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19화 (19/111)

#19

“저저저저희 집이라굽쇼…? 누옥에 어찌 황족을 감히….”

문성의 주름진 목가로 식은땀이 굴러떨어지건 말건, 태자는 천천히 마을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하였다. 태사혜를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노새가 방울을 울렸고 병사들이 척척 창검을 바닥에 찧었고 주종들이 종종걸음을 쳤고 깃발들은 펄럭거렸다. 장관도 그런 장관이 없어 마을 사람들은 실눈으로 훔쳐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아 니기럴 것, 홍의 이 쌍놈의 자식이 또 뭔 말썽을 피우고 다녔기에 저 낮도깨비 같은 인사가 이 촌구석까지 쫓아 들었나그래.’

문성은 손톱에 흙이 낀 줄도 모르고 연신 나달나달해지도록 물어뜯었다. 결국 아담한 사택에 도착한 주종들과 병사들이 힘을 모아 좁은 안뜰에 짐바리를 턱 턱 내려놓는데, 문성은 가솔들과 함께 구석탱이에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 태자는 난생처음 보는 민가의 모습이 설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였다. 소담한 안마당과 조그마한 화단과 빨간 열매가 달린 과실나무 한 그루, 마구간에서 온순한 눈망울을 맞춰 오는 조랑말 한 마리와 옆의 외양간 짚더미에 게으르게 누워 귀를 까뒤집고 잠이 든 암소까지, 두루 눈이 즐거웠다.

그러나.

태자가 문득 옥지의 옷소매를 툭 건드렸다. 옥지가 고새 상전의 뜻을 알아채고는 서둘러 문성에게 다가가 묻는다.

“홍의 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호, 홍의 말이오? 우리 홍의라면 지금 금성의 다향원에 있는데?”

문성이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라 옥지가 태자를 돌아보며 고개를 한 번 저었다. 그러자 태자는 잠자코 숨을 고르며 다시 한번 안뜰을 휘 둘러보았다.

이윽고 안마당 자투리에 소담히 놓인 장독대를 발견하고는 망설임 없이 그쪽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저자가 왜 저러는가 싶어 문성은 또 목이 바짝바짝 마르는데, 개중에 가장 크고 부한 독 앞에 멈춰선 태자는 묵묵히 양손으로 뚜껑을 잡아 들어 올렸다.

“…….”

“…….”

장독 안에는 뱁새눈을 한 홍의가 얌전히 몸을 옹송그린 채 태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빚은 다 갚았네!

문성은 전에 없이 싱글벙글하였다. 난데없는 횡재수에 살짝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지난 십 년간 발목에 채이던 빚을 모두 청산할 것을 생각하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이게 다 인정 많은 우리 태자 전하 덕분이지. 참으로 벽해의 복록이신 분이야, 암.’

신이 난 문성은 오후가 다 되도록 발싸심을 하면서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녔다. 마을 푸줏간으로 달려가 닭도 잡고 소도 잡고,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싱싱한 생고기를 수레에 가득 실어 가지고 돌아와 후원의 울타리 너머 한들에 피륙을 세우고 화덕을 둘러 솥을 걸었다. 마을 사람들이 앞다투어 가져다준 옥수수와 감자 따위의 주전부리로 간신히 끼니를 때웠던 병사들의 입꼬리가 금세 벌쭉해지고, 밥 짓고 국 끓이고 고기 굽는 냄새가 뽀얀 연기와 함께 온 마을에 퍼져 나갔다. 동백골에 태자가 행차하였다니, 옆 동리 사람들까지 전부 구경 삼아 넘어온 터라 고즈넉했던 산골 마을은 곧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홍의는 밤새 말달린지라 피로한 상태에서 대관절 태자의 등장으로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고, 바쁜 와중에도 아들 잡는 일은 게을리하지 않으시는 아버지 문성의 손에 뒤꼍으로 끌려가 댑싸리비로 흠씬 뚜드려 맞고 났더니 새삼 인생에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어머니, 평안하신가요? 어서 빨리 미륵보살로 내세에 들어 저를 구제해 주시지 않고요….’

안뜰에서는 새옹과 가솔들이 합심하여 황실 별고에서부터 실어 왔다는 보따리 속 각종 곡식과 비단을 나누는 중이었다. 하지만 홍의는 기쁘기는커녕 심히 불안하기만 했다. 어제 그토록 살벌하게 대립하여 다신 보지 않을 것처럼 틀어진 마당에 저 당치 않은 선물 보따리는 무어란 말인가? 이래서야 태자의 본심을 파악할 수 없으니 더욱 찜찜한 것이다.

“저기.”

뒤꼍의 우물가에서 상황을 관망하던 홍의는 마침 홀로 우물가로 다가오는 옥지를 보고 서둘러 손짓하였다.

“얘. 옥희야.”

“옥지입니다.”

“어어. 그래. 옥지야.”

옥지는 예의 무표정하고 창백한 낯빛으로 귀신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말씀하십시오.”

“하아…. 네 어찌 음전한 전하를 모시고 이런 외진 촌구석까지 왔단 말이냐? 그렇게 생각 없이 출타를 하였다가 행여 곤욕을 치르려고.”

그 곤욕의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홍의가 이리 물으니 옥지는 속으로 잠시 황망하였지만, 티 내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하였다.

“간밤에 친히 다향원을 찾으셨다가 처소에 홍의 님이 사라진 것을 알고 크게 격노하셨습니다. 해서 황후 마마께 알리지도 않고 황급히 가마를 꾸려 납시었습니다.”

헛숨을 들이키던 홍의가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전하께서, 그, 상처는 좀 어떠하시냐?”

사실 내내 걱정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홍의의 물음에 옥지가 빤히 올려다보았다.

“깨물린 혀의 상처를 여쭙는 것이라면, 피는 멎었으나 상태가 여전히 좋지 않으시어 엊저녁부터 타락죽으로 간신히 수라를 돌보고 계실 정도입니다.”

“…….”

결국 제 손으로 직접 족치기 위해 친히 이 먼 곳까지 행차한 것인가. 홍의의 식견으로는 그렇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한데 잔치가 벌어진 후원의 언덕배기를 잠시 구슬픈 눈빛으로 내다보던 홍의는, 곧 부엌으로 들어와 유모의 어깨 너머에서 자글자글 끓고 있는 보얀 쌀죽을 들여다보았다.

“소고기도 안 씹고 삼킬 수 있을 만큼 곱게 저며 넣어 주오.”

“하이고, 여부가 있소? 세상에나 네상에나, 내 살다 살다 우리 공자님 덕에 태자 전하 젓수실 죽을 다 쒀 보네 그래.”

유모의 설레발에 홍의는 웃는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오묘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미우나 고우나 이 나라의 황태자였다. 암만 밉고 못된 짓만 골라 하는 인사라도 먼 금성에서 예까지 찾아온 귀골을 감히 굶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모가 잠시 다른 화덕을 보러 간 사이 솥 앞에 선 홍의가 나무 주걱으로 죽을 휘휘 저었다. 정말이지, 할 수만 있다면 침이라도 칵 퉤 뱉고 싶었다.

“오라버니!”

마침 이쪽저쪽 연해 돌아다니며 마을 잔치를 즐기던 누이 소의가 부엌으로 달려와 홍의의 허리춤을 꽉 끌어안았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여동생의 애교에 내내 굳어 있던 홍의의 얼굴도 말랑말랑 풀어졌다.

“오라버니, 태자 전하는 어떤 분이어요?”

“응?”

“풍문으로는 태자 전하께서 오도깨비만큼이나 징그러운 흉한이라는 설이 돌던데, 그것이 참말이에요? 얼굴에 저리 쓰개를 두르고 계시니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고, 답답해 돌아가시겠어요.”

매사 궁금증이 넘치는 열다섯 살 소녀는 앵두 같은 입술을 까뒤집고 툴툴거렸다.

“오도깨비라.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무시무시한 분인 건 맞지. 암.”

홍의는 콧방귀를 뀌면서 죽을 연신 괴팍하게 휘저었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만 보았을 땐 전혀 그렇지 않던걸요?”

“그게 무슨 말이냐?”

“암만 얼굴을 가렸대도 알 수 있어요. 면사 밑으로 뻗은 목도 뽀얗고 길쭉한 것이 어찌나 곱던지요? 제가 생각하기로 태자께서 오도깨비에 흉한이란 소문은 다 헛것인 게 틀림없어요.”

하아. 홍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주걱도 내려놓고 제 여동생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여느 때와 진지하고 신중한 눈빛을 내었다.

“들어 보렴, 소의야. 오라비가 살아 보니 말이다. 눈 돌아갈 만큼 아름다운 겉껍질은 하등 소용없는 것이더라. 인간이라면 응당 몸의 아름다움만큼 마음도 아름다워야 제대로 된 인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 얼굴만 미청목수에 순홍치백이면 뭘 하겠니? 속에는 시커먼 검덕귀가 한 마리 들어앉은 것을.”

“허면 전하의 속에 검덕귀가 들어앉았다는 말씀이셔요?”

홍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 절대 전하의 곁에 가까이 가선 안 돼. 검덕귀 옮는다.”

홍의는 그렇게 단단히 못을 박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죽사발을 받쳐 들고 부엌을 나섰다. 안뜰에 나가 보니 마침 병사들과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곡식을 후원으로 옮기느라 정신없는 틈이었다. 태자는 소란한 와중 홀로 뒷짐 지고 서서 면사를 들쓴 채로 안뜰의 매실나무를 유유자적 구경하고 있었다.

홍의는 한 차례의 심호흡 후, 손에 든 쟁반을 조심스레 평상에 내려놓았다. 태자가 비스듬히 돌아보았다.

“전하께서 맨밥이나 육붙이는 저어하실 듯하여 따로 젓수실 죽을 마련했습니다. 궁인들의 끼니는 저희 아버지께서 양껏 챙길 터이니 심려치 마시고 때를 돌보십시오.”

“…그대가 직접 만든 것인가.”

“아닙니다. 저희 집 유모가 야문 손으로 정성을 담아 쑤어 낸 것….”

“안 먹어.”

태자는 귀동자 밥투정 부리듯 무심하게 고개를 휙 돌리고는 다시 매실나무를 응시할 따름이었다. 쟁반 위에 정갈히 담긴 소고기 죽과 윤기 도는 매실 장아찌가 평상 위에서 싸늘히 식어 가는 것을 응시하던 홍의의 미간에 순간적으로 주름이 와직 패였다.

“홍의.”

그때 태자가 여상하게 불렀다. 흠칫하던 홍의가 고개를 들었다.

“저곳은 뭐지?”

태자는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홍의는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별채이자 창고입니다. 살아생전 독서를 즐겼던 어머니의 서책들과 안 쓰는 유기나 농기구들을 쌓아둔 곳입니다.”

“…그래?”

다음 순간, 태자가 돌연히 저벅저벅 다가왔다. 검은 면사가 코앞에 불쑥 다가드니 놀란 홍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자는 홍의의 손목을 덥석 붙들고 휙 끌어당겼다.

덜그럭. 덜컥.

태자는 홍의를 끌고 별실 안으로 들어섰다. 경황없이 끌려든 홍의는 당황스러워 뒷걸음을 쳤다. 태자가 면사를 벗어 내렸다.

“…….”

“…….”

마른침이 넘어갔다. 조그맣게 난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너른 별실을 가득 채우기엔 역부족이어서 내부는 동굴처럼 어두웠다. 말간 얼굴을 드러낸 태자의 표정은 범상하기만 했다. 연한 하늘빛이었던 눈동자가 어두운 곳에서 보니 오묘한 청록색이 되어 있었다. 태자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강녕이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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