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23화 (23/111)

#23

그제야 제 꼬락서니를 상기한 홍의는 손바닥을 겹쳐 아랫도리를 가리고는 어디론가 숨으려다가 발밑에 깔린 바가지를 밟고 철푸덕 자빠지는 둥 홀로 오만법석을 떨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리저리 우왕좌왕하다 이내는 바가지 두 개를 찾아서 앞과 뒤를 착 가렸다.

“…….”

“…….”

묘하게 고요한 와중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나 같으면 가반부터 찾아 입을 텐데.”

상대의 작은 혼잣말에 홍의는 침음했다. 마침 꼭 같은 생각이 든 것이다. 기둥에 걸쳐 두었던 바지를 털어서 허겁지겁 발부터 집어넣었다. 하지만 여전히 축축하게 젖은 옷가지는 자꾸만 종아리에 달라붙었다. 민망함에 얼굴이 왈칵 달아오른다. 나름 벽해의 풍류 귀족이랍시고 항시 맨드리에 신경을 써왔는데, 귀하신 분 앞에 지푸라기 묻힌 꼬질꼬질한 몰골과 물에 젖은 생쥐 꼴을 봬드리려니 몹시도 우세스러웠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며, 나중엔 아주 허벅께에 걸린 허릿단을 붙들고 제자리에서 콩콩 뛰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손아귀에 팔목이 덥석 붙들렸다.

“왜 그래.”

“…예?”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냐고.”

“…….”

물인지 땀인지, 뺨으로 물방울이 구르는 느낌이 들었다. 태자가 묵묵히 어수를 내어 홍의의 이마를 쓸었다. 홍의의 눈빛이 한 차례 일렁였다. 젖은 머리칼을 쓸어 손끝에 걸더니 빠르지도 않게 귀 뒤로 거두어 준다.

난향이 짙었다. 얼을 쏙 빼앗길 만큼 아름다운 향기다. 그림쟁이의 혼일까, 홍의는 으레 사람을 관찰하는 버릇이 있었다. 해서 일면만 보고도 그 사람의 평소 생활 습관을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는데, 태자는 얼마간 결벽이 있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이런 이들은 대개 정돈된 것, 깔끔한 것에 집착한다기보다, 불청결함과 어지러운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경향이 강했다. 반짝반짝 닦인 마루의 반지라움에 안정을 느끼고, 새털처럼 보송하게 몸에 감기는 옷자락과 코끝을 떠도는 꽃향기, 흠결과 이탈 없이 일사불란 착착 정제된 것들 사이에 있기를 즐긴다. 하찮은 아랫것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두고 보지 못하고 선뜻 어수를 댄 일도 그러한 성향의 발로가 아닐까.

‘…그런 것이라 믿고 싶다.’

유리알처럼 영롱한 벽안이 적이 부담스러워, 홍의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큼큼 목청을 가다듬었다.

“…누추한 곳까지 어찌 납셨습니까.”

“추운가 봐, 입술이 자색이야.”

…누구 덕분이지요. 속으로 대거리하며 마저 바지를 끌어 올리려는데, 태자가 태사혜 신은 발로 홍의의 바짓가랑이를 밟았다. 그나마 무릎까지 간신히 올린 바지가 다시 발목께로 쑥 내려갔다. 홍의가 입을 떡 벌렸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태자는 무시하고 막사 너머를 향해 명했다.

“여기 마른 가반과 수긴을 가져 와라.”

“예, 전하.”

화경이 대답하는 소리가 울렸다. 여전히 바짓가랑이 사이를 팽팽히 누르는 힘에 발목에 차꼬라도 달린 양 쉬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젖은 거 그대로 입으면 감모 들잖아?”

“아, 알겠습니다, 알겠으니 일단 발을 치워주십시오. 소신이 알아서… 앗.”

발목이라도 빼 보려고 움직거리던 홍의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불식간에 태자의 어깨를 짚어 상체를 지탱한 잠시 그대로 머춤하다가, 눈만 떼구르르 굴려 상대를 보았다. 비스듬히 이쪽을 내려다보는 태자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크큼. 크흠.”

“…….”

문득 울리는 헛기침소리에 태자와 홍의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화경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린 채 명주 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수건을 빼앗듯 받아든 태자는 여전히 눈은 홍의를 쳐다보며, 화경을 향해 명했다.

“나가.”

“예, 전하!”

화경이 잽싸게 꽁무니를 뺐다.

차츰 홍의의 숨소리가 씨근씨근 북받쳤다. 얼굴이 불에 덴 듯 달아올라 있었다.

“…이조차 일종의 벌입니까?”

태자는 수건을 펼쳐 홍의의 발 맡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으며 나지막이 대꾸했다.

“아마도.”

무어라 말릴 새도 없이 보송한 수건이 발목을 감쌌다. 매일 같은 체련으로 알심이 단단한 종아리와 불거진 무릎을 꼼꼼히 오가며 물기를 훔치던 수건이 이내 허벅지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홍의는 자기도 모르게 태자의 어깨를 짚으며 숨을 삼켰다.

“벌려.”

홍의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고요히 되물었다.

“…왜요?”

어깨를 짚은 손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태자가 고개를 젖혀 상대를 보았다. 희한한 각도로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바싹 들어갔다.

“닦아 줄게.”

실팍한 허벅지에 바투 선 근육이 경련이라도 난 듯 세차게 우둔거렸다. 틈을 가르고 들어선 어수를 아까부터 꽉 죄고 있던 양 허벅지가, 천천히, 아주 조금 틈을 내어놓았다.

“…더.”

홍의가 고개를 저었다. 간신히 대답을 내어놓는 목소리가 목구멍으로 말려들듯 흐려졌다.

“싫습니다….”

뚝. 상의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떨어져 태자의 손등에 튀었다. 태자가 다시 올려다보았다.

“아무 짓도 안 해.”

“…….”

“진짜야.”

홍의는 조심스럽게 다리를 더 벌렸다. 여전히 발목에 채는 바짓가랑이 덕분에 이게 최대였다. 푹 숙인 시야로 태자의 미끈한 이마와 그 아래로 뻗은 날렵한 콧날이 보였다. 부드러운 수건이 이내 가장 깊고 습한 부근으로 파고들었다. 홍의의 몸이 휘청거렸다. 오금이 절로 곱으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하체의 모든 물기를 말끔히 거둔 태자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홍의가 물러나듯 바짓가랑이에서 발목을 빼고는 허둥지둥 마른 가반을 찾아 꿰어 입었다. 마침 돌아보는 태자의 눈에 붉게 달뜬 홍의의 귀가 들었다. 태자는 몹시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양 고개까지 살짝 옆으로 빼가며 흥미롭게 응시했다. 귓불 뒤의 쏙 팬 부분이 유달리 희고 보드라워 보였다.

‘…핥아보고 싶네.’

왜 쟤만 보면 자꾸 여기저기 건들고 싶지. 태자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였다.

마침 입성을 챙긴 홍의가 그제야 헛기침하며 슬슬 돌아보았다. 여전히 얼굴이 붉었다.

“…너 뭔가 기대했지.”

“아니요, 절대.”

그에 태자는 고개를 조금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한 번 웃은 뒤인 듯 입매가 한층 나른해 보였다.

“몸이 얼음장 같은데. 나머지는 종들을 불러 갈무리할 테니 그대는 그만 돌아가도 좋아.”

어느덧 태자는 방금 홍의를 닦인 수건으로 돌치를 마저 닦이고 있었다. 홍의는 어쩐지 개와 같은 취급을 받은 기분이 그제야 들어, 안색이 확 차분해졌다.

“…아닙니다. 소신에게 주어진 벌이니 끝까지 책임지고 마무리하겠습니다.”

태자가 돌아보았다. 이 사내가 오기를 부리는 것인가 싶어서였다. 홍의가 얼른 덧붙였다.

“합당한 벌을 회피할 만큼, 소신은 무책임하지 않습니다.”

“합당…?”

홍의 스스로가 이 벌을 합당하다 여긴다니, 태자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홍의는 망설이다 읊기 시작했다.

“감히 전하를 혀끝으로 능멸한 무동들의 작태를 방관한 점. 또 그 무동들을 감싸느라 전하의 처분에 반발한 점. 또 전하의 옥체를 훼손하여 국본을 흔든 점… 모두 가슴 깊이 깨우쳐 절절히 뉘우치는 바입니다.”

태자는 한참 말이 없다가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무동들의 작태를 방관했다’라….”

“…….”

“너는 그 상황에 가담치 않은 것을 피력하고 싶은 건가?”

홍의가 고개를 들어 태자를 바라보았다.

“방관이 곧 가담이야. 같잖은 말재간으로 어물쩍 넘어갈 생각 마.”

고요와 잘 어우러지는 목소리. 느릿느릿 열렸다가 살포시 다물리기를 반복하는 붉고도 촉촉한 입술을 어쩐지 집요히 바라보던 자신을 자각하고, 홍의는 퍼뜩 고개를 뒤로 물렸다. 이상하게 자꾸 더웠다. 지난번처럼 약을 먹은 것도 아닌데.

태자는 왜 그렇게 쳐다보느냐는 듯 궁금한 얼굴을 했다. 홍의는 어물거리다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 도저히 저를 용서할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글쎄.”

짧은 찰나 태자의 눈동자로 짓궂음이 스쳤다.

“만일 내가 널 용서한다면, 너는 내게 무얼 해 줄 거지?”

머춤하던 홍의는 이내 착잡하게 되물었다.

“신이 무얼 해 드려야만 전하의 성심이 풀리실까요?”

그에 잠시 곰곰궁리를 하듯 푸른 눈빛이 허공을 더듬었다. 홍의는 괜히 긴장이 되어 마른침을 삼켰다.

한참의 침묵 끝에 태자는 입을 열었다.

“명일 수업 날 말해 줄게.”

“…그냥 지금 말씀해 주실 순….”

“명일.”

“…….”

말을 만다.

그렇게 어찌 저찌 소제를 마치고 막사를 나서니, 어느덧 해거름이었다. 늦봄의 저녁바람이 제법 매서워 홍의가 이를 딱딱 부딪쳤다. 빨리 다향원으로 돌아가 처소 속 이불에서 몸을 지지고 싶었다. 홍의는 얼른 태자를 향하여 읍했다.

“전하, 허면 신은 하교하신 대로 명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덜덜 떠는 홍의를 빤히 쳐다보던 태자가 뒤쪽의 옥지를 향해 손짓했다. 그에 총총 달려오는 옥지의 손에는 담비 털 담요가 들려 있었다.

“다향원까지 걸어가면 한 식경이던가.”

“…소신의 걸음으로 일각이면 충분하옵니다.”

태자는 한 손으로 담요를 내밀었다. 잠시 망설이던 홍의가 이어서 곱실하며 두 손으로 담요를 받쳐 잡았다.

“황송하옵니다.”

온몸에 한기가 들어 이대로 두면 오한까지 올 것 같았다. 홍의는 객쩍은 줄도 모르고 얼른 담요를 펼쳐 냉큼 어깨에 둘렀다. 등허리까지 감싸오는 포근하고 보들보들한 감촉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말없이 지켜보던 태자가 이제 용건이 끝났다는 듯 본전을 향해 돌아섰다. 홍의가 자기도 모르게 앗, 했다.

“저, 전하!”

“…….”

태자가 돌아보았다. 앞장서던 옥지와 화경도 돌아보았다. 의문의 시선들이 동시다발로 쏠리자 홍의는 내밀었던 손끝을 고물거리며 잠시 몸 둘 바를 몰라 하였다.

태자가 눈치껏 옥지와 화경에게 고갯짓을 하여 주위를 싹 물렸다. 이윽고 넓고 화려한 후원에 단 둘만 남게 되었다.

“왜?”

“…….”

한참 망설이던 홍의가 눈을 들었다.

“저어, 참으로 망극하옵니다만…. 신이 전하께 한 가지 질문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뭔데.”

사실 줄곧 여쭙고 싶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아 삭여두었던 질문이었다.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잠시 머뭇대던 홍의가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의 눈에 비친 소신은, 정녕 천박한 향선이었습니까?”

“…….”

물어 놓고 홍의도 짧게 후회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영영 여쭐 수 없을 것이고, 그리 된다면 아마 더 후회할 것 같았다.

태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물 안에 사는 원숭이가 한 마리 있어.”

…웬 원숭이? 뜬금없는 소리에 홍의가 갸웃했다.

“좁고 더러운 우물 속에서 금관을 쓰고 떵떵거리는데…. 아무도 그 원숭이를 우러르지 않아. 왜냐면, 그곳은 아주 깊은 밑바닥이니까. 애초에 올려다볼 수가 없는 곳이거든.”

홍의가 경청하였다.

“그래서 금관을 쓴 원숭이는 혼자 오기가 나 울어. 허나 누구도 그 소리를 듣지는 못해. 바깥에 닿지 못한 소리는 사방을 막아선 벽을 돌고 돌아 결국 원숭이의 귀를 찔러. 그에 더 화가 난 원숭이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이를 갈며 외치지. ‘너희들은 천하다’고.”

“…….”

말말이 담담한 어조, 결결이 순연한 눈빛이 무지근한 바람을 따라 홍의에게 묻었다.

태자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숱 많은 속눈썹 아래 드리운 그늘이 서늘하고 고결했다. 누구의 손길도 믿지 않고, 닿지 않을 것 같았다. 그에 홍의는 또 깜빡 잊고 말았다. 그가 이 나라의 황태자라는 사실도, 이 고귀한 존재에게 함부로 손을 대는 일은 국법이 금한다는 사실도. 마지막 석양을 울컥 뿜은 태양이 기어이 서산으로 침잠했다. 삽시간에 주변이 어두워졌다.

“전하.”

홍의의 붉은 손이 천천히 올라와 태자의 뺨을 감쌌다. 태자의 표정이 굳었다.

“소신이 그 얘기 좀 아는데요…. 우물 속에 갇힌 그거.”

“…….”

“자기를 원숭이로 착각한 매였다고 합니다.”

홍의가 눈초리를 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날과 같은 웃음이었지만, 그날보다 더 환했다.

“좁은 우물을 벗어나려면 먼저 날개를 벼려야 할 일이지요. 하늘의 제왕이 되기 위한… 보다 너르고 높은 곳으로 날아오를 도약을 위한, 일련의 과정 말입니다.”

일순 아득한 곳을 보듯 태자의 동공이 흐려졌다. 물속처럼 먹먹하던 그의 귓가에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주 먼 곳으로부터 시작된, 심장의 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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