리걸음을 떼었다. 주홍색 보자기를 코밑으로 묶은 홍의를 필두로 양손에 풀잎을 들거나 정수리에 가마니를 뒤집어쓰는 둥 제각기 어설프게 위장한 무동들의 오리 행렬이 높은 궁장을 따라 엉금엉금 이어지고 있었다. 한참 그 짓을 하다가 결국 참다못한 새옹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냥 좀 걸어가면 안 됩니까? 허벅지가 당겨 죽겠습니다!”

“이놈이.”

냉큼 새옹의 모가지를 잡아 다시 아래로 내리누른 홍의가 으르렁거렸다.

“미쳤느냐? 그러고 여봐란듯이 가다가 미함 공께 들키기라도 하면 삼 일 굶는 것으로 모자라 단체 기합까지 받는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게 다 주군께서 조회에 참석하지 않아 생긴 사달이지 않습니까. 왜 주군이 잘못한 걸 가지고 저희들까지 삼 일을 내리 굶어야 하느냐 이 말이죠.”

맞습니다! 배고파 죽겠습니다! 새옹이 물꼬를 트자 뒤에 쫘르륵 포진해 있던 무동들에게서도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것들이. 이를 갈던 홍의가 곧 한숨을 푹 쉬고는 반색하듯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입 털 각을 잡았다.

“내가 비록 다른 귀족들에 비해 가문이 한미하고 부족한 점이 많은 수장이지만 그래도 너희들 배불리 먹여 보겠다고 늘 분골쇄신하였다. 헌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조회에 불참한 것 가지고 미함 공께 죽방을 얻어맞고 믿었던 너희들까지 이리 나를 탓하고 모질게 굴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참… 인생무상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주, 주군….”

“주군, 서운해 마십시오.”

“예, 주군, 저희들이 주군을 탓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어찌 실수 없이 살 수 있단 말입니까?”

틈을 놓치지 않고 홍의는 재빠르게 꼬리를 물었다.

“그렇지? 나쁜 건 내가 아니라 미함 공이지?”

“맞습니다! 미함 공께서 너무하셨습니다!”

“미함 공이 호랑말코입니다!”

“원 녀석들 참.”

그렇게 여론 몰이를 마친 홍의는 흡족하게 무동들을 인솔하여 다시 궐의 탕비고로 오리걸음하였다. 새옹만이 어이없이 한숨을 쉬며 혀를 끌끌 찰 뿐이었다.

홍의의 철저한 지휘 아래 무동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한 무리는 남천에서 물고기를 잡아 왔고 한 무리는 탕비고에 숨어들어 갖가지 푸성귀와 감자, 옥수수 따위를 훔쳐 내었다. 그리고 약속한 장소인 매화 숲에 모여든 홍의 패거리는 다 같이 낄낄거리며 돌화로를 만들어 알뜰살뜰 구해 온 먹을거리를 신명 나게 굽기 시작하였다. 자작자작 타들어 가는 화롯불 위에서 슬슬 맛난 냄새가 풍겨 들자 입 안에 단침이 절로 괴었다. 마침 매화 숲으로 다리쉼을 하러 왔다가 이게 웬 거지 떼들이냐며 흉을 보던 해어화들도 홍의의 농간 아래 다 같이 둘러앉으니, 새옹은 여기서 제정신인 사람은 어째 저뿐인 것 같아 혀끝이 썼다.

“맛나다.”

“맛납니다요.”

“인생 별거 있느냐.”

“별거 없습니다요.”

도란도란 입장단을 맞추며 얼굴에 시커먼 검댕을 여기저기 묻히고 시시덕대는 꼴들이 영락없는 전쟁고아들이었다. 인중이며 입가며 사방팔방 숯검정을 묻힌 홍의는 그중 제일가는 상거지 같은 몰골로 감상에 젖어 먼 산을 보면서 시를 한 수 읊었다. 감탄한 무동들과 여인들이 일동 기립 박수를 쳐 대니, 그 지랄 쿵짝들이 가히 끝 간 줄을 몰랐다.

“헌데 주군, 벽선각 조회엔 왜 빠지셨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생전 그런 적 없던 분이.”

무동들 전원의 시선이 궁금하다는 듯 홍의의 얼굴로 쏠렸다. 홍의는 하아, 하고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나뭇가지로 잘 익은 감자를 푹 찔러 들어 올렸다.

“내 요즘 태자 전하의 스승으로 분골쇄신하느라 그렇다.”

“예에?!”

“태자 전하의 스승이요오?!”

무동들은 일동 앉은 자리를 솟구쳐 올랐다. 여인들도 덩달아 놀라 어마마하였다.

“평소 나를 영특히 보고 귀애하신 황후께서 굳이 사정사정을 하기에. 뭐 어쩔 도리 없이.”

“굉장합니다. 역시 주군이 난 분은 난 분입니다!”

“헌데 태자께서는 엄청난 흉한이지 않습니까?”

“태자 전하의 용안도 뵈었습니까?”

줄달음치는 질문 공세에 홍의는 제풀에 흠칫 뜨끔하여 감자 삼키던 것을 캑캑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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