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홍의는 한순간 빨려 들어갈 듯 깊은 심연을 본 것만 같았다. 놀라 확장된 시야로 깊은 바다가 출렁거렸다. 태자는 이로 긁듯이 홍의의 인중을 쓸고 입술을 깨물었다. 입도 눈도 모두 맞춘 채였다. 당황하여 어깨를 퍽퍽 밀어내 보지만 이미 아래 깔려 누운 채로는 맥없이 헛심 쓰는 꼴이라, 필사적으로 도리질을 치던 턱까지 쥐여 잡히니 속절없이 입이 벌어졌다. 질끈 눈이 감겼다. 무언가 쩌억하고 빨려 드는 소리와 함께 보드랍고 흐물흐물한 혀가 입 안을 쑥 채우고 들었다. 태자는 유연하게 홍의의 혀를 미끈둥미끈둥 얽고는, 이악스레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사내들의 돌매처럼 단단한 허벅다리와 장딴지가 얽혔다. 둘을 가린 갈대가 사각사각 줄기를 비비며 쭐렁였다. 홍의가 고개를 세차게 돌리는 바람에 어긋난 태자의 입술이 잔뜩 악에 받쳐서는 홍의의 귓불을 잘근잘근 짓깨물었다.
“어찌… 이러십니까! 그만…!”
경악한 홍의가 빠져나가려 용을 썼다. 태자는 홍의의 머리끄덩이를 확 잡아채어 사납게 비틀어 쥐었다. 그 채로 다시 입끼리 맞물리는데, 마침 홍의는 콧속 깊은 곳에서 흐르다 만 코피가 다시 역류하는 느낌이 들어 헛구역이 났다. 다음 순간 몽글거리고 비릿한 핏물이 침과 함께 목구멍으로 꿀떡꿀떡 넘어오고, 결국 토기를 참지 못한 홍의가 입 안에 가득 찬 태자의 혓바닥을 왁살스레 깨물어 버렸다.
“윽…!”
물컹- 고통에 면역이 없는 보드란 살덩이가 날카로운 송곳니에 억세게 깨물렸다. 기함한 태자가 확 상체를 일으키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와 동시에 홍의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주변이 컹컹 울릴 만큼 거센 기침을 콜록거리며 역한 핏물을 허겁지겁 게웠다.
“…물어?”
태자가 손등으로 입술을 받친 채 뇌까렸다. 주변의 잡풀을 뜯으면서 연신 토악질을 하던 홍의가 간신히 구역질을 멈추고 올려다보았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괘, 괜찮으십….”
떨리며 내밀어진 홍의의 손을 탁 쳐낸 태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홍의는 그저 망연자실하여 산발한 머리칼에 코피 흐르는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날 물었어?”
“…피가… 코에 피가 역류하여… 행여 전하의 구중에 더러운 것을, 쏟을까 하여….”
“…….”
그저 당황스럽고, 경악스러워, 더듬더듬 변명의 말을 읊조리던 홍의가, 별안간 얼굴을 왈칵 붉히더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어서 붉은 장유 두른 어깨가 점차 속도를 높여 오르락내리락했다.
이상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자신의 입에서 난 피가 태자의 입에 들어갈까 염려하였던가? 참으로 기이하다. 몹시도 괴악망측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하야말로 대체 무얼 하신 겁니까?”
홍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태자를 향해 질문했다. 그리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눈높이를 맞췄다. 턱이 절로 떨리고 잇새가 부딪쳤다.
“말씀해 주십시오. 대체 소신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신이 감히 대들어 그런 것이라면 법도에 맞게 처벌하시면 될 일입니다. 대명천지 어떤 황태자가 다짜고짜 신하에게 입을, 혀를…!”
결국 다시 말문이 막혔다. 홧홧하게 열 오른 얼굴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태자가 조소하였다.
“아, 나와 입을 맞출 바에야 맞아 죽는 것이 낫다… 뭐 이런 말 하고 싶은 건가?”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홍의가 새빨개진 얼굴로 바락 소리를 쳤다. 태자가 가만히 말했다.
“그래. 의외로 반응은 좋더라고.”
“…….”
“너 내가 혀로 감을 때 천박하게 신음했잖아?”
“…….”
“내 침 빨아 마셨잖아, 맛있다는 듯이.”
태자가 한 발 다가왔다. 그리고 홍의의 턱을 거칠게 잡아 고정했다.
“잔대가리 굴리지 말고 잘 들어. 네가 나를 이용하든 말든 상관없어. 뒤에서 나에 대해 뭐라 떠들든 신경 안 써. 다만 성교육을 가르치겠답시고 내게 접근했으면, 그만한 기지는 보이라는 거다, 손가락 하나에 질질 싸지 말고.”
“…….”
태자는 뭔가 생각난 듯 나른히 턱을 들었다.
“지금 빨아 볼래?”
“…….”
“파정하지 못하더라도 은자 닷 근은 내어주지. 돈이라면 엉덩이도 팔아 치울 놈이잖아, 너.”
묵묵히 듣기만 하는 홍의의 뺨으로 붉은 노을이 흘러내렸다. 태자가 경시를 가할수록, 홍의는 오히려 더 덤덤한 눈을 했다. 머리까지 치받았던 열이 한순간에 식어 버린 사람처럼. 희한스러운 반응이었다. 태자가 길게 숨을 풀어내는 순간, 홍의가 입을 열었다.
“전하.”
홍의는 자신의 턱을 쥔 태자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그리고 씽긋 웃었다.
“부디 정신 차리십시오.”
사아아, 저녁놀을 휘돌던 꽃바람이 갈대 사이를 헤치고 불어왔다. 순간 태자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홍의의 입술이 꽃잎처럼 가벼이 태자의 입술을 머금었다, 이내 떨어진 것이다.
웃고 있는 홍의의 얼굴이 몹시 눈에 설었다. 태자는 무심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강녕하십시오, 전하.”
홍의는 가벼이 읍을 올리고 그대로 태자를 지나쳤다. 망설임 없이 걸어 나가는 너른 등이 흐르는 노을과 뒤섞여 붉게, 붉게 이지러졌다.
“…….”
갈대숲에 우두커니 서서 한참 동안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태자는 문득 입귀를 타고 무언가 흘러내리는 느낌에 아래를 보았다. 막거나 받칠 새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린 피가 앞섶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태자는 그제야 본인의 상태가 심상찮음을 느끼고는 슬쩍 미간을 찡그리다가 이윽고 입 안에 가득 고인 뜨끈한 선지피를 왈칵 쏟아 내었다.
“저게… 얼마나 세게….”
깨문 거야. 태자는 이맛살을 지그시 찌푸리며 혀를 슬쩍 내밀어 윗입술을 핥듯이 낼름 하였다. 그러고 보니 혓바닥이 알알하고 사정없이 저려, 감각도 잘 없었다. 피가 좀 멎었는지 한창 쏟는 중인지 그것도 모를 지경이다. 아무튼 입 안부터 해서 가지런한 잇바디까지 죄 붉게 물들었다. 명백한 과다 출혈이었다.
저 멀리 홍의의 붉은 옷자락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태자는 한 번 더 입 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 냈다. 돌연 현기증이 일었다. 그저 눕고 싶어진 그는 고민 않고 풀썩, 마른 풀숲에 대자로 몸을 뉘었다. 무지근한 눈으로 온 세상을 반짝반짝 물들인 붉은 노을을 물끄러미 응시하는데, 아까 울던 휘파람새가 꽁지깃을 빳빳이 세우고 허공을 우회하는 것이 보였다.
태자는 무심코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보드라운 미풍에 길섶을 날던 민들레 홀씨가 갈대에 걸려 한들거리고 있었다. 홀씨를 향해 살며시 손을 뻗어보았다.
“…웃을 때.”
둥실, 건듯 불어온 실바람에 홀씨가 날아올랐다.
“애교 살이 도드라지는 얼굴이었군.”
끝내 태자의 손길을 피해 허공을 휘돌던 홀씨가 나붓나붓, 야속하게 멀어져 갔다.
“저언하아!”
멀지 않은 곳에서 화경이 애타게 태자를 부르짖으며 헐레벌떡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태자는 코로 한숨을 내쉬고는 허무한 손을 툭 내려놓고 다시 하늘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다홍빛 노을이 쏟아질 듯하였다.
***
“홍의에게 뚜드려 맞은 태자 전하의 코가 옆으로 홱 누웠다고 합니다.”
“음낭이 빵 하고 터졌다고 합니다.”
“아랫도리송사에 칼부림 나는 법이라더니, 역시 옛말 틀린 것 하나 없나 봅니다.”
금성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태자의 흉물스러운 외모와 흉포한 성정을 견디다 못한 홍의가 작정을 하고 태자를 시해하려 했다는 것이다. 해어화들은 벌써 이 일로 노래를 지어 부르며 다녔고, 문관들 병사들 시비들 가릴 것 없이 이목이 집중된 상황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 일이 황후의 귀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뜻이었다.
미함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정복 자락 휘날리며 빠르게 다향원 내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옆을 허둥지둥 따라붙던 정통 가문 향선들이 매우 진중하고도 귀족적인 어투로 태자의 고환을 운운하다 문득 자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헌데, 매사 음전하고 강직하던 홍의가 대체 어쩌자고 신통의 중심인 태자와 얽혔을까요?”
“애초에 하층 귀족인 홍의를 정통에 받아주는 게 아니었습니다. 워낙에 본 데 없고 천잡한 출신이니 행실 또한 겉 다르고 속 다를 지라, 이야말로 갯벌에 망둥이 풀어 방치한 꼴과 다르지가 않았지요. 곧이라도 황후가 들고 일어나 애먼 우리 정통 가문 사람들까지 해를 입으면, 그땐 어찌한단 말입니까?”
“허튼소리!”
초조하게 성토하던 향선들을 일시에 제압한 미함은 서늘한 눈빛으로 면면을 노려보았다.
“금성의 떠버리들이 지껄이는 헛소리를 경전 삼아 아주 성전이라도 차릴 기세로구나. 아둔하고 한심한 놈들 같으니라고.”
길게 혀 끄는 소리에 모두가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합죽이가 된 정통 향선들을 뒤로하고 정복 자락 대차게 풀썩이며 벽선각 집무실로 들어선 미함은 거듭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태자는 본디 비정상적인 소문이 샘솟는 화수분이었다. 정확히는 신통을 견제하기 위해 정통이 퍼뜨린 유언비어와 훗날 철저한 섭정을 위해 미리 태자를 통제하려는 황후의 술수가 맞물린 상황으로, 현재로서는 정치적 희생양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그토록 철저히 단속당하던 태자가 어쩌자고 이런 대형 사달을 벌였는가?
“미함 공, 향선 홍의가 뵙기를 청합니다.”
마침 번병의 음성이 울리고,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사고뭉치가 들었다.
그런데 글을 쓰려고 먹을 갈던 게 아니라 홍의가 나타나면 던지려고 벼루를 벼르고 있던 미함은, 막상 홍의가 눈앞에 닥치자 망연히 눈꺼풀만 끔적거렸다.
“그… 태자 전하의 솜씨더냐?”
홍의는 예를 올린 후 보란 듯이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예. 공의 친조카의 솜씨입지요.”
“…흐흠, 태자께서 이토록 예술적 조예가 깊으신 줄 내 미처 몰랐구나.”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간 전하께 내재되어 있던 재능마저 끌어올려 드렸건만 왜들 저만 죽이려고 달려드는지 모를 일이에요.”
홍의는 술떡처럼 부풀어 오른 얼굴로도 잘만 빈정거렸다. 머리칼은 봉두난발에, 왼쪽 눈에는 아주 선명한 보랏빛으로 멍울까지 잡혀 있었다. 그 와중에도 여직 입은 살아 나불대는 것이다. 제풀에 떨떠름해진 미함은 홍의에게 다가가 얼굴 이곳저곳을 살펴보기에 이르렀다.
“…대체 무어로 어찌 나대야만 그 말 없는 골샌님에게 그토록 신명 나게 읃어맞을 수가 있느냐?”
“아이고. 공께서 그분을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먹 실하시고 성질 불같으시고 성욕 또한… 크큼. 좌우지간 태자전하 무르게 보았다간 큰코다칩니다, 녜.”
“허어, 그렇단 말이야? 이래저래 놀랍고 기가 막힌 노릇이로다. 요 멍울도 말이야. 아주 똥그랗다 못해 땡그란 것이 누가 보면 경단이라도 대고 그린 줄 알겠단 말이지. 태자께서 아주 제대로 심기가 상하신 듯한데 이제 어찌할 테냐? 네놈 명줄 갈리는 소리가 예까지 들리는 것을?”
홍의는 더 받아칠 말이 없어 이가 갈렸다. 분명히 아까까지는 죽음을 각오했었다. 황태자의 옥체를 훼손하였으니 응당한 절차로서 처결을 받아도 그러마할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뒷간을 나서면 도로 간사해지는 게 사람이라고, 상황이 이쯤 되니 슬슬 이대로 가만히 앉아 절체절명을 기다리려니 괜히 억울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 함께 들어 눈치를 살피던 새옹이 대강의 상황을 빠르게 설명했다. 정황을 다 듣고 난 미함이 홍의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네놈은 그 다팔대는 성질머리 때문에 언젠가 크게 한번 사달이 날 줄 알았다.”
홍의는 썩어 발효된 얼굴을 아스라이 들어 올렸다.
“미함 공…. 저 정말 이대로 죽는 겁니까?”
“꼴값 떨지 말고 행장이나 꾸려라.”
미함은 코웃음을 치며 평시 자신이 아끼던 보검을 꺼내어 홍의에게 던졌다. 홍의는 그저 입을 헤벌리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파발을 할 때까지, 본가로 가 근신하고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