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26화 (26/111)

#26

“…….”

“…….”

탁상을 모자처럼 뒤집어쓴 사내의 등장에 녹빈은 한참을 벙벙하였다. 어쩐지 머리가 무겁다 싶었던 홍의가 고개를 옆으로 꺾어 탁상을 바닥에 떨구고는 씩씩거리며 침상으로 걸어가 녹빈을 밀쳐 내고 태자의 옷깃을 여몄다.

“감히 이분이 뉘신 줄 알고 천한 손을 함부로 대느냐!”

그러자 상황을 알 리 없는 녹빈이 삿대질을 하였다.

“네놈은 뭔데 갑자기 나타나서 훼방이야?”

“노오옴…? 아무리 본 데 없다 한들 이리 방자하단 말이냐! 내가 바로 이분의 색신이자 벽해국의….”

더 듣지도 않고 녹빈은 야차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놈이 어디서 바락바락 악을 쓰고 다 된 밥상에 숟가락을 얹으려 들어? 은자 한 근짜리 공자는 내 거야!”

“내 거? 이분이 뉘신지 알고 이거 저거 하느냐 이놈아!”

녹빈은 아직도 그 거대한 몸피로 태자를 깔고 앉은 채라서, 홧김에 소매를 걷어붙인 홍의가 냅다 녹빈의 어깨를 양손으로 퍽 밀었다.

헉 소리의 연속이었다. 꼭지가 돈 녹빈이 긴 손톱을 세우고는 다짜고짜 홍의의 머리를 잡아 뜯기 시작하는데, 부지불식간에 놀란 홍의가 눈을 까뒤집으며 꽤액 비명을 치고, 한데 놀란 태자가 허둥지둥 녹빈을 떼어 내고 홍의를 싸안아서 구석으로 피신하였다.

“허? 공자님?”

“…….”

“공자님은 지금 빈이보다 저런 비쩍 곯은 방아깨비 같은 놈이 더 좋다는 말씀이시어요?”

태자가 대답 없이 홍의를 꽉 끌어안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전히 열이 오른 홍의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네놈이 아무리 천지 분간을 못 하기로서니 이리 방종 방탕하게 군단 말이냐! 감히 이분이 누군지 알… 아고고!”

그러나 성질 더럽고 대쪽 같기로는 녹빈도 못잖은지라, 냉큼 커다란 손을 뻗어 다시 홍의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늘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분? 이분은 내 인생에 볕 들게 해 주실 천상에서 내려온 공자님이시다! 왜! 이놈이 어디서 색주가의 궁둥이 큰 형님도 몰라보고 겸상을 하려 들어?! 이 쌍불알만도 못한 놈, 너 오늘 제삿날인 줄 알아라!”

다시 꽤액꽤액 악을 지르며 얼키설키 이어지는 두 사내의 쌈박질에 몸으로 그 사이에 끼어들어 말리려던 태자가 결국 마구 날아오던 녹빈의 주먹에 퍽하고 귀뺨을 얻어맞았다. 그에 헉 하고 기함을 한 홍의가 서둘러 태자의 얼굴을 싸쥐었다.

“전하, 전하 괜찮으십니까?”

“…으응.”

“전하!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소신이 송구하옵니다, 어찌 전하의 용안에 저런 소도둑놈 같은… 즈언하!”

바깥에서 안절부절못하고 방관하던 화경이 결국 황급히 내실 문을 젖히고 방중에 들어섰을 땐, 부러진 탁상 다리와 반쯤 찢어져 나풀거리는 휘장과 떨어진 꽃병과… 그리고 얼얼한 볼을 움켜쥐고 고개를 끄덕이는 태자와 그런 태자를 끌어안고 전하를 부르짖는 홍의가 있었다.

“저, 전하라고…?”

녹빈은 그제야 사색이 되었다.

***

화경은 침상에서 녹빈을 끌어 내려 바닥에 무릎 꿇리고는 이놈 저놈 패 죽일 놈 쳐 죽일 놈 갖은 잡도리를 하였다. 노상 매어 차고 있는 보검을 잡아 뺐다가, 도로 넣었다가 반복하면서 말이다. 녹빈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생벼락이 친 것만 같았다. 저 은자 한 근짜리 꽃 공자가 알고 보니 이 나라의 황태자였다니, 그런 황태자의 성체에 언감생심 손을 대고 말았다니, 제 손과 태자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던 녹빈은 결국 손을 오그려 주먹을 쥐고는 그것을 덥썩 물고 황소울음 같은 소리를 움머어어 내지르기 시작하였다.

녹빈의 얼굴에 거무죽죽한 눈 화장이 화지의 먹물처럼 번졌다. 녹빈은 울며불며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고 또 빌었다. 그래도 분이 쉬이 풀리지 않은 화경은 씩씩거리다가 곧 침상 위의 태자를 보았다. 그런데 어쩐지 망극하여 이윽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태자의 양반다리로 앉은 한쪽 무릎 위에 거의 얹히다시피 올라탄 홍의가 손바닥으로 용안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태자는 은근슬쩍 그런 홍의의 허리에 뱀처럼 교묘히 팔을 감고는 장단 맞추어 연신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많이 아프십니까?”

“응.”

“어디가 아프십니까? 뺨이요? 저놈의 우락부락한 타작에 혹시 지난번 생채기가 또 터진 것은 아닙니까?”

“몰라. 아파.”

“망극하오나 전하, 구중을 열어 보여 주시겠습니까?”

저어하는 기색 없이 곧바로 입을 벌려 혀를 얼른 내밀어 주고는 코앞의 홍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었다. 화경은 십오 년째 태자를 모신 이래 저리 기껍고 신이 난 모습은 생전 처음 보았다. 한마디로 전혀 아파 뵈지 않으셨다.

“전하, 이 자는 어찌 처리할까요?”

보다 못한 화경이 곧 결심한 얼굴로 중한 용무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태자는 어떻게 하면 홍의를 더 오오래 제 품에 머무르게 할 수 있을지 궁리하느라 바빴다. 한참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태자가 이윽고 홍의의 어깨에 턱을 걸어 받치고는 묵묵히 명하였다.

“죽여.”

“…….”

“…….”

앞뒤 잘라먹은 기탄없는 살생 명령에 장본인인 녹빈뿐만 아니라 홍의도 잠시 얼어붙었다.

“예, 전하.”

화경은 저벅저벅 녹빈에게로 걸어가 이악스럽게 뒷덜미를 답삭 잡았다. 녹빈은 아이고 데이고, 발악을 하며 까부라졌다. 아직 분하고 망극한 기분이 가신 것은 아니었으나 어쩐지 그 모습이 처음 태자와 대면했던 날 협탁 속에서 혼비백산했던 제 모습과 겹치는 듯하여 홍의는 잠시 께름칙한 혼란에 사로잡혔다.

“전하,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도 아닌데 그리 쉬이 죽이라 하시는 것은….”

“내 눈의 비밀을 보았으니 후환이 될 수 있어.”

그에 묵묵하던 화경도 거들었다.

“더구나 전하의 용안에 손찌검까지 하였으니 이는 반역죄에 버금가는 중죄입니다.”

“아무래도 그렇지?”

“그러하옵니다.”

홍의는 갈수록 좌불안석이었다. 태자의 비밀을 본 것은 본인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뿐이랴, 틈만 나면 말대꾸를 하고 혀를 깨물어 곡기를 끊은 전적도 있다. 하지만 분별로 따지자면 태자의 말이 백번 옳았기에 섣불리 두둔을 나설 수도 없었다. 녹빈은 여전히 봉두난발한 머리칼을 휘저으며 이미 숨이 꺽꺽 넘어가고 있었다. 태자는 물끄러미 구경하였다.

‘저 사내는 우는 것조차 귀청 따갑고 무엄하구나.’

잔뜩 옹송그리고 덜덜 떠는 모습이 애잔하기도 하련만 태자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전하, 빈이 목숨 한 번 살려 주시어요, 예? 다 스러져 가는 초가삼간에 빈이만 바라보고 사는 노모가 계십니다요오!”

빤히 보던 태자가 문득 홍의의 어깨 뒤에 입과 코를 숨기고 눈만 뙤록뙤록 바깥으로 내밀었다. 낯가리는 중이었다.

“…네가 정말 장안에서 가장 높은 화대를 받느냐?”

“헉, 그, 그것은… 가장 높은 화대까지는 아니오나 그와 엇비슷한 값을….”

‘역시 공갈이었구나.’

태자가 짐짓 짜증스럽게 시선을 돌려 버리자 녹빈은 와락 사지를 뒤재비꼬며 울음에 박차를 가하였다. 한참 고민하던 홍의가 여전히 제 뒤에 숨은 태자를 향하여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고 조심조심 신하의 예로서 직언하기 시작했다.

“하오나 전하. 시비곡직을 세세히 따져 본다면, 애초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무고한 저자를 침전으로 끌어들이신 건 전하이지 않습니까?”

가만히 생각하던 태자가 이내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

“내가 저자에게 맞은 건 어찌할 건데? 그대도 저자에게 머리를 죄 뜯겼잖아.”

“물론 전하의 용안에 죽방을 꽂은 것은 죽어 마땅한 대역죄입니다. 소신도 머리채가 다 얼얼하옵니다. 허나 저자도 물정깨나 빠삭하고 세국에 이골이 난 듯한데, 이곳이 금성이고 전하의 침전이란 사실을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었더라면 섣불리 그런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주 칠푼이가 아닌 바에야 설마 제 턱주가리 밑에 칼부림 날 일을 섣불리 벌였겠습니까.”

“…….”

“전하께서 단단히 입막음만 하신다면 눈의 비밀로 인한 후환은 없으리라 예견되는바, 부디 제왕의 바른 조처로서 아둔한 백성에게 온정을 베푸시길 바랄 따름이옵니다.”

홍의의 잰 언변에 슬쩍 고개를 갸웃한 화경이 잠시 태자를 돌아보았다가 이내 흠칫하고 말았다. 태자는 마치 듣기 좋은 꽃노래에 취한 양 하염없이 홍의를 들여다보며 막연한 눈빛을 아롱아롱 흩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수에 걸려들었구나. 화경은 쓰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해.”

태자는 고분고분 나지막이 대꾸하고는 은근슬쩍 다시 홍의를 끌어안았다. 태자의 품에 반쯤 안기다시피 한 홍의는 그러거나 말거나 냉랭하게 녹빈을 쏘아보았다. 고새 돌아가는 상황을 주워듣고 언제 그렇게 대성통곡을 했냐는 듯 진창에서 피어난 연꽃처럼 화안해진 얼굴로 녹빈이 벙싯 입을 벌리는 꼴을 보니 또 괜히 고까운 것이 사실이었다.

‘약존약망(若存若亡)이라 했던가.’

있는 듯 마는 듯 존재하는 것. 차라리 없다고 해야 마땅한 목숨. 물론 칠별관 끄트럭이나마 귀족 가문의 장자인 홍의가 비천한 서민들의 삶을 골골이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만 조금 전 포달스러운 위세는 집어던지고 굽신굽신 머리를 조아리며 배알도 없이 구는 모습은 어쩐지 혀끝을 검쓰게 했고 눈에 날아든 모래알처럼 버석거리며 밟혔다.

“사내놈이 어찌 그런 일을 하느냐?”

야단야단을 하느라 몰랐던 알짬을 곰곰 뜯어보니 허우대가 참으로 말짱하였다. 녹빈을 모모이 뜯어보던 홍의가 이윽고 혀를 쯧쯧 찼다.

“다향원에 들어 처음에야 장작 패고 물 긷는 노릇이나 할지언정,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간 무동이 되어 나라에 큰 보탬이 될 수도 있을 터인데.”

녹빈은 육 척 오 촌 버금가는 장신에 기골도 장대하여 웬만한 장수 못잖은 풍모를 지니고 있으니 홍의는 더욱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과하게 치장한 떨잠을 파드득 들어 올린 녹빈은 옷고름 끝자락으로 눈 밑을 찍으며 넉살 좋게 웃었다.

“빈이는 그저 팔자에 맞게 살 따름이어요. 귀족 자제나 되어야 무동이 될 수 있는 법인데, 비천한 상놈이 다향원에 들었다가 난장이나 되우 처맞게요?”

“…….”

“도경의 색주가에서는 말입니다? 낫질하고 호미질하고 대패질해서 먹고 사는 놈들더러 천치 얼간이라 한다고요. 구멍은 뒀다 똥 누는 데만 쓰느냐면서 말예요. 귀족 나리들께서는 양자를 준답시고 상관에게 임신한 자기 아내까지 첩으로 갖다 바치는 마당에, 문자 속도 모르는 저희들이 패륜을 따질 처지인감요?”

아까 머리끄덩이를 쥐어뜯겼을 때도 느꼈지만 입 하나는 제대로 여문 놈이었다. 먹고 살려니,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을 구구절절 핑계도 좋았다. 홍의가 말문이 막혀 그냥 헛웃음이나 치고 말았다. 그사이 녹빈은 은근슬쩍 태자의 용안과 홍의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다가 슬그머니 꾐을 부리고 나섰다.

“빈이가 일자무식이라, 두 귀골의 뜨거운 애심을 못 알아보고 몹쓸 팔난봉을 부렸으니 참말 때려 죽여도 시원찮지 뭐예요? 이런 반푼이, 머저리!”

소도 때려잡을 주먹으로 스스로의 머리통을 퍽 퍽 쥐어박는 자학이 필요 이상으로 박력 넘쳤다. 태자와 화경이 묵묵히 바라보는데, 홍의만이 흠칫하였다.

“…애심이라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