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어서, 어서 면사를 도로 쓰지 못하겠느냐?”
행여 보는 눈은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황후는 목소리마저 떨고 있었다. 태자가 면사를 벗는 순간 알아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아 시야를 차단한 황후궁 시비들은 이런 부분에 잘 훈련이 되어 있었지만, 불안한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네 이년들! 당장 백 보 밖으로 물러나 빗장을 내리지 못할까!”
“예, 마마!”
이러한 와중에도 아들의 눈이 들킬까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라니, 홍의는 황망하여 헛숨을 삼켰다. 시비들과 위병들이 모두 물러나고 궁원에 단 세 사람만이 남자 태자는 쥐고 있던 황후의 손목을 놓았다. 한동안 고요한 침묵이 맴돌았다. 황후는 어느덧 평정을 되찾고 매서운 눈으로 아들을 쏘아보았다.
“내 너희 둘이 생잡이로 뒹굴었다기에 예감은 하였거늘, 설마 눈을 들킨 것이냐?”
그리고 태자와 홍의를 번갈아 보았다.
“네 이놈, 태자의 눈을 보았다가는 효수하겠노라 하던 나의 전언을 잊은 것이냐! 여운아, 말해 보아라. 저 삿되고 음험한 놈이 눈을 빌미 삼아 너를 겁박했느냐? 아니라면 대체 왜 저 사특한 놈을 지키고 섰느냐?”
그런데 대꾸 없이 마주 보는 태자의 눈빛 또한 황후에 못지않게 맵찼다.
“…저 아이의 무엇이 사특하다는 겁니까?”
내내 침묵하던 태자가 문득 물었다. 황후는 헛숨을 들이켰다.
“저놈이 천인공노하게도 태자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종국엔 함께 미쳐 돌아가 야반도주까지 저질렀다는 흉설이 이미 궐내에 파다한 터다!”
“태자는 도깨비다…. 태자는 홀로 자지도 못 세우는 고자다.”
순간 황후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태자는 무심한 남의 일인 양 본인의 숱한 추문들을 하나하나 읊어 내렸다.
“태자는 눈 돌아간 사팔뜨기에 귀신이 들렸으며, 태자는 심심하면 궁인들을 찔러 죽여 짐승처럼 내장을 가르는 게 일이거니와, 태자는 글자 하나 모르는 먹통에, 온몸에서는 고약한 악취가 나며….”
“여운아.”
“궐내에 떠도는 흉설이라면, 이것들을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까.”
오묘한 광채를 발하는 서슬 퍼런 눈동자와 희멀건 신색이 아뜩하였다. 곁눈질하던 홍의마저 소름이 돋아서 소피 보고 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네… 네가 어찌 그런 눈으로 어미를 본단 말이냐…?”
“…….”
“네가 무엇이 그리 분하고 억울하여 그토록 사나운 눈을 치뜨는 게야?”
당황스러운 마음에 눈물마저 그렁그렁한 황후는, 태자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들고 눈을 억지로 맞추며 열심히 서러움을 토로하고 나섰다. 평소의 냉철하고 지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뻘때추니 생짜 쓰듯 발을 동동 구르는 어머니의 모습에, 태자도 일순 마음이 복잡해졌는지 눈빛이 살짝 누그러졌다.
‘…약점 같은 것이로구나.’
홍의는 그제야 알았다. 황후가 스스로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 역으로 태자를 공격한다는 모순점을. 겪어 보니 태자도 보통내기가 아니어서 수틀리면 어머니고 뭐고 찜 쪄 먹으려고 들 성격이다. 그러다가도 어머니가 막상 감정에 호소해 연민에 기대면, 자식 된 도리로서 화가 슬슬 잦아들고 한 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저놈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나대어 기어이 성총을 흐렸구나! 내 저놈의 효수하여 황실모독죄에 대한 본보기로 삼으리라!”
왜 또 나야. 황후의 분기탱천한 외침에 식겁한 홍의가 여전히 드러누운 채로 몸을 뒤로 물리는데, 태자가 선뜻 말했다.
“그 소문은 와전된 것입니다.”
황후가 멈칫하여 돌아보았다.
“소자가 아끼는 매화 숲에 모여 노는 천것들의 작태가 꼴 보기 싫어, 베려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 홍의를 모욕하고 패악을 부렸습니다. 국본으로서 백성들 보기 부끄러운 처신으로 황실의 위신을 실추한 죄, 간명히 뉘우치고 있습니다.”
태자는 덤덤히 눈을 내리깔고 어머니를 향해 깍듯이 고하였다.
“또한, 이는 홍의와 저의 일일 뿐 소자를 인솔했던 궁인들은 아무 잘못이 없으니 당장 그들의 오라를 풀고 사면하여 주십시오.”
황후가 두 눈을 치켜떴다.
“허면, 어쨌거나 이 사달의 시초가 된 홍의를 이대로 용서하겠다는 말이냐? 그리하면 우리 황실의 위신이 바로 서기라도 한다는 것이냐,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벌을 내릴 것입니다.”
“…….”
태자가 똑바로 황후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홍의에게는 응당 그에 알맞은 처벌을 내릴 예정이니, 이는 모두 소자에게 일임하시고 어머님은 더 관여치 말아 주십시오.”
“…….”
냉정히 뇌까린 태자는 망연히 서 있는 황후를 뒤로하고 면사를 썼다. 그리고 내정을 굴러 달아나려는 홍의를 발로 턱 막아서 저지를 하고는 궁인들을 불러 포승을 풀게 하였다.
‘아닙니다, 황후 마마. 소인은 차라리 황후 마마께 벌을 받고 싶….’ 정정을 해야겠다며 도로 황후께 달려가려는 홍의의 몸뚱이를 병사 둘이서 나눠 지고 총총 나서니, 아침볕이 유난히 맑은 오월 하순이었다.
***
“다 치웠수?”
막사지기가 다가와 코를 호비작대며 물었다. 전신에 섶을 묻히고 갈퀴를 든 채 숨을 헐떡이던 홍의가 아스라이 고개를 들었다.
“개똥 다 치웠으면, 이제 목간을 시키쇼.”
“…목간까지 해야 되느냐?”
“목간 후에는 개털 빗질도 해야 되오. 예쁘게. 몸뚱이에 깨무는 것들 붙어 있는가도 꼼꼼히 살피셔야 하고. 좌우지간 전하께오서 검둥개들 일이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쓰시니 나중에 책잡힐 일은 애초에 삼가는 게 좋을 거요.”
막사지기와 여러 시종들이 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목통을 막사 한가운데 부려 왔고, 이어서 철창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우루루 쏟아지는 검둥개의 향연에 홍의는 바가지 하나 덜렁 든 채로 말을 잃었다.
태자궁의 너른 후원에는 검둥개를 모아둔 막사가 따로 있었다. 마구간보다야 못하지만 그래도 몹시 넓어 홀로 관리하기란 불가능했다. 매일 같이 바싹 마른 깨끗한 짚으로 개들의 잠자리를 갈고, 물그릇과 먹이 그릇을 채우고, 개들의 털을 고르고 건강 상태를 점검하는 궁인들을 따로 둘 정도라고 했다.
그리고 태자는 홍의에게 이 막사를 소제할 것을 명했다. 오롯이 혼자서. 위대하신 황태자 전하의 조잡한 실리주의와 이역만리 버금가는 뒤끝을 가늠하다, 날 샐 것 같아 관두었다.
‘…그래도.’
지켜준 것인가.
아까 태자가 나서지 않았다면 이렇게 사지 멀쩡히 목숨 부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혀 깨물린 사실을 불문에 붙여준 것이 제일 놀라웠다. 황후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자신의 머리는 지금쯤 군부 앞 꼬챙이에…. 그러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대체 왜였을까. 그때 태자 전하와 나는, 무엇 때문에 그리도 화가 나 군신 간에 체면도 도리도 잊은 채 서로 얼굴을 붉혔을까.’
홍의는 바가지를 옆구리에 끼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틀 전 매화 숲의 갈대밭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되짚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났다. 다른 이도 아닌 아버지를 모욕하던 말들, 돈만 주면 뭐든 다 파는 거지 같은 새끼라느니, 천박한 향선이라느니, 그 모든 비수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을 따르는 무동들 앞에서 번연히 꽂혀들었다는 사실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은자 닷 근을 내어줄 테니 물건을 빨아 보라던 마지막 말에는 오히려 웃음이 났다. 그런데 그렇게 듣는 이가 너덜너덜해지도록 잔인하고 난폭하게 상대를 물어뜯는 스물한 살 청년의 독 묻은 혀가, 지독하게 미운 반면 한편으로는 반짝 안쓰러웠다.
그때 그 사람은 지독하게 외로워 보였다. 향후 벽해 제국의 황제가 될 몸, 결핍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왔을 그의 삶이 이상할 만큼 쓰리게 눈에 밟혔다.
사나운 독설에 가려져 당시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던 말이 있었다. 태자는, 자신을 이용하든 말든 상관없다고 했다. 뒤에서 자신에 대해 뭐라 떠들든 신경 안 쓴다고 말했다.
‘…혹여, 내가 무동들을 붙들고 당신의 흉을 잡은 줄로 오해하신 건가?’
상황을 돌이켜보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한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홍의는 그제야 아차 싶어 스스로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짓깨문 잇새에서 침음이 절로 샜다. 그렇다면 응당 화내실 만하다. 실망하신 것도 당연하고.
‘…그럼 그 입맞춤은 뭐였을까.’
홍의는 손을 내려 입술을 어루만졌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열 받게 하는 상대에게 입맞춤을 내리는 희한한 취미라도 갖고 계신 걸까.
“…끄응. 그럴 리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에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결국 생각하기를 멈추려 머리를 홱홱 털었다.
***
개 팔자가 상팔자다. 의외로 목간을 좋아하는지, 벌써부터 벌러덩 배를 까뒤집고 대기 중인 녀석이 두엇 있었다.
“오냐, 받아라. 실컷 받아라.”
홍의는 퀭한 얼굴로 바가지에 물을 가득 퍼서 개들에게 촥촥 뿌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어째 개들이 낯선 홍의를 보고도 이를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유야 빤했다. 소제한답시고 개똥밭을 너무 굴렀더니 이제는 홍의가 개고 개가 홍의인 물아일체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홍의에게서 풍겨 나는 친밀하고 구수한 냄새에 개들은 한껏 경계를 풀고 꼬리를 치며 옷자락을 물고 늘어지는 둥 장난까지 걸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주둥이도 길어지고 몸에 털까지 돋겠는걸? 홍의는 후후 웃으며 사납게 물바가지 세례를 퍼부었다.
그렇게 네 마리째 열나게 닦이다 보니 허리가 살살 아팠다. 땀도 식힐 겸 뻐근한 몸을 곧추세웠다. 바가지 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고 잠시 먼눈을 던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쨍쨍했던 햇발이 어느덧 누릇누릇하게 익어 산등성이마다 가만사뿐 어려 있었다. 오후의 햇살을 담뿍이 받은 이마가 땀에 젖어 반짝였다.
그래도 한껏 몸을 움직이니 기분이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허리를 두들기며 주위를 둘러보던 홍의는, 마침 막사에 난 창으로 보이는 광경에 시선을 멈추었다. 태자궁 후원을 막는 담장 너머, 본 적 없던 궁터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아, 시조이신 진성황제께서 휴양을 목적으로 쓰셨다는 별궁이 바로 저곳이었구나.’
열성조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이제는 을씨년스러운 터만 남긴 그곳은 여기저기 솟구친 나무와 돌보지 않은 잡풀로 가리어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어쩐지 폐허는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스산하게 만드는 기운이 있다. 홍의는 문득 상반신으로 스미는 한기에 팔뚝을 붙들고 싹싹 비벼 대었다.
“…어, 추워.”
그러고 보니 전신이 흠뻑 젖어 있었다. 옷이 척척하게 달라붙어 살성이 고대로 드러나는 제 몸을 내려다보던 홍의는 자그맣게 욕설을 짓씹었다.
검둥개를 일단 미루고, 물에 젖은 가반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자꾸 쩍쩍 달라붙는 바지를 억지로 발목까지 끌어 내리자 근육이 번쩍이는 종아리가 드러났다. 허벅지를 덮는 장유 자락도 대충 말아서 다리속곳 사이에 끼웠다. 벽해국의 속곳은 앞만 간신히 가리는 형태라 통통한 엉덩이 두 짝이 훤하게 드러났으나, 별로 거리낄 게 없었다. 어차피 보는 눈이라고는 검둥개들뿐이었다.
물먹은 바지를 꾹꾹 쥐어짜서 탈탈 털고, 아무 기둥에나 걸쳐 놓았다. 그리고 다시 쭈그려 앉아 검둥개를 씻기기 시작했다.
온 몸뚱이가 다 시커먼데 배만 허연 것도 우습다. 의외로 무척 보들보들한 뱃가죽을 손으로 벅벅 문지르자 검둥개가 혀를 입귀로 쭉 빼고 헥헥거렸다. 그 모양이 꼭 사람 웃는 표정과 비슷하여서, 홍의도 덩달아 너털웃음이 났다.
“…뭐든 정돈된 것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나지막한 옥음이 어렴풋이 울렸다. 홍의는 깜짝 놀라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흐트러진 것도 나름 정취가 있군.”
놀리려는 기색이 다분한 어조였으나 표정이 무감하니 더욱 괴리하였다. 대체 언제부터 와 계셨던 걸까? 언제 어디서나 매끈한 꽃모습을 유지하는 미청년이 이윽고 목조난간을 딛고 기울였던 상체를 일으켰다. 입을 벌린 채로 황황히 눈만 깜박이던 홍의도 화들짝 일어섰다.
“태자 전하.”
황급히 읍을 올리는데, 숙인 시야로 헐벗은 제 아랫도리가 들었다.
“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