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18화 (18/111)

#18

동백골은 벽해국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손꼽혔다. 마을 둘레를 따라 병풍처럼 버티고 선 촘촘한 산마루는 사시사철 단장하여 바지런히 빛깔을 뽐냈다. 마을의 중심에는 풍류랑들의 사택이 드문드문 펼쳐지고, 사이사이에 즐비한 매화목들로 상쾌한 향기가 일품이다. 오랜 세월을 거쳐 더욱 곱고 단단하게 다진 붉은 흙길과 포근한 볏짚 지붕을 덮은 나지막한 초가와 목동의 방목 아래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마소까지, 그리하여 이 마을을 찾은 객들이라면 하나 같이 입을 모아 지상 위의 화락천이라 평하곤 하였다.

“아아, 아름다운 내 고향, 이 얼마만의 귀가란 말인가!”

딸가닥딸가닥 말발굽 소리와 함께 안장에서 흔들거리고 있던 홍의는 손가락들을 입에 물고 크흡, 눈물 참는 소리를 내었다. 마을이 건네는 해사한 봄빛 인사에 곁을 따라 걷던 새옹도 기어이 탄성을 내지르고 만다.

“이야, 주군의 본가가 이토록 좋은 곳인 줄 알았다면 제가 진즉에 와 보는 거였습니다.”

“그래? 네 본가는 어디라고 했었지?”

“저는 북부에서 왔다고 아흔아홉 번은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대장부라면 시답잖은 것에 연연하지 마라.”

그래도 간만의 귀향이라고 들뜬 홍의는 이곳이 마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당산나무 사당이다, 저곳이 수수밭이다, 이쪽이 보리밭이다, 손수 자분자분 이르며 묻지도 않은 것을 설명하고 나섰다. 그러다 마침 새참을 하러 원두막에 모인 마을 사람들을 보고는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아이고 어르신들, 접니다! 홍의가 왔습니다! 하하하, 제가 다향원에서 나라 지키는 동안 다들 무고하였지요?”

대관절 무슨 소란인가 싶어 어리둥절하던 마을 어른들은 이내 소음의 주인공을 확인하고는 별안간 창백한 낯짝이 되었다. 사실 홍의가 어린 시절 더벅머리 휘날리며 마을 아이들을 선동하여 해 먹은 숱한 말썽은 마을 어른들에게 있어 일일이 기억하기도 싫은 악몽이었던 것이다. 어둑새벽부터 남의 집 문짝에 오줌을 지려 놓고, 곱게 키운 정원의 화초에 뒷간의 똥물을 길어다가 뒤엎은 뒤 냅다 튀고, 일 년 공들인 농사 망쳐 먹는 건 기본이었으며 깨 먹은 장독대 수도 헤아리다간 삼 일 밤낮을 꼴딱 새도 모자를 지경이었으니, 기실 마을 어른들에게 홍의는 호환마마보다도 무시무시한 손이었다.

천둥벌거숭이가 이리 장성하였으니 모두가 손뼉을 치며 반겨 줄 것이라 기대에 부풀었던 홍의는, 자신을 보자마자 걸음아 나 살려라 밭을 헤집으며 달아나는 어른들을 보고 차츰 민망한 손끝을 오므렸다.

“…하하, 저치들이 간만에 나를 보고 부끄러운 모양이지.”

“그렇게 믿는 편이 마음 편하시다면야.”

새옹은 고삐를 끌면서 혀를 끌끌 찼다.

“아 물론 내가 철모르던 때 하루가 달리 말썽을 피운 것은 사실이지만, 설마 이 나이 먹고서도 그러겠는가. 사람들 참 서운하게시리.”

“이성보다 본능이 앞설 때가 있는 것이지요. 저들도 다 살자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입만 열면 바른 소리, 얄미운 소리만 골라서 하는 새옹을 게슴츠레한 뱁새눈으로 째려보던 홍의가 문득 어울리지 않게 폭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쩌면 이제 와 벌을 받는 것인가….”

“…….”

“말 세워라. 걸어가련다.”

훌쩍 말에서 내려 타박타박 걷는 홍의의 눈시울이 안쓰럽게 촉촉하였다. 괜히 길섶에 난 들꽃을 득득 뽑아 쥐었다. 꽃 점이나 쳐 볼까. 태자는 도깨비다. 아니다. 호랑말코다. 아니다. 변태다. 변태다. 상변태다….

“어? 오라버니!”

그러는 사이 본가 앞에 당도한 줄도 몰랐다. 막 안마당으로 나오던 소의는 대문 앞에서 홍의를 발견하고는 맨발로 뛰어나와 덥석 오라비 품에 안겼다.

“하하. 소의야. 그간 별 탈 없이 잘 지냈느냐?”

“오라버니 오라버니, 뒷집의 시달이가 제 속곳을 훔쳐갔어요.”

“뭬야?”

“또 시달이가 저더러 못생긴 년이 성질만 사납다고 꿀밤까지 쥐어박았어요.”

“이런 시달, 그래서 넌 어찌했어?”

“쫓아가서 낭심을 확 걷어차 주었지요?”

“장하다. 오라버니가 누누이 이야기했지? 한 대를 맞으면 백 대를 때려 주라고. 불알 백 대 때렸어?”

“불알 백 대 때렸어요.”

‘불알 백 대 맞으면 죽습니다요….’ 곁에서 듣던 새옹이 자기도 모르게 아랫도리를 가리며 의좋은 오누이를 두렵다는 듯 바라보았다. 홍의는 못 본 새 훌쩍 자라 키대가 제 가슴께에 오는 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벙싯벙싯 웃고 있었다.

“헌데 오라버니, 기별도 없이 어인 출타여요? 얼굴은 왜 그리 멍이 들었고요?”

“으음… 소의야. 아버지는 어디 계시니?”

“아버지는 엊그제 도경에서 돌아오셔서는 어머니 산소 보러 가셨고, 슴복이랑 유모는 이 시간이면 노상 쇠 풀 먹이러 나가구. 그나저나 오라버니 오늘은 자고 가는 거예요? 제가 새로 깎은 인형을 보여 드릴까요?”

속도 모르고 조잘조잘 신이 난 누이동생을 보면서 홍의는 잠시 쓴 숨을 삼켰다. 미함의 하달을 따라 일단은 동백골에 피신을 오긴 왔으나, 기실 언제 군부의 병사들이 동리에 들이닥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미 홍의가 태자와 드잡이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궐내는 난리가 난 상태였다. 실제로 홍의는 주먹질은커녕 살차게 얻어맞기만 했으나, 태자의 혀를 깨물어 상해를 입힌 것은 사실이기에 딱히 나서서 호소하기도 애매하였다.

“오라버니, 얼굴에 멍이 든 것뿐 아니라 입술도 팅팅 부으셨어요.”

“…어?”

홍의는 일순 당황하여 손끝으로 자신의 입술을 눌렀다. 입술은 평소보다 뜨거웠다. 그 짧은 사이에 어찌나 세게 들비비고 빨아 대었는지, 손만 대어도 얼얼하고 살짝 피도 배어 나왔다. 입술이란 게 본디 붉은 색이라 티가 나지 않을 뿐, 혈음이 단단히 맺힌 것이다. 망연히 입술을 더듬던 홍의의 얼굴이 별안간 왈칵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첫 입맞춤이었다. 나이 스물여섯이 되도록 고이고이 아끼고 벼려 온 첫 입맞춤이었다. 핏물과 검댕으로 점철된, 첫 입맞춤이었다! 아직도 입안에는 태자의 혓바닥이 종횡무진 휘돌고 휘감고 휘적시던 감각이 생생하였다. 어쩌면 약에 취해 귀한 분 앞에서 파정했던 일보다, 그 입맞춤이 더 수치스러웠다.

‘…….’

창백한 낯빛으로 담담히 이쪽을 응시하던 태자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그 푸르른 천연석 같은 눈동자도. 당한 것은 나인데 어찌하여 당신께서 그런 눈을 한단 말인가. 소년의 무지처럼 말갛고도 먹먹한 눈빛이 떠올라 자꾸만 가슴이 불온하게 뛰면서 숨이 막혔다.

홍의는 얼른 고개를 세차게 저어 잡생각을 털어내었다.

“일단은 어머니 산소로 가 아버지부터 만나 뵈어야겠다.”

새옹과 홍의는 대충 조롱박에 담은 차가운 우물물로 목만 축이고 서둘러 다시 대문간을 나섰다. 미함이 곧 파발마를 보내올 것이니 그때까지만 어떻게든 견뎌 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막 어머니의 산소가 있는 언덕으로 들기 위해 마을의 중심가로 향하는데, 대관절 당산나무 아래 마을 사람들이 전부 모여서는 머리를 맞대고 웅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왜들 모여 계십니까?”

의아함을 느낀 새옹이 황급히 마을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아무개를 붙들고 물었다.

“궁에서 사람이 나왔다오.”

아무개는 건성으로 툭 대꾸하였다.

“궁에서 사람이라면… 저희 홍의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홍의 고놈 말고, 금성의 병사들이라오.”

“…….”

새옹이 경악에 찬 얼굴로 입을 쩍 벌리고 홍의를 돌아보았다. 새옹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표정으로 눈을 맞추던 홍의가 이내 식은땀을 흘리며 동구 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시커먼 사람 머리 떼가 위아래로 우쭐우쭐하는 것이 과연 지옥의 나락에서 마중을 온 저승사자들의 행렬 같았다.

긴 행렬은 마침 동구를 넘었다.

맨 앞줄에서 인솔을 맡은 화경은 양마에 앉은 채로 고삐를 잡아 세우더니 다들 별고 없이 잘 따라붙는가 살피려고 뒤를 돌아보았다. 각기 창과 목극을 들고 갑주를 찬 호위병 여덟이 짝을 지어 나란히 섰고, 그 뒤로는 거대한 몽근짐을 바리바리 얹은 노새가 세 마리, 또 그 뒤로 열두 명의 교군꾼이 매고 고아한 청익장을 드리운 화려한 연이 사방을 둘러싼 주종들의 호위를 받으며 느릿느릿 허공을 부린다.

휘황찬란한 연에 매달린 산호 구슬발이 흔들거렸다. 그 틈을 젖히며 조심스레 바깥을 살피는 물빛의 눈동자는 처음 보는 가경에 들떠 연신 말긋말긋하였다.

***

“어르신! 문성 어르신!”

마당쇠 슴복이가 바짓가랑이에 땀 차도록 달려오더니 숨 돌릴 틈도 없이 오두방정을 떨었다.

“태, 태자 전하께서 왔습니다, 금성의 태자 전하께서 우리 동백골에 오셨다니까요?”

오전 내내 안사람의 무덤가를 지키며 잡풀을 뜯고 있던 문성은, 대관절 태자의 출타 소식에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금성의 태자궁에 틀어박혀 늘 있는 듯 없는 듯 쥐 죽은 듯 살던 태자가 별안간 도경의 동쪽 끄트머리에 자리잡은 요 작은 촌구석까지 행차를 하였다니, 귀로 듣고도 기연가미연가할 일이었다. 까닭을 살피기도 전에 큼지막한 사달을 낌새챈 문성은 잡초를 뽑느라 지저분한 흙뭉치가 손톱에 들이낀 줄도 모르고 황급히 슴복을 따라 허위허위 산을 내렸다.

마침 마을의 중심지인 당산나무 사당에 도착하니 마을 사람들이 전원 양 갈래로 갈라져 길섶에 부복한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게 보였다. 길 한가운데에는 눈 돌아갈 만큼 거대하고 휘황찬란한 연이 화려한 위용을 드리우며 부려 있었고, 수십 명의 궁인들이 노새가 끄는 짐수레를 돌보고 있는 와중, 막 얼굴에 검은 면사를 들쓴 채 궁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가마를 내리는 태자 전하가 문성의 눈에 포착되었다.

문성은 아이고아이고, 하며 헐레벌떡 그 앞으로 달려가 양팔을 번쩍 들고 허공에 휙 뛰어올라 무릎으로 바닥을 쾅 내리찧으며 오체투지를 하였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

지천명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과도한 도가니 박치기를 보면서 태자는 고개만 갸웃하였다. 총총총 다가온 여비 옥지가 소곤소곤 귀엣말을 건넨다.

“문성 공이옵니다. 홍의 님의 부친이 되십니다.”

“…….”

머리를 조아린 채로 자웅눈을 뜨고 인중을 늘리며 태자의 반응을 살피던 문성은, 이윽고 면사 드리운 태자의 얼굴이 작게 한 번 끄덕여지는 장면을 확인하고는 후들후들 무릎을 펴고 간신히 일어섰다.

“태자 전하께서 옥체를 이끌고 이 좁고 탁한 촌마을에 친히 왕림하시어 주시니 높고 크신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헌데 미천한 소신이 예고를 접하지 못한 터라 감히 몸꼴이 엉망이온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문성이 안절부절못하자 태자는 고개를 한번 저었다. 옥지가 한발 나서 조곤조곤 일렀다.

“전하께서 순행 길에 오르셨다가 마을의 풍광에 감탄하여 지레 들러 본 것뿐이니 문성 공께서는 괘념치 말고 능히 고개를 들라 하십니다. 또한 아드님께 특별한 가르침을 받고 있어 항시 갸륵하고도 감사한 마음뿐이니 그 부친이신 문성 공께서도 사문의 아버지와 같다 하십니다.”

“예? 저, 전하께오서 우리 홍의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하셨사옵니까?”

그놈이 누군가에게 무얼 가르치고 그럴 수 있는 놈이 아닌데 그놈이…. 본 데 없는 소리에 미심쩍고도 황당해진 문성이 홀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옥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노새의 짐 둘 곳이 없으니 문성 공 댁으로 길을 잡자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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