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28화 (28/111)

#28

“황후 마마. 마냥 내 새끼 미쁘다 오홉다 하는 것만이 참된 사랑의 방식은 아니지만, 너무 재우쳐 손안의 끄트럭으로 좌지우지하려 드는 것도 옳은 방식은 아닌 줄로 아옵니다.”

황후가 요연한 눈을 맞췄다.

“황후 마마께서 국모로서의 어짊과 아량으로 보다 공명정대하게 태자 전하를 대하신다면 모쪼록 많은 것이 바뀌지 않을까, 미욱한 소인의 작은 학망이옵니다.”

“…….”

한참을 말 없던 황후가 이내 한층 유한 눈빛을 하였다.

“네가 태자의 벗이 되어줄 수 있겠느냐?”

“…….”

애첩이 되기는 싫으니 벗쯤으로 해 둘까. 홍의는 곰곰이 셈을 하다가 썩 내키지는 않는다는 표정으로 예, 뭐, 하였다.

“태자는 얼뚱아기 시절부터 만인의 귀애는커녕 나틀 때까지 동무 하나 없이 자랐다. 나이에 비해 어설픈 구석이 있고 외곬인 면도 많으니 옥좌에 올라서도 네가 든든히 곁을 지켜 주면 좋겠구나.”

이 역시 내키지는 않았으나 황후께서 생긋생긋 웃어 가며 청하는 바에야 뭉뚱그려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참 입술을 깨물고 눈만 되록되록 굴리던 홍의가 곧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과 함께 답을 올리었다.

“명심하겠습니다.”

***

휘잇휘잇 휘파람새가 울었다. 매화가 다 떨어지고 매실이 빼곡히 달리기 시작한 매화 숲에 빙실처럼 시원한 그림자가 바람 타고 어룽어룽하였다. 군자목이라 불리는 나무로 빼곡한 이 궁원 깊은 곳에는 태자를 위해 황후가 특별히 지은 소담한 정자와 여운소라는 이름의 작은 연못이 있었다. 물과 정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정취이니, 그 앞에 서서 너울너울 흔들리는 물그림자를 응시하는 태자의 뽀얗고 해반드르르한 이마를 황금빛 실타래 같은 햇살이 어루만졌다.

태자는 거울이나 맑은 물 위에 비치는 스스로의 모습이 언제나 생면목처럼 낯설었다. 그래서 잠시도 눈길 두지 않고 언제나 금세 외면해 버리고는 했다. 실바람에 못이긴 여울물 위로 푸른 청옥 같은 눈동자가 깜빡깜빡하였다.

‘…뽑아 버릴까.’

천천히 손을 들어 뭉툭하게 다듬은 손톱으로 눈 밑을 어루만졌다. 들썽거리던 마음이 문득 무거운 명개처럼 고요하고 축축하게 가라앉았다.

“전하, 이제 정자로 오르시지요.”

마침 옥지가 곁으로 다가와 나지막이 고하였다. 태자는 문득 수면에 비치는 옥지를 응시하다가 물었다.

“내가 어찌 생겼느냐?”

“…예?”

상전의 난데없는 칙문에 당황한 옥지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옥지 네가 보기에 내 얼굴이 어떠한가 물었다.”

“…….”

“곱상한 향선 놈들이 틈만 나면 모여 앉아 보지도 않은 내 얼굴을 흉잡잖아. 그 아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그리 징그럽고 숭한가?”

차마 무어라 대답을 빼어 바쳐야 할지 몰라 옥지가 안절부절못하는데, 마침 매화 숲의 고요를 깨는 호도깝스러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껄껄껄, 껄꺼러껄.

녹빈이었다. 손가락 끄트머리로 입을 가리고 나머지 팔은 연신 가슴팍 언저리에서 흔들흔들하며 우람한 몸뚱이로 뛰어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태자와 옥지가 동시에 정색을 하고, 정자에 앉아 있던 화경이 기함을 하면서 칼을 빼 들려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쏜살처럼 날래게 태자의 코앞에 당도한 녹빈은 허옇게 가루 분칠이 일어난 얼굴을 태자의 면전에 바싹 들이밀고는 꺅꺅,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태자는 얼른 옥지의 등 뒤로 숨었다. 면사를 벗었을 때는 낯가림이 배로 심해지는 탓이었다.

“히야아, 오늘도 역시 전하의 미모는 침어낙안에 수화폐월이 따로 없으십니다, 그려! 밝은 곳에서 보니 또 또 고 뽀이얀 살결에 앵두 같은 입술을 아주 그냥 깍 깨물어 버리고 싶… 엥?”

입술을 매섭게 감쳐문 화경이 칼집으로 막고 밀어내자 영문을 모르는 녹빈이 덤벙하게 뜬 눈을 깜빡깜빡하였다. 옥지가 특유의 심드렁하고 빤한 시선으로 녹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말한 대로 미리 주안상을 봐 두었소. 이제 어찌하면 좋겠소?”

퉁명스러운 옥지의 질문에 녹빈이 앞장을 서서 정자로 걸어갔다. 과연 굳이 들여다보기도 전에 갓 조리한 갖가지 음식들의 향내가 물씬 풍겨 들었다. 작은 주안상이라기보다 교자상에 적합한 네모진 큰 상 위에는 소고기에 간장을 졸여 볶아 낸 장똑똑이와 쫄깃쫄깃 보드라운 돼지 맥적, 탱글탱글한 세발낙지와 짭조름한 맛조개를 한데 넣고 보글보글 끓여 낸 해물탕, 새콤달콤한 더덕 생채와 알록달록한 섞박지, 죽순 나물 무침 취나물 무침 시금치 무침, 그리고 계피와 당귀와 꿀을 섞어 담근 쌉싸름하고 달착지근한 계당주까지 앙그러지게 차려져 있었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한 녹빈이 교자상 머리맡에 서서는 우렁차게 박수치며 옥지의 야문 솜씨를 찬앙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옥지는 심드렁할 뿐이다.

“자, 이제 전하의 차례입니다. 빈이가 말씀 드린 대로 거문고는 챙겨 오셨겠지요?”

그러자 화경이 정자 기둥에 세워 놓았던 거문고를 옮겨 태자의 앞에 조심조심 내려놓았다. 짐짓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내려다보던 태자가 고개를 들어 녹빈을 바라보았다.

“정말 이 거문고를 타기만 하면 되느냐?”

“아이고 전하, 여길 한번 둘러보셔요. 이 아름답고 숭고한 매화 숲, 어여쁜 정자, 거기에 우리 곱디고운 깎은서방님의 장엄하고 멋스러운 거문고 연주까지 곁들인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에 화룡점정이라! 이 분위기라는 것은 말입니다. 흰말 궁둥이도 흑마 궁둥이로 뵈게 하는 법이고요? 천하박색도 천하절색으로 뵈게 하는 미약 같은 힘을 지녔다, 이 말이지비!”

태자는 가만히 손에 쥔 술대를 내려다보았다.

“허면 그 분위기라는 것에 취한 홍의가 정말로 내게 반할까.”

“말해 무엇 하나요.”

“반해서 옷고름도 풀어 주고 내 양물도 귀애하여 곱게 만져 줄까?”

“두말하면 입 아프지요. 고대로 자빠뜨리시어 쿵덕쿵덕 품방아를 찧으시면 된답니다.”

태자가 자리를 잡자 옥지는 자신의 키보다 월등히 큰 거문고를 번쩍 들어서 앉은 다리에 살뜰히 얹어 드렸다. 오랜만에 연주를 한다고 꼼꼼히 현도 뜯어 보고 괘도 짚어 보고 하는데, 악기에 집중하여 한껏 진지해진 태자의 모습이 몹시 귀태가 흐른다며 녹빈이 호들갑을 떨었다.

“하이고, 전하는 얼굴도 저리 고우신 분이 거문고까지 잘 타시다니, 어찌 저리 못하는 게 없으실까요?”

“당연한 말이오. 우리 전하께오서는 예악뿐만 아니라 사서에도 통달하시고 한번 본 것은 잘 잊지 않는 욀총을 타고나신 데다 몸 쓰는 일에도 탁월해 검무와 사예에도 두루 능통하시오.”

옥지가 숨 한 번 안 쉬고 상전 자랑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사이, 녹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자는 국본이고 국본의 빼어남은 나라의 자랑거리일진대, 어찌 민인들은 이 사실을 두고두고 몰랐을까? 백성들뿐만 아니라 기루에 모인 귀족들도 태자의 됨됨이가 허섭스레기에 지나지 않아 황실에 망신살이 뻗쳤다고 틈만 나면 한탄하곤 하였다. 다 늙어 기름진 얼굴들이 떠오르자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려는데, 마침 태자가 술대로 강하게 내리치듯 현을 긁었다. 모두가 이목을 집중했다. 딱딱거리는 소리와 현을 뜯어 내는 소리가 기묘하게 어우러지며 귓속이 탁 트이듯 시원해졌다. 황족의 악기라고 가장 질이 좋은 나무들을 선별해 오랜 세월 햇볕에 말려 앞뒷면을 삼은 울림통이 내는 소리는 절대 찢어지거나 나리는 일 없이 깊고 묵직했다.

그렇게 태자가 정자 끄트머리에 나붓이 앉아 비단 백포 휘날리며 다년간 벼려 온 연주의 기량을 뽐내는 사이, 정자 뒤꼍의 괴석 뒤로 자리를 옮긴 화경과 옥지도 어쩐지 흐뭇하여 서로를 마주 보았다. 녹빈은 홀로 양손을 마주 잡은 채 잔뜩 황홀감에 젖어 들었다.

그때였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매화 숲을 날아드는 붉은 나비가 있었다. 마침 바람 타고 노닐던 민들레 씨앗이 황금 솜털 같은 띠를 드리우고 반짝반짝 동실동실 허공을 휘돌았다. 그 해사한 광채를 가르며 장중하고 시원시원한 거문고 가락이 매화의 향기와 더불어 고아하게 퍼져 나갔다.

“…….”

“…….”

그런데 어쩐 일인가. 거문고 가락이 점차 느려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뚝 끊겨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사아아아- 보드랍고 촉촉한 바람이 일었다. 언덕을 타고 매화 숲을 지나 홍의를 휘감고 연못을 건드린 뒤 태자에게 몰씬 닿았다. 홍의가 계속 이쪽으로 걸어오는데, 그렇게 허공에서 눈이 맞는데, 붉은 정복 자락이 난분분히 나부끼고 오련한 햇살이 반짝이는데… 태자는 그만 술대 쥔 손을 내리고 아무려나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였다.

‘네가, 붉다.’

생애 첫사랑이었다.

‘봄처럼 빨갛다.’

검기만 하던 세상이 별안간 쏟는 빛발 아래 눈이 멀듯, 투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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