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20화 (20/111)

#20

예의 그 얼굴이다. 표정은 인형처럼 변화가 없는데, 입술만 무심히 움직거리는 얼굴. 홍의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태자의 화법이나 의식의 흐름은 도저히 짐작도 예상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어제부로 인정한 참이었기 때문이다.

“다신 날 안 볼 작정이었나.”

담담한 하문에 홍의가 잠시 망설이다 대꾸했다.

“예.”

“…….”

“아니, 정확히는, 황태자의 옥체에 해를 가했으니 살아남기 어려우리라 짐작했습니다.”

“…뻣뻣해.”

태자의 표정에 드디어 변화가 생겼다. 한쪽 입꼬리가 살며시 말린 것이다.

“애초에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으면 살려는 줬을 텐데.”

살짝 누그러진 분위기를 감지한 홍의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흘겼다.

“그 손이 발이 되도록 빈다는 것에, 전하의 옥경을 보듬는 일도 포함입니까?”

“그게 싫어 도망친 곳이 결국 너희 집 장독 안인가. 죽음을 각오했다는 놈치고 행적도 피난처도 참 볼만하군.”

“…다행입니다.”

뜬금없는 말에 태자가 말을 멈추었다. 홍의는 얼른 시선을 내리고 어물거렸다.

“아, 송구하옵니다. 그것이… 말씀을 온전히 잘 하시는 걸 보니 참으로 다행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실은 아까 옥지에게서 전하께오서 상처가 심하여 수라도 제때 못 챙기셨다는 말을 전해 들은 터라….”

말하면서도 참으로 민망스러웠다. 제 목덜미를 만졌다가 허공을 보았다가 헛기침을 두었다가, 홀로 민망해 어쩔 줄 모르는 홍의의 모습에, 태자는 살며시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직 아파.”

“…….”

허심탄회한 칙답에 홍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손을 앞으로 모았다.

“실은… 소신이 의학 공부도 얼마간 하였습니다. 상처를 좀 살펴보아도 되겠습니까?”

태자는 대답 대신 입을 조금 벌렸다. 홍의는 냉큼 곁에 붙어 매의 눈으로 집중하여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가뜩이나 별실 안이 어둡고 입 속은 더 어두운지라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망극하오나 전하, 혀를 살짝만….”

“…살짝만?”

“예, 살짝만… 내밀어 주십시오.”

태자는 이조차 순순히 내밀어 주었다. 붉게 젖어 반짝이는 태자의 선홍빛 혀에는 패인 자국과 함께 핏기가 어려 있었지만, 다행히 심하게 타져 피가 줄줄 흐르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아파 보였다. 심각하게. 엄청나게. 몹시도 말이다. 아까 죽을 거부하셨다고 속으로 열불을 뿜었던 게 도리어 죄송스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홍의는 제가 더 아픈 표정으로 온 얼굴을 오그렸다.

“…으, 많이 아프십니까?”

남의 혓바닥에 자신의 잇자국이 고스란히 박혀 있다니, 이 얼마나 민망스럽고 괴란쩍은 일인가 말이다. 홍의는 쓰라린 표정으로 한참 동안 태자의 혀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시선을 위로 올렸다. 어느덧 말갛게 가라앉아 푸른빛을 내는 태자의 두 눈이 무방비하게 깜빡거렸다. 마침 바깥의 해가 구름을 확 벗어났는가, 좁은 창에서 강한 햇살이 뚫고 들어오면서 반짝거리는 꽃 먼지가 는실난실 춤을 추며 팽그르르 돌았다. 햇살 머금은 태자의 눈동자가 다시 연한 물빛이 되었다. 그 안에 제 얼굴만이 가득 밀려들어 있어, 홍의는 잠시 멍해졌다. 태자는 어느덧 혀를 집어넣고는 길고 곧은 목을 바로 세웠다.

“망극해 보이네.”

태자가 중얼거렸다. 홍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태자를 바라보았다. …이르다 뿐이겠는가. 망극하고, 망극했다. 홍의는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참으로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음을 이제야 가슴 깊이 통감한 참이다. 아무튼 속내는 그러한데 막상 대답을 하려니 말이 나가질 않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지금,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것.

“흡.”

입술이 부딪쳐옴과 동시에 커다란 손에 양 뺨을 쥐어 잡혔다. 덜컥 놀란 홍의가 태자의 손목을 붙들었고, 그러는 새 제집 안방 찾듯 편안히 비집고 든 상대의 혀가 홍의의 혀를 부드럽게 조여 말았다.

츄웁, 쪽, 괴이한 마찰음이 잇달아 울렸다. 아물어가던 생채기가 다시 터졌는지 태자의 혀에서 쇠 맛이 났다. 홍의는 한 발 한 발 물러났고 태자는 몇 발 따라붙다 이내는 홍의의 허리를 바싹 끌어다 고정했다. 으읍, 음, 흐읍… 혀 밑을 간질이고 농탕치는 태자를 견디느라 자기도 모르게 신음하던 홍의가 다음 순간 숨을 크게 들이켰다. 촉, 하는 소리와 가볍게 떨어져 나간 태자가 코끝이 닿은 채로 속삭인 탓이다.

“물어봐. 또.”

“…전, 읍.”

그리고 다시 짓쳐 든 혀가 홍의의 혀를 감아서 끌고 갔다. 잘근, 날카로운 잇새에 한 번 씹혔다. 아파서 눈이 절로 꽉 감겼다. 입술과 혀를 동시에 자근, 자근, 완급을 조절하여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천천히 살살 씹어대는 턱이 느껴졌다. 홍의는 숨조차 쉬지 못하고 그저, 휘말렸다. 주르륵, 핏기 어린 침이 홍의의 턱을 타고 흘렀다. 태자는 각도를 틀어 그것을 핥아 올리고는 홍의의 입술에 작게 쪽 입을 맞췄다.

“아직 멀었어.”

“…….”

홍의는 뒤늦게, 참으로 어리석게도 지금에야, 황급히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가쁘게 차오른 뜨거운 숨결이 손바닥을 뜨끈뜨끈하게 적셨다. 그 작태가 재미있었는지 태자는 웃음기가 차오른 눈동자로 두고 보다, 이내 눈을 감고 홍의의 입 가린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태자가 다가들 때 꿈결처럼 펼쳐진 속눈썹이 확연히 시야에 들었다.

“그럼, 금성에서 보자.”

몸을 물린 태자는 이내 금관을 들어 올렸다. 검은 면사가 착 흔들리며 옥안을 감추었다. 뒤이어 굳게 닫혀있던 별실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리고, 오후의 쨍한 햇살이 물밀듯이 닥쳐들었다.

그렇게 태자가 별실을 나서고 나서야 홍의는 손을 내리고 참았던 숨을 봇물처럼 터뜨렸다.

“…지금 누가.”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몸으로 덤비는데…!”

***

까득까득까득.

까득까득까득.

대문간에 나란히 선 문성 홍의 부자의 엄지손톱 물어뜯는 소리가 대차게 골목을 울리고 있었다. 번듯한 마무리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평화가 깨어지면 사달이 등장하는 법이라, 잔치가 막 끝날 오후 무렵 문성의 사택으로 군우령과 신통 향선들이 들이닥쳤다.

황후의 명으로 태자 전하를 모시러 왔다는 군우령은 우람하고 기운찬 양마 위에 앉아 내내 시큰둥하였다. 신통의 향선들은 대저 도경에 있는 휘황찬란한 사가에서 나고 자라온지라, 여기저기 소똥 개똥이 즐비한 산골 마을의 풍경과 주민들이라고는 하나 같이 삼베옷에 초리 신은 가난뱅이인 꼴을 보고 마치 벌레라도 보는 양 냉정한 홀시의 눈을 치떴다.

‘요 망나니 망나니 불망나니 같은 자식아, 당최 무슨 난질을 벌였기에 태자 전하에 신통 가문 자제들에 군우령까지 이 촌구석으로 쫓아오게 만든 것이냐?’

‘하하, 아버지, 아무리 화가 나셨다고 하나뿐인 아들에게 불망나니가 뭡….’

복화술하듯 꾹 다물린 잇새로 자근자근 오고 가던 부자의 쑥덕공론은 아버지 문성의 오금 후리기로 황급히 갈무리가 되었다. 그렇게 홍의가 바닥에 무릎 꿇었을 무렵, 코앞으로 검은 태사신과 정복 자락들이 다가섰다.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팔짱 끼고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해운과 얼굴들이었다.

군부의 병사들은 다짜고짜 태자를 처음 동백골로 인솔해 왔던 병사들과 주종들, 화경과 옥지까지 전부 포박하여 굴비 두름처럼 포승줄을 줄줄이 매었다.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며 사색이 되는데, 홍의마저 꽁꽁 묶여 안장 위로 짐짝처럼 턱 하니 실리고 마는 것이다.

“오라버니!”

“주군!”

“이보시오! 그만두시오! 어찌 통보도 없이 차관의 자제를 이리 죄인 연행하듯 끌고 간단 말이오?”

소의와 새옹과 문성이 헐레벌떡 달려와 놀란 얼굴로 발을 굴렀다. 홍의는 자신이 포박되어 끌려간다는 사실보다 아까 문성에게 오금 맞은 여파가 더 커서 말안장에 빨랫감처럼 널려 걸린 채로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오인한 문성의 주름진 눈가에는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히었다.

‘기운 펄펄 넘치던 내 아들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정신 줄을 다 놓았나 그래, 그야말로 사달 사달 대사달이 난 게로구나.’

귀찮고 성가시다는 눈빛으로 그런 문성을 내려다보던 대윤은 곧 퉁명스레 일갈했다.

“문성 공도 어서 정복을 갖추고 입궐토록 하시오.”

그리고는 머잖은 곳에서 검은 면사 휘날리고 선 태자를 바라보았다.

“태자 전하, 황후 마마께서 일각이 여삼추로 기다리고 계시오니 어서 연에 오르시지요.”

“…….”

태자가 미동 없이 서 있기만 하자 대윤이 서둘러 다가가 그 면전에 섰다. 고개 숙여 읍을 올린 그는 착잡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로 나지막이 아뢰었다.

“전하, 부디 소장의 직주를 곡해 없이 굽어살피옵소서. 만백성의 본보기가 돼야 할 태자 전하께오서 이토록 이례 없는 월담을 하시어 황실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시니, 병상에 누우신 황제 폐하의 시름과 황후 마마의 근심이 날로 짙어 가옵니다.”

“…….”

“인간의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인 효행조차 모르는 군주가 어찌 만백성을 품고 금과옥조를 실현할 수 있겠나이까? 자식이 되어서 어찌 어버이의 은혜를 저버리고 이토록 참담한 사달을 자초한단 말이옵니까?”

묵묵히 서 있던 태자는 면사 안에서 싸늘히 미소 지었다. ‘황제 폐하의 시름’이라. 그것이 과연 황후의 정부인 대윤의 입으로 들먹이기에 가당한 말인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그 짝이었다. 그러나 대윤이 몰고 온 병사들과 향선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태자를 향해 혀를 차고 있으니, 여기서 그 점을 지적한들 무엇이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대윤 공.”

“예, 전하.”

“구취가 심하니 입 좀 다무세요.”

“…….”

“과붓집 개새끼도 아니고 어지간히 짖으셔야지.”

다 귀찮고 짜증스러워진 태자는 그리 일별하고 대윤을 지나쳐 곧바로 연에 올라 버렸다. 그 자리에 덩그마니 남은 대윤의 얼굴이 막 캐낸 고구마처럼 벌겋게 익어서는 어깨까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차마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인지라 마을 사람들이 동시에 입술을 짓깨물어 봤지만 그래도 참아지질 않아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뒤돌아서 눈을 감고 염불을 외웠다. 그러는 새 편하게 자리를 본 태자는 구슬발을 젖힌 뒤 저 멀리 말안장에 엎디어 축 늘어져 있는 홍의를 힐끔 확인했다. 그리고 교군꾼들을 향해 담담히 명을 내렸다.

“금성으로 돌아가자.”

“예,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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