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무동들은 눈까지 반짝반짝 빛내며 잔뜩 궁금한 눈치였다.
“태자 전하가 대머리에 사팔뜨기라던데 그 말이 참말입니까?”
“어?”
“태자 전하가 고자라던데 그 말은 또 참말입니까?”
“엥?”
“태자 전하가 바보 둔치라 글도 못 읽는 까막눈에 말도 쉬이 못 하신다던데 그 또한 사실입니까?”
“으응? 무슨, 그 정도는 아니신….”
“역시 홍의 님은 대단하시어요! 그런 천치 태자를 가르쳐 글도 읽게 하고 말도 하게 한다 이 말이지요? 저는 역시 홍의 님께 시집을 가렵니다!”
꺅꺅거리던 여인 하나가 대뜸 홍의의 무릎 위에 앉더니 목을 팔로 끌어안고 뺨에 쪽 입을 맞추었다. 아니, 그게 왜 그렇게 돼? 당황한 홍의가 그 말이 틀리다 아니다 정정할 겨를도 없이 무동들이 감자 쥔 주먹을 휘휘 돌리며 연호하였고, 그중 몸집이 투실한 오복이라는 무동 하나가 너무 기차게 흥분하여 팔을 풍차처럼 돌리는 바람에 손에 쥐었던 감자를 놓치고 말았다.
감자가 허공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그리고 누군가의 가슴팍에 퍽, 하고 된통 부딪쳤다.
“…….”
“…….”
좌중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감자 맞은 주인공은 다름 아닌 양옆에 옥지와 화경을 세우고 검은 면사 휘날리며 선 태자였다.
별안간 태자의 등장에 기함을 한 무동들이 벌떡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홍의도 퍽 당황하여 입을 벌리고 앉았다. 특히 감자로 태자를 맞힌 오복은 제 손과 태자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번갈아 보다가 이내 덜덜 떨면서 무릎을 꿇고 맨바닥에 이마를 처박았다.
“저, 전하! 죽여 주시옵소서!”
모두가 사색이 되어 벌벌 떨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까지 저희들이 시시덕대며 주워섬겼던 태자를 향한 갖가지 뒷담들이 고스란히 당사자의 귀에도 들렸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검은 면사를 들쓴 채 음산하게 서 있는 태자는 계속 말이 없었다. 홍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상황을 모면할 비책을 떠올리려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상황을 반전할 능력이 제겐 없는 것이었다.
태자는 하필 오늘따라 흰 용포를 입고 있어서 옷섶에 감자의 숯검정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다. 태자가 계속 말이 없어 엎드린 채로 떨기만 하던 오복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태자의 옷깃에 묻은 검댕이 망극하였다. 오복은 조심조심 무릎걸음으로 태자에게 다가가 연신 송구하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면사 안쪽에서 나직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고개를 들라.”
그 목소리가 어쩐지 예상보다 사납지 않고 사뭇 다감한 축에 속하여서, 오복은 잠시 몸을 멈칫하였다가, 용기 내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 높은 곳에서 무심히 오복을 내려다보고 있는 태자의 얼굴맡에서 검은 면사가 바람결에 나부끼었다. 오복이 다시 한번 사죄를 하려 입을 조금 벌렸을 때, 별안간 검은 태사혜 신은 발이 오복의 머리통을 거칠게 후려쳤다.
모두가 경악하여 입을 벌렸고, 홍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홍의가 그들에게 채 가까이 가기도 전에 태자는 바닥을 뒹구는 오복에게 틈도 주지 않고 무자비한 발길질을 쏟아 냈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화경의 검을 손수 뽑아 들기에 이르렀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전하…!”
오복이 연신 개개빌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태자는 검을 들어 올렸다. 정녕 베어 버릴 작정이었다. 보통은 화경을 시켰겠지만, 이번만은 친히 거죽을 베어 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붉은 옷자락이 눈앞을 스치는가 싶더니 익숙한 작약 냄새가 났다. 태자는 건장한 사내이면서 꽃향기를 묻히고 다니는 이가 요즘 들어 참 거슬린다는 생각을 했다.
홍의는 오복을 가로막고 서서 어떤 말이라도 해 보려고, 태자를 설득해 보려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 도통 말이 나가질 않았다.
잠시 두고 보던 태자가 천천히 칼을 멈추고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들어서 홍의의 목덜미에 비스듬히 겨누었다.
“…….”
서늘한 쇠 날이 푸른 도광으로 홍의의 뺨을 밝게 비추었다. 내리깐 눈동자로 그것을 살피던 홍의의 관자놀이를 식은땀이 긋고 흘렀다.
“비켜.”
홍의는 자기도 모르게 칼 쥔 태자의 팔목을 양손으로 붙들었다. 놀란 무동들과 화경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대항이 아니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자기도 모르게 붙든 것이었다. 태자는 면사 속에서 자신의 팔목을 쥔 홍의의 따뜻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송구합니다, 전하.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오복은 평시에도 말짜 짓으로 자잘한 사건 사고를 일으켜 어지간히 소신이 애먹고 있는 꼴통입니다. 이번 일을 경계로 두 번 다시 이런 망극한 사달을 빚지 않도록 더욱 철저히 단속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이번 한 번만 아량을 베푸시어….”
필사적으로 항변하면서, 홍의는 은연중에 자신의 손바닥으로 칼 쥔 태자의 어수를 여러 번 꼭꼭 감싸 쥐었다. 태자는 홍의 하는 짓을 물끄러미 두고 보았다. 따뜻한 양손으로 느리고 간절하게 주물거리는 것이 마치 미인계, 방중술의 일환처럼 아주 묘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홍의에게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다. 생각 없이 저지른 자신의 행동이 상대방의 어두운 무언가를 자극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누군가에게 간곡히 부탁할 때 나오는 습관에 지나지 않았지만, 때와 상대를 가렸어야 했다는 것이다. 또한 태자와의 첫 대면 이후 약간의 성적인 접촉이 몇 차례 있었기에 감히 범인은 함부로 손을 대어서는 안 되는 황태자의 옥체라는 사실이 흐려지고 말았다. 머릿속엔 그저 오복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 네가 무얼 잡고 있는지 아느냐.”
홍의가 머춤했다.
“습관처럼 몸으로 덤비는데, 이거 너희 집안 내력인가. 칠별관 문성은 가난뱅이 출신임에도 아첨과 화술에 능하여 자기 아들을 다향원에 꽂아 주었다고 들었다. 비결이 뭔지 궁금했건만….”
검은 면사 안쪽에서 붉은 입매가 얼핏 뱀의 꼬리처럼 야릇하게 실그러지는 듯했다. 그제야 홍의는 화들짝 손을 떼어 내고 한 발 물러섰다. 홍의의 질린 얼굴로 황망과 수치가 번졌다.
‘대체 왜, 대체 왜 이 인간은 늘 이런 식으로…!’
차라리 불경하고 주제넘다며 호통을 치는 것이 백배 나았다. 홍의는 기가 막히는 반면 몹시도 수치스러워 자기도 모르게 무동들을 곁눈질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무동들이 가뜩이나 조아리던 몸을 더욱 오그리는 게 보였다. 자신을 따르는 수하들 앞에 이런 모욕감은 처음이었다. 그럴 주제가 아님에도 울컥해 버린 홍의는 자기도 모르게 안광을 사납게 벼리며 태자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곡해는 말아 주십시오. 소신은 단지 전하의 신하이자 벽해의 향선으로서 간하였습니다. 일말의 법도와 절차도 없이 살육을 자행하는 폭군이 되지 마시라는 뜻이었을 뿐, 다른 의미는 절대….”
“그럼 손이 아니라 자지를 주물러 주지그래. 송사는 그리하는 게 맞잖아?”
“말씀…!”
“…….”
“가려서 해 주십시오.”
그 와중에 오복은 슬금슬금 무릎걸음으로 물러나 엎드리다시피 한 무동들 틈에 은근슬쩍 섞여 들었다. 그럼에도 말리는 이 아무도 없었다.
“돈만 준다면 뭐든 다 파는 거지 같은 새끼가.”
“…….”
“내 나라에 너같이 천박한 향선은 필요 없어.”
태자는 그토록 날 선 말로써 상대에게 비수를 꽂으며 생각했다. 흔한 일이라고. 무시로 겪은 상황이라고. 금성은 어딜 가든 사람이 산재했고 그들은 끊임없이 입을 놀렸으니까. 벽해의 황태자는 까막바보에 귀신이 들렸고 외양은 도깨비 못잖게 너주레하며 인성조차 글러 먹었다고 모두가 입을 모아 떠드는 것을 당사자가 모를 리 없었다. 모르는 척 지나치는 데는 도가 텄다. 여염의 시집간 아낙이라도 된 양 귀머거리 삼 년 벙어리 삼 년 흉내를 내고 살았다. 이십여 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했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참아지질 않았다.
‘저한테만 이 아름다운 얼굴 드러내지 마시고, 만천하에 봬 주시라는 말입니다.’
그게 이 사내의 진심인 줄 알았다. 앞에서는 두려워 벌벌 떨다 돌아서면 뱀 같은 혀를 놀리는 여타의 귀족들과는 분명히 다르리라고. 매사에 앞과 뒤가 한결같은 사내일 거라고, 당돌하지만 올곧은,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진창 속에 오롯이 홀로 피어난, 그 새빨간 작약처럼….
“…이 나라에 전하는 어울리십니까?”
철썩!
홍의의 몸이 휘청거렸다. 귀뺨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탓에 머릿속이 멍멍해지면서 시야가 하얗게 부풀었다.
무동들이 놀라 홍의를 부르짖는데, 태자가 비틀거리는 홍의의 머리칼을 무작스레 움켜쥐었다. 보다 못한 화경이 나서려 하니 태자가 저지하였다. 모두가 안절부절못하는 가운데 태자가 홍의의 머리칼을 잡쥐고 근처의 갈대숲을 헤치고 들어갔다.
홍의의 몸뚱이를 갈대 사이로 내던지고 그 위에 올라탄 태자가 면사를 벗으며 바깥을 향하여 명했다.
“화경, 모두 데리고 이백 보 밖으로 물러나라.”
“전하, 어찌!”
“변고 없으니 물러나라는데도!”
버럭 일갈하자 곧 사위가 고요해졌다. 홍의가 연신 반항하며 몸을 뒤채니 태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양팔을 내리눌렀다.
“윽… 드러내라고 있는 것이 얼굴이거늘…! 그조차, 못 하는… 한심한 사내가…!”
무슨 생각인지, 홍의가 덥게 씨근대며 도리어 마구발방하였다. 이는 명백히 화를 돋우는 행위였고, 태자는 말없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태자 본인의 조막만 한 얼굴 크기에 비교해 보았을 때 상당히 커다랗고 떡심 좋게 생긴 주먹이었다. 그 옹근 주먹이 홍의의 부드레한 뺨으로 마구 박혀 들기 시작했다. 양팔로 얼굴을 가리고 필사적으로 방어해 봐도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뼛성을 막아 낼 도리가 없었다. 이악스레 이어지는 모진 폭력에 결국 홍의의 볼이 터지고 옷깃이 뜯어지고 코피가 번졌다.
“하아. 윽….”
홍의의 입에서 생피와 함께 가느다란 신음이 울꺽 새었다. 붉어진 볼이 빠르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태자는 가쁜 호흡을 삼키며 제 아래 깔린 홍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분이 좀 풀리십니까?”
홍의는 얼얼한 이마를 손등으로 누르며 한숨처럼 물었다. 붉은 옷깃 새로 탄탄한 살갗이 은밀히 드러났다. 목덜미엔 손톱자국과 핏방울도 맺혀 있었다.
“…전하.”
휘요옹- 어디선가 휘파람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새 날이 지는지 주홍색 꽃노을이 두 사내의 온몸을 물들였다.
“화가 모두 풀리실 때까지 신을 치셔도 좋습니다. 계속하십시오.”
그러자 홍의를 잠시 내려다보던 푸른 두 눈으로 아스스한 안광이 돌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가누고 무언가 헤아리는 듯하던 태자가, 문뜩 한 손을 뻗쳐 왔다.
태자는 홍의의 멱을 잡쥐고 들어 올렸다. 검댕과 피가 뒤엉켜 지저분한 입술에 그대로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