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21화 (21/111)

#21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지고 달이 중천에 떠올랐다. 긴 행렬은 금세 동구를 빠져나와 동백산 어귀를 지났다. 캄캄한 밤하늘에 도렷도렷 박힌 별들이 은은한 빛을 내고 풀벌레 우는 소리 소연하게 흩어지는 가운데, 대윤의 송곳 같은 지휘 아래 연의 교군꾼들은 빠른 말의 속도를 따라잡겠답시고 그야말로 죽을 둥 살 둥 종종걸음 쳐야만 했다. 위아래로 거칠게 출렁이는 연 안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태자는 면사를 들쓴 채로 미동도 없었다. 태자의 연은 군부의 병사들이 전후좌우를 가로막은 채 철저히 호위하며 이동하는 중이었고, 마찬가지로 홍의를 태운 해운의 말도 신통 향선들이 사방을 감시하며 슬렁슬렁 동백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간신히 정신이 돌아온 홍의는 지난번 태자의 안장 위에서 부렸던 추태를 이번엔 그 동모형인 해운의 안장 위에서 부리는구나 싶어 좌우지간 심기가 굉장히 불편하였다. 해운은 제 팔 안에 갇힌 홍의를 멀뚱멀뚱 내려다보다가 홍의가 조금 불편해 보였는지 말의 고삐를 당겨 속도를 조금 늦춰 주겠다고 나섰다.

“야.”

“응?”

홍의가 눈을 부라리며 정수리로 해운의 단단한 가슴팍을 퍽퍽 밀었다.

“이거 안 풀어? 안 풀어?”

“…아버지의 명이라 어쩔 수 없다.”

“그래서 형님이 말하시는데 너 지금 개기냐?”

고작 세 살 많은 것 가지고 전부터 참 유세다 싶다. 해운이 헛기침을 하며 말없이 나아가자, 오히려 양옆에서 말 몰던 나머지 향선들이 가슴을 탕탕 치며 답답해 죽으려고 했다.

“이보게 해운, 어찌 한갓 홍의 놈에게 그리 쩔쩔맨단 말인가?”

“하잘것없는 칠별관 나부랭이가 분수도 모르고 나대는 것을 계속 두 눈 뜨고 봐줄 참인가? 확 밀어서 낙마를 시켜 버리게! 말발굽에 대가리 좀 까여 봐야 제 주제를 깨닫고 개개빌지!”

홍의가 눈에서 칼을 뿜으며 돌아보았다.

“닥쳐, 이 돼지 불알만도 못한 것들아.”

그에 사내들이 일제히 말안장에서 세 치쯤 뛰어오르며 악다구니를 쓰는데, 해운은 목소리를 낮춰 은근한 목소리를 건네 왔다.

“태자와 무슨 관계인가?”

홍의는 멈칫하다가 퉁을 놓았다.

“네놈이 알아 뭣 하게.”

어차피 홍의는 처음 태자가 동백골에 들이닥쳤던 순간부터, 아니 정확히 태자의 혀를 깨물었던 그때부터 이런 사달을 예감했다. 그리고 이 모든 사달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해운을 마주하니 그간 잊고 있던 분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해운은 여전히 빤지르르한 낯짝으로 해맑게 주절주절 떠들어 댈 따름이었다.

“아니, 내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말이야. 자네와 태자가 드잡이를 했다는 소문이 퍼진 지 하루도 안 되어, 이제는 자네와 태자가 야반도주했다는 설이 돌고 있으니 이 대체 무슨 상황인가 말일세.”

곧 금성에 당도하면 모든 진상이 밝혀지고 제 모가지도 똑 따일 텐데 구태여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홍의는 묵묵히 인상만 찌푸리고 있다가 이내 포박된 몸을 해운의 넓은 가슴팍에 기대었다.

“일각만 쉬게 해 주게. 내 어제 흠씬 고생을 하고 여태껏 눈도 제대로 못 붙였네.”

“…….”

킥.

잠시 말 없던 해운의 가슴께에서 어쩐지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울린 것도 그때다. 킥…? 슬슬 괴상한 낌새를 챈 홍의는 감겨 있던 눈꺼풀을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자네가 태자의 색신이 되었다더니 그게 참말이었군.”

“…….”

“의롭고 호남인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결국은 사내 좆 맛이 고파서 그리했나 봐?”

양옆에 말을 모는 향선들조차 하나같이 입꼬리를 째고 명백한 조소를 뿌리고 있었다. 사내들의 낮은 웃음소리와 비비 꼬인 시선이 양단에서 줄줄이 이어졌다. 홍의는 된서리를 맞은 기분에 숨을 멈추고 사내들을 노려보았다. 누가 같은 핏줄 아니랄까 봐, 이렇게 상대를 낮잡고 한갓 욕구 풀이의 대상으로 보는 듯한 말투는 태자의 구중에서도 몇 번이나 당해 본 것이었지만, 왜인지 그보다 몇 배는 더한 수오지심과 이질감이 밀려들어 참아 내기 역겨운 정도였다.

“그렇다면 내 좆 맛도 좀 봐 주지 그래? 자네의 훌륭한 정력제 덕분에 제법 튼실해졌는데.”

홍의의 관자놀이에 후끈한 숨결을 뿌리며 해운이 천천히 얼굴을 붙여 왔다.

“…그래?”

홍의가 씩 웃었다. 해운은 은밀한 기대감으로 후끈후끈 달뜬 눈빛을 하고는 홍의의 엉덩이에 대고 은근슬쩍 제 앞섶을 비비적거리기에 나섰다. 말안장이 덜컹덜컹 흔들리면서 맞닿은 상대의 알짬도 여과 없이 출렁였다. 홍의는 포승줄 매인 손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여서 뜨끈하고 도도록한 중심부에 조심스레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오호, 제법?”

홍의가 짓궂은 눈빛으로 속달거리자 해운이 야릇하게 미소 지었다.

“제법, 왜?”

“확실히 정력제의 효험이 빛을 발하는군. 내 이 훌륭한 물건을 어찌 해 줬으면 하는가?”

“아아, 어찌해 줄 수 있는데?”

불끈불끈 흥분이 용솟음을 치는지, 해운은 홍의의 귀를 빨기라도 할 것처럼 입술을 바싹 붙여 왔다. 홍의가 싱긋 웃었다.

“이렇게.”

홍의는 어금니까지 바득 사리문 채로 해운의 고환을 있는 힘껏 틀어쥐었다.

“끄아아악!”

해운은 닭 모가지 비트는 듯한 괴괴한 비명을 길게 뽑아내며 처참한 고통에 눈을 까뒤집었다. 기겁을 한 향선들은 혹여 해운의 고환 두 쪽이 바닥에 떨어지진 않았는가 말을 세우고 살펴보기 이르렀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놀란 날짐승들이 수풀에 숨어 있다가 화닥닥 날갯짓을 치고 오르자 거기에 또 놀란 사람들의 비명이 꽤액, 꽤액, 꽤액 연달아 고요한 숲을 줄달음쳤다.

“아이 씨, 대체 무슨 소란이냐!”

결국은 태자의 연을 지키던 군우령마저 뒤를 돌아보며 짜증스러운 호통을 내지르고 말았다. 연 안의 태자는 면사를 들쓴 채로 무표정하게 바깥 소음에 귀 기울였다. 머잖은 곳에서 홍의의 익숙하고도 휘황찬란한 쌍욕과 향선들의 연달은 비명 소리가 애달프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저런.”

나지막이 읊조린 붉은 입술이 어째 내뱉은 말과는 달리 뿌듯이 말려 올랐다.

***

황후는 머리의 타래도 잡아 올리지 않고 침의만을 걸친 채 허둥지둥 정당을 나섰다.

기겁을 한 시비들이 재빨리 겉옷을 들고 그 뒤를 쫓았다. 미끄러져 내리듯 댓돌을 밟고 안뜰까지 한달음에 날듯이 달려온 황후는, 막 황후궁의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던 태자를 발견하고는 외마디 고함을 내질렀다.

“여운아!”

평시 부르지 않던 아명까지 되뇌며 양팔을 가득 벌려 와락 아들을 끌어안았다. 아니, 태자보다 머리통 한 개는 작은 황후가 아들의 품속으로 안겨 들었다는 말이 정확할 테다. 황후는 태자의 어깻죽지에 이마를 비비고, 너른 등을 쓰다듬고, 손을 주물럭거리고,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 가시질 않아 같은 행동을 거듭했지만, 태자는 미동도 없이 곧게 서 있기만 하였다.

홍의는 흙바닥에 누에고치처럼 널브러져 그 모습을 관망하고 있었다. 온 사지가 꽁꽁 묶여 옴짝도 못 하는 지경에 그 애처로운 모자 상봉을 지켜보려니 심히 배알이 꼴렸다. 황후는 포옹으로 아들의 온기를 충분히 느꼈다고 생각한 이후에야 몸을 떼어 내더니, 이차 확인에 들어갔다. 하늘이 내린 귀한 옥체에 혹여 다친 곳은 없는지, 팔을 주무르고 무릎을 두드려 보고 면사 안까지 손을 쑥 집어넣어 이마까지 만져 보는 둥 아주 지랄이 풍년이었다.

“대체 어찌 그랬느냐? 궐 밖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곳인지 모르느냐? 아아, 이 어미 속이 말이 아니다. 속이 타다 못해 재가 되어 다 삭아 버렸다! 우리 착하고 의젓한 태자가 어찌 철없는 월담을 하여 이 어미의 애간장을 눅이고 가슴을 미어지게 한단 말이냐?”

황후는 가늘게 음성을 떨다가 결국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에 이르렀다. 옆에서 뱁새눈을 뜬 홍의조차 아들을 걱정하는 황후의 그 절절하고 지극한 마음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태자는 아까부터 어미에게 어떤 위로의 말이나 사죄의 말 한마디도 없이 목석처럼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홍의는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 상황이 몹시 흥미로워서, 여전히 누에고치 같은 모양새로 드러누워 양단을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그때 문득 황후의 풍성한 치맛자락이 홍의의 시야를 막아섰다.

‘이제 내 차례인가.’

어쨌든 황후 안전에서 이렇게 팔자 좋게 드러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홍의는 마른 침을 꼴깍인 후, 꽁꽁 오라진 채로 꿈틀거리며 간힘을 다해 상체를 일으키고 무릎을 꿇었다. 그때 붉은 손바닥이 날아들더니 관자놀이에 철썩, 불이 튀었다.

“…….”

여인네의 야들야들한 손바닥이라 심하게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기분은 확 상했다. 홍의가 황망한 눈을 깜빡이다 다시 고개를 들려는데,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손바닥이 날아왔다. 양팔을 결박당한 채라 결국은 중심을 잃고 모로 쓰러졌다. 그렇게 난데없이 따귀를 내갈긴 황후는 조금 전 제 아들을 대할 때와는 영 딴판인 얼굴로 표독스레 이를 갈았다.

“네놈이렷다.”

“…….”

“네놈이 사특한 재주와 박행으로 순진한 태자를 홀리어, 이 같은 사달을 자초하였겠다!”

얼뺨을 맞은 것보다는 그 사나운 말이 더 거친 낙뢰가 되어 정수리를 깨는 듯했다. 홍의는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오히려 입을 꾹 다물고 함구불언하였다. 사특한 재주로 태자를 홀렸다니, 대체 이 모자의 뻔뻔함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차라리 처음 색신의 명을 받았을 때 목 달아날 것을 감안하고 강경하게 거부했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 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뼛속까지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 찬 그들에게 있어 신통 가문이 아닌 인간은 오롯이 착취의 대상이며 본인들의 흉허물을 대체할 수단이자, 말귀를 알아먹으니 더 없이 유용한 한갓 소 돼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홍의가 계속 사죄하지 않자, 황후는 홍의를 밟아 죽일 기세로 분기탱천하여 소매를 걷어 올렸다. 태자의 모질고 폭력적인 성향이 아주 제 어미를 뺀 것이 외탁했나 보다고 홍의는 속으로 한탄했다. 어차피 죽음을 예견한 마당에 더 두려울 것도 없었다.

“어머님.”

그때 금빛 용이 새겨진 현곤 자락이 길게 휘날리며 홍의의 시야를 막았다. 손에는 금관에 둘린 면사가 쥐여 있었다.

“무얼 하는 게야?”

“어머님이야말로 무얼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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