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다음 날 이경.
다행히 누구 하나 경치지 않고 태자와 홍의의 야반도주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금성을 돌던 소문도 잠잠해졌고, 황후도 이 일에 관해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하지만 홍의만은 여전히 좌불안석에 가시방석이었다. 전날 막사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널 용서한다면, 너는 내게 무얼 해 줄 거지?’
드릴 게 없었다. 진정 없었다. 또한 벽해 제국의 황태자가 가난뱅이 향선에 불과한 자신에게 어떤 물질적인 것을 요구할 리도 없지 않은가.
‘…이것으로 만족하시길 바라야지, 뭐.’
홍의는 미리 소맷부리에 챙겨온 물건을 상기하며 애써 불안함을 다스렸다.
태자궁 침전에 들자 이제는 익숙한 난향이 훅 끼쳐 들었다. 태자는 지난번처럼 침상에 앉아 있었다. 최대한 담담히 인사를 올린 홍의는 슬슬 눈치 보는 얼굴을 했다.
“그, 먼젓번의 상처는 괜찮으십니까?”
“어, 뭐. 이제 밥도 먹을 수 있고.”
“…다행입니다.”
“다행이지.”
“…….”
손가락이 절로 고물거렸다. 자꾸 빤하게 쳐다보는 표정도 그렇고 뽀얗게 맨발을 드러내고 침상 위에 눕듯이 앉은 자세도 그렇고, 눈 두기가 영 불편했다. 홍의는 연신 방중을 두리번거리고 챙겨 온 서책들을 들춰 보고 덥지도 않은데 손부채질을 했다.
“홍의야.”
태자가 가만히 이름을 부르는데, 어쩐지 귀청을 똑 때려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양반다리로 자세를 바꾸어 앉으며 손짓했다.
“이리 와서 앉아 봐.”
“…아, 아닙니다, 신은 저기 탁상이면 족합니다.”
홍의가 손사래까지 치며 과하게 거부하자 태자는 무언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괜찮으니 어서 앉으라고 채근하였다. 어쩐지 이전과 달라진 살가운 행동이 홍의의 불안함을 더욱 증폭시켰다.
어쨌거나 명을 거부할 수는 없어, 홍의는 태자의 침상 끝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사실 여기서 잔 적도 있으면서 이제 와 내숭이냐고 하면 더 받아칠 말도 없었다.
“…….”
“…….”
민망한 침묵이 흘렀다. 태자는 가까운 곳에 홍의가 놓이자 각 잡고 관찰하기 시작했다. 오롯한 시선이 적이 부담스러웠던 홍의는 슬금슬금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그때 태자가 불쑥 붙어 왔다. 홍의는 갓 낚은 생선마냥 퍼뜩 몸을 비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자는 홍의의 턱을 붙들어 앞으로 확 잡아당겼다.
“그대 입술에 무얼 바른 거야?”
“…예?”
고개가 꺾일 뻔한 자세를 유지하며 홍의는 황황히 되물었다. 참으로 뜬금없는 질문이지 않은가.
“사, 사내인 제가 입술에 무얼 바르다니요? 침밖에 더 발랐겠습니까?”
홍의가 되묻자 태자는 잠시 눈을 감더니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또 금세 눈을 뜨고는, 말긋말긋한 눈으로 뚫어져라 응시한다. 곤혹스러워진 홍의는 고개를 슬쩍 물렸다.
“향낭은 무얼 찼어?”
홍의는 잠자코 머릿속으로 허리춤에 매어 둔 향낭을 떠올려 보았다. 본디 사향은 독하고 코끝이 다 간지러워 별로 선호하지 않는 편이고, 대신 꽃 주머니를 만들어 차고 다니는 편이었다.
“향낭은, 신이 본래 작약 향을 좋아하며 말린 적작약을 많이 넣고 찔레를 소량 곁들여 담아 가지고 다닙니다만….”
“향이 참 곱다.”
“…….”
“이런 것도 색사에 영향을 미치는 건가?”
불안함은 현실이 되었다. 아까부터 녹녹하게 풀린 물빛의 눈동자가 적이 이상하고 야릇하였다. 태자는 마치 고소한 살코기를 코앞에 둔 들짐승처럼 잔뜩 구미가 동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스듬히 붙여 오는 얼굴이 수줍은 듯도 하고 나른한 듯도 했다. 당최 무슨 기대를 하는 건지, 여울지는 시냇물처럼 일렁일렁한 눈동자라니.
‘…선수 필승.’
머릿속에 번뜩 그런 말이 스쳤다. 홍의는 판을 뒤집기 위해 허겁지겁 소맷부리를 뒤져서 화집을 꺼내 들었다. 그에 태자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책의가 영 붉은 것이 아무래도.
“다, 다른 화공의 춘화집입니다.”
“…….”
“전하의 심미안을 고려하여 특별히 장안에서 가장 잘 팔리는 작품으로다 소신이 부리나케 준비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상대의 반응이 무척 심드렁했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덥석 낚아채리라 예상했건만, 자세의 미동조차 없이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안달이 난 홍의가 다짜고짜 춘화집을 펼쳐 들고 태자의 침상가로 다가가 눈앞에 들이대듯 펼쳐 주었다. 그래도 여전히 설미지근하다. 우락부락한 사내와 야들야들한 여인이 뒤엉킨 난잡한 그림을 무심한 눈동자로 훑어 살피던 태자가 이윽고 고개를 들어 홍의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흐린 것이 아무 감흥 없다 못해 영판 지루해 보였다.
“…흥분이 되지 않으십니까?”
태자는 시큰둥하게 어깨만 한 번 으쓱했다.
“소신은 본디 전하의 양기를 돋우기 위한 역할로서 내전에 든 것이니 오롯이 그 책무를 다할 뿐이옵니다. 자, 대충 보지 말고 좀 자세히 보소서. 이 춘화도에는 유달리 음기가 가득하니 어떤 사내라도 구미가 동하지 않고 못 배기는 법입니다.”
“난 그대가 그린 게 더 좋은데?”
“…언제는 제 그림이 형편없다면서요?”
“농이었는데.”
꾸깃. 책의를 구길 뻔했다. 홍의는 불쑥불쑥 솟구치는 짜증을 잠재우고는 다시 침착하게 입을 놀렸다.
“딴죽 그만두시고 한 번만 자세히 봐 주십시오. 이 그림을 보시고 전하가 혈기를 되찾아 양기가 바짝 오르신다면, 그때 제가 후궁들에게든 태자비께든 그 기쁘기 한량없는 소식을 전할 터이니 전하는 편안히 그분들과 함께 즐거웁고 화목한 양음의 조화를….”
“흐음.”
태자가 가볍게 상체를 일으키고는 홍의가 들고 있던 춘화집을 빼앗아 가만히 훑어보았다.
“감투거리.”
“…….”
태자가 그림 아래 적힌 제목을 나직이 읊었다. 사락사락 화첩이 계속 넘어갔다.
“말롱질.”
홍의가 헛기침을 했다.
“빗장거리.”
홍의가 괜히 사위를 둘레둘레 살폈다.
“순진한 낭주와 고약한 땡중이 대낮에 절간 뒤에서…?”
아, 잠시만요…. 홍의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슬쩍 춘화집을 거두려고 했다. 보지 않아도 그 민망한 화폭이 눈앞에 선했다.
“그대도 이런 자세를 해 본 적이 있나?”
태자가 대뜸 화첩을 펼치며 정녕 궁금한 낯으로 물어보았다. 말롱질이라고 하여, 발정 시기의 말들이 흘레붙듯 남녀가 등지고 방사를 나누는 장면을 자세히 묘사해 놓은 그림이었다.
“송구하지만 전하, 이것은 일단 나중에, 홀로 계실 때 보시는 것이 좋겠….”
애써 웃어 보이며 뺏으려 하는데 태자는 아랑곳없이 홍의의 손을 탁 쳐 내고는 연신 책장을 넘겼다.
“그대도 이처럼 사내에게 가랑이를 벌려본 적이 있어?”
이번에 내민 그림은 빗장거리였다. 적나라한 그림의 형상보다도 태자의 입에서 나온 질문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가랑이를 벌….”
홍의는 턱을 가슴까지 드리울 기세로 입을 벌린 채 굳어 있었다. 그 헛헛한 반응을 물끄러미 살피던 태자는 곧 고개를 주억였다.
“없나 보구나.”
무심히 중얼거리고는 춘화집을 바닥에 휙 내던진다. 홍의는 하얗게 불태운 얼굴로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춘화집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홍의야.”
태자는 어느덧 양반다리로 앉은 무릎에 팔꿈치를 딛고 턱을 괴고 있었다.
“너는 내 양물에 관심이 많지?”
“…….”
이건 또 무슨 당나귀 개밥 처먹는 소리일까. 홍의는 지나가던 염병쟁이 보듯 객심스럽단 얼굴을 하였다.
“왜, 지난번에 나 잠든 틈을 타 몰래 내 양물을 들여다보고 있었잖아.”
“…그것은 말입니다, 전하.”
이 오해는 반드시, 기필코 바로잡고 말리라는 다짐으로 홍의는 부들부들 웃어 보이며 태자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하도 주변에서 전하의 물건을 두고 안 선다 어쩐다 말이 많기에 실제 그러할는지 확인을 하려던 것뿐이옵니다. 하하, 관심이 많다니요 소신이 미치고 팔딱 뛰겠네요 정말.”
“확인?”
멈칫하던 태자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인시켜 줄게.”
턱으로 아래를 힐끗 가리킨다.
“네가 직접 세워 봐.”
홍의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대꾸했다.
“…싫은데요.”
“…….”
기 센 두 사내의 안광이 허공에서 빠지직 격돌했다.
“왜 싫은데?”
당신더러 싫다 한 것도 아니고 당신의 물건을 세워 주기 싫다 한 것일 뿐인데, 또 푸른 눈을 살벌하게 일렁이며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에 홍의는 잠시 침음을 삼켰다.
“나는 이따위 그림으론 서지 않아. 시각보다 육감에 더 반응하니까.”
“그래도 안 됩니다. 저 또한 전하께 방중 비사를 가르치는 스승의 자격으로 내전에 든 것이지, 전하와 배꼽을 맞추거나 베갯머리송사를 하려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태자의 입매가 비스듬히 말려 올라갔다. 평시 잘 웃지 않는 사람의 희소가치 있는 미소였거늘, 하필이면 비소라는 게 거슬렸다.
“가르쳐? 네가 날?”
“…….”
“총각인 네가 내게 무슨 방중술을 어찌 가르친다는 거지?”
그 질문에는 달리 대답할 말이 없어 이만 갈렸다. 홍의는 알량한 성의학서 몇 권 독파한 것 가지고 스승입네 어깨를 부풀렸던 스스로가 조금 머쓱하여 괜스레 미간을 찡그렸다.
“용서해 주는 대신, 무엇이든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
그 말에는 홍의도 멈칫했다.
“하자가 있는지 없는지, 그대가 직접 내 허리끈을 풀고 들여다봐도 좋아.”
태자는 비스듬히 등을 기대앉아서는 차분하게 약을 팔았다. 홍의는 그래도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정말, 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어.”
태자는 고운 눈망울로 홍의를 빤히 응시하며 별거 아니라는 양 깜빡깜빡하였다. 깜빡깜빡. 깜빡깜빡. 홍의도 따라서 눈을 한참 깜빡이다가 이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나중에 딴말 하시기 없습니다.”
“그래.”
태자는 스스럼없이 대꾸하면서 베개에 비스듬히 팔꿈치를 받치고 관자놀이를 괴었다. 어쩐지 눈동자도 표정도 모두 말갛기만 하여서 음탕한 분위기라고는 일절 없었다. 홍의는 연신 게슴츠레 뜬 눈으로 태자의 조막만 한 얼굴과 아랫도리를 번갈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침상 위로 무릎을 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