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27화 (27/111)

#27

“아이고, 어찌 모르쇠를 잡으시나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이 바닥서 제법 궁둥이 큰 놈이어요. 도경에 모여 사는 귀족 나리들께서 합심하여 떼를 지어 박타는 현장에 끌려가 본 일이 한두 번인 줄 아셔요? 또 빈이를 불러내 연인의 질투를 유발하겠답시고 간질간질 일촌간장을 녹이는 연기를 해 보이라 명령하신 나리들도 적지 않고요.”

본디 음전하고 숫된 화경은 녹빈의 상스러운 화법에 화들짝 놀라면서도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마침 태자는 더듬더듬 홍의의 허리께를 지분거리다가 은근슬쩍 엉덩이 자락으로 손을 넣으려던 참이었는데,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오고 제가 지금 누구 품에 안기어 있는지를 깨달은 홍의가 기함을 하면서 태자에게서 벗어났다. 품에 있던 따끈한 체온이 사라지자 태자는 금세 확 시든 기분으로 눈빛을 가라앉혔다.

“굳이 설명하지 않으셔도 다 안답니다. 나리는 태자 전하의 요거인 게지요.”

녹빈은 한쪽 눈을 새침하게 찡긋하며 퉁퉁한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두 분께서 그리 홧홧하게 달아오르신 줄도 모르고 눈치 없는 제가 초를 쳤네요? 감히 낭군님의 몸에 손을 대고 속살까지 들여다본 빈이를 이리 용서하시고 구명을 해 주시다니, 과이연 열녀에 버금가고 사해와 같은 도량을 지닌 애첩이라 아니하지 아니할 수 없으십니다!”

“…화경.”

“예, 홍의 님.”

“칼 좀 빌려주게.”

“…….”

그렇게 홍의가 입으로 불물을 뿜으며 요란한 칼춤을 시작하는데, 한바탕 푸닥거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침상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태자는 이내 화경에게 귀엣말로 물었다.

‘저 녹빈이란 아이가 정녕 사내를 잘 녹일까.’

‘…소신은 그런 부분은 돌같이 하는지라 잘 모르옵니다.’

‘주어라.’

‘예?’

‘은자 한 근.’

‘…….’

‘앞으로 내가 저 아이에게 물어볼 것들이 아주 많구나.’

요란스러운 밤이었다. 뒤꼍의 돌치 깜치가 왕왕 짖어 대었다. 그렇게 칼부림을 피해 달아나는 녹빈과 그런 녹빈을 쫓는 홍의와 그런 그들을 빤히 바라보던 태자는, 무언가 잔뜩 애가 단 사람처럼 포단 이불을 싸매더니 얼굴까지 홀랑 뒤집어쓰고 말았다.

***

악몽은 불치병이었다. 오전 내내 대궁에서 황제의 문안을 갔다가 편전에 들러 재상 회의를 주관하고 돌아와서 잠시 오수에 들었는데, 부득불 그 꿈이 또다시 그녀의 단잠을 방해하고 나섰다.

황후 옥명은 섬돌을 밟고 안뜰에 내려 한참 동안 매작지근한 바람을 쐬었다. 어느덧 하절기에 접어든 돋을볕이 눈부셨다. 너른 황후궁 안뜰을 웅위하게 둘러싼 말채나무가 무성한 초록으로 뒤덮였고 곳곳에 아지랑이가 아른아른 춤을 추었다. 생명들의 외침, 그 오묘한 생기가 그녀의 삭신 마디마디로 스며들었다. 빛나는 눈동자에 삼단 같은 머리칼을 지녔던 봄처녀는 어딜 갔는지, 속절없고 물색없고 까마아득하였다.

한참 의미 없는 회한에 잠겨 들 무렵, 무성한 녹빛의 틈으로 붉은 것이 기웃거리기에 얼핏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보았다. 홍의가 붉은 정복 갖춘 채 힘없이 저축저축 정원을 걸어들고 있었다. 황후는 내심으로는 괘씸한 기분에 화증이 불쑥 차올랐지만, 서둘러 입 가장을 끌어 올리며 반색을 하였다.

“홍의가 왔구나. 슬슬 불볕이 기승을 부리니 내실에서 시원한 냉차를 마시자꾸나.”

“…….”

홍의는 불퉁한 들창눈을 떠 보였다. 꾸벅 읍을 올리고서도 더는 가까이 들지 않고 돌부리를 툭툭 걷어차며 딴 곳을 보고 입술을 한 움큼 내밀고 있는 꼴이 재작일에 귀뺨을 맞은 일에 대한 무언 시위인 듯했다. 정무의 안건에 추궁을 할 때마다 삐치고 토라져서 삼 일은 입을 닷 발 내밀고 다니던 문성 공의 아들이라니, 충분히 그럼직도 한 것이었다.

황후는 시비들을 닦달하여 집무실에 어여쁜 다과상을 보았다. 조청에 달게 졸인 행병과 색색의 꽃 모양을 한 화과, 석빙고에서 꺼내온 귀한 얼음을 잘게 바수어 동동 띄운 오미자차까지 놓여 있었다. 하지만 마주 앉은 상대가 황후인 바에야 홍의는 차를 마시는데도 울컥 체증이 돋는 듯하여 시종일관 먹는 둥 마는 둥 하였다. 연신 발씬 웃으며 홍의 먹는 모양을 낱낱이 살피고 드는 모습이 각 잡고 뻔뻔하게 구는 것 같아 더 속을 알 수 없었다.

“내가 듣기로 태자와 두 차례의 수업을 진행하였다고 하던데.”

올 것이 왔구나 싶어 홍의는 마주 잡고 있던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네가 보기에 태자의 상태가 어떠하더냐? 정녕 정모들의 말처럼 양기가 부실하여 성욕을 모르다시피 하더냐?”

홍의는 하마터면 황후와 눈을 지그시 맞추고 아련한 미소를 지을 뻔했다. 양기가 부실하여 성욕을 모르다시피…? 그것이 말일까 방구일까. 간밤에 보았던 방망이의 위용이 얼핏 뇌리를 스치는 듯하여 서둘러 고개를 휘저어 생각을 탁탁 털어 내었다.

“황후 마마의 명을 받자와 태자 전하의 상태를 지켜본바, 소신의 미욱한 소견으로는… 딱히 문제되는 부분은 없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딱히 문제 되는 부분이 없다고?”

“…전하께서 강건하신 듯합니다. 많이요.”

마지막 말에 힘을 주자 황후는 눈썹을 확 들어 올리며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영 믿기 힘들다는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태자가 차에 정력제를 탔다, 손가락 기술이 뜨르르하다, 불시에 입맞춤을 당했다, 구강 애무를 강요당했다, 남창까지 부르더라 등등, 지난했던 수업 과정을 미주알고주알 보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태자의 눈을 보았겠지.”

황후는 한숨 끝에 넌지시 말을 섞어 물었다. 순간 흠칫하여 눈치를 살피던 홍의가 망설이다 대꾸하였다.

“보았습니다.”

황후가 비스듬히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래.”

외탁한 것이 외모뿐만 아니었는지 웃는 모양까지 비슷하여서, 순간 황후의 얼굴 위에 태자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소인 입에 철근 달아 놨으니 따로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흠. 태자비도 모르는 것을 네가 보았다니 시름겹고 망극한 일이로구나.”

‘예. 저도 별로 보고 싶지 않았고요.’

어쩐지 먼젓번의 서슬은 간데없이, 황후는 화장기 없는 맨얼굴로 한숨이나 폭폭 쉬었다. 평소 진한 화장에 가려 있던 잔주름과 올긋볼긋한 기미가 점점이 드러나니 그녀도 결국 지체 높은 황후이기 전에 자나 깨나 아들 걱정으로 노심초사하는 어머니일 뿐이었다.

망설이던 홍의는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황후 마마. 이것은 몸의 문제라기보다 마음의 문제 같습니다.”

“마음의 문제라고?”

태자는 모욕 속에 살고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차단된 사람처럼 검고 칙칙한 쓰개를 드리웠대도 버젓이 달린 양쪽 귀로는 무분별한 악담이 곧이곧대로 흘러들었을 터다. 말은 씨앗처럼 잎을 틔우고 열매를 맺으며 자라났다. 그렇게 악담들이 쌓이고 쌓여 분출할 수 없는 분노가 되어 가슴에는 시커먼 허구렁이 패이고 종내는 발밑이 허물어지는 법이었다.

“마음이 열려야 비로소 몸도 열리는 것이고, 몸과 맘이 동시에 통하여야만 진정한 합일이랄 수 있는 것인데, 서로의 얼굴조차 모르고서야 누군들 화락할 수 있겠습니까?”

“…….”

“더구나 후궁들과 태자비께서 막연한 무섬증에 사로잡히시어 전하만 보면 혼비백산을 하고 두려움에 치를 떤다고 들었습니다. 소인 또한 전하의 본모습을 알기 전에는 그 안전에 서는 것조차 꺼려지고 설었사온데, 도깨비가 낭군인 줄 아는 그분들 심정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안건에 이르자 황후가 짐짓 홍의의 눈치를 보며 차마 눈을 맞추지 못하는 것이었다. 요상한 반응에 홍의는 의아해졌다.

“사실… 그 아이들이 태자와의 합방 날마다 혼비백산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단다.”

“다른 이유라니요?”

황후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오미자차를 쭉 들이키고는, 다시 또 머뭇대며 답을 하였다.

“그것이 참으로 망측하게도… 동방화촉의 당일, 태자가 방중에 뱀을 풀었단다.”

“…….”

“뱀뿐인 줄 아느냐? 도롱뇽에 개구리에 지네에… 해괴하지. 망측하지. 누구나 보고서 기겁을 할 만한 징그러운 것들은 모다 갖다 풀어 대니 어떤 여인이 침방을 지키고 앙버틸 수 있겠느냐?”

한참을 침묵하던 홍의가 진정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마이 아프시군요.”

황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별스럽고 특이한 아이지.”

대체 그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란 말인가. 까도 까도 끝이 없는 미친놈이었다. 홍의는 새삼 등줄기가 오싹하여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다면 태자 본인 스스로가 자신의 아녀자들을 몸소 거부한다는 말이 된다.

‘황후께서 아들을 발로 키우신 것 같아.’

홍의는 야무지게 확신하며 오미자차를 꿀꺽꿀꺽 삼켰다. 맛이 영 시금털털하였다.

“안 그래도 태자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태후께서 사사건건 태자의 허점을 잡지 못해 안달이거늘, 태자마저 그리 유별스럽고 엉뚱하게 구니 하루하루가 외줄 타기를 하는 심정이란다. 나는 앉으나 서나 태자 걱정뿐이건만, 어찌 그 아이는 청개구리처럼 반대로만 가려 하는지 원.”

황후는 둑 터진 것처럼 연신 한숨을 쏟으며 호소하였다. 가만히 듣던 홍의는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렸다.

‘오늘은 또 뉘 집 거름통에 빠졌다 온 게냐?’

어머니는 병으로 앓아눕기 전, 홍의가 해가 동산을 떠오를 무렵 집을 뛰쳐나가 서산에 질 무렵에나 돌아오면 미리 대어 놓은 목욕물을 등에 끼얹으며 저렇듯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검댕과 흙먼지 묻은 얼굴을 암팡지게 훔치고는 코까지 쏙 뽑아 주는 손길은 미끈하고 보드라웠다. 온 마을의 밭을 서리하여 갖가지 푸성귀를 한가득 안고 돌아올 적엔 성난 어머니와 아버지 손에 양쪽 귀를 하나씩 쥐어 잡혀 집집마다 찾아가 땀을 뻘뻘 흘리며 거푸 사과를 했다. 그리고 그렇게 혼쭐이 난 밤에는, 꼭 토라진 홍의를 품에 끌어다 놓고 밤새 등을 도닥여 주시곤 했다. 요 못 말리는 천둥벌거숭이야, 어디서 이런 말썽꾸러기가 나왔을꼬? 끝내 사랑스럽다는 듯 비비시던 볼, 그 애틋하고 뭉근한 온기.

어머니의 유언대로 그녀는 홍의의 가장 따스한 추억이 되었다. 그토록 충만한 사랑은 다신 없을 것이었다. 잠시 행복했던 옛 기억을 헤아리던 홍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조심스레 황후를 향해 직언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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