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여우비
녹빈은 오른쪽 다리를 잡쥐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커다란 괴석 뒤에 나란히 몸을 숨기고 있던 화경과 옥지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녹빈을 물끄러미 응시하였다. ‘쥐! 쥐!’ 녹빈이 무음의 아우성으로 제 다리를 가리키며 꺽꺽대고 있었다. 저러다가 큰 소리라도 내어 애써 갖춰 놓은 분위기가 깨어질까 염려한 화경은 곧 못마땅한 얼굴로 녹빈의 돌매 같은 장딴지를 주물러 주었다. 하도 살덩이가 단단하여 쉬이 주물러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흐응흐응 쌕쌕대는 콧소리가 심히 거슬렸다. 어느덧 녹빈의 쪽 찢어진 눈시울이 나른나른 풀리어 있었고 쫙 뻗어 올린 버선코 끝이 일자로 쭉 펴져 허공에서 파르르 떨고 있었다.
곁에서 심드렁히 응시하던 옥지가 문득 소매에서 반짇고리를 꺼내 뾰족이 잘 벼른 바늘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털이 소복한 녹빈의 종아리에 푹 찔러 넣었다.
-!
마침 정자 앞에 당도한 홍의가 어디선가 익숙한 돼지 멱따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리는 듯하여 흠칫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슨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못 들었는데.”
태자는 짐짓 모르쇠를 잡으며 가만히 올려다볼 따름이다.
“…….”
“…….”
잠시 말이 없는 순간이 이어졌다. 오늘따라 태자의 용태가 남달리 곱고 화려하였다. 창포물에 감은 듯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을 왼쪽으로 치우치게 가르마를 타 느슨하게 상투를 틀고 운작문을 세밀하게 양각한 금 상투관을 덧씌웠다. 유려하게 세공한 금이환이 귓불 밑에서 찰랑찰랑 반짝거렸고 학처럼 새하얀 비단에 금박 깃을 둔 백포가 어깨선을 따라 맵시 있게 흘러내렸다. 신비스러운 푸른 눈동자와 무릎에 놓인 거문고까지 더하니 그야말로 천상에서 하강한 젊은 신선이라, 홍의는 잠깐 시야가 다 아리딸딸하여 지긋이 미간에 힘을 주고 말았다.
태자의 아름다움은 강렬하였다. 아름다움이란 무릇 무엇을 더하거나 뺄 것 없이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숨탄것들을 홀리고 사로잡는 힘을 지녔다. 하지만 그가 뿜는 미색의 특별함은 비단 외모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깨닫지도 못한, 누구도 세공을 가하지 않은 천연의 보석 같은 순수함으로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랑을 깨달은 태자는, 사랑으로 더욱 아름다웠다. 젊은 사내의 육신에 드디어 홧홧한 피가 역류하듯 늘 희멀겠던 양 볼로 발그레한 생기가 돌았다. 푸른 눈동자는 더욱 촉촉하게 물빛을 발하였고, 언제나 굳게 꼭 잠겨 있던 입가는 달보드레한 미소의 끝이 녹아들어 있었다. 근처의 여운소 위로 늦바람 춘정이 애애하게 쏟아져 잔물결이 이는데, 그처럼 차갑게 굳어 있던 가슴도 괜스레 찌릿찌릿 저리고 얼얼하였다.
또한, 태자는 첫사랑이라 잘 몰랐다.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말랑말랑 폭신폭신하고 마냥 달떠 오르는 기분에 도취되어 스스로 인생 최대의 난제에 직면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대저 민인들이 노래하듯 사랑이란 누구에게나 난제였고 질곡이었고 수렁이었다. 아무것도 몰라 당돌하고 천진스러운 사내는 그 헤어 나올 수 없는 아귀 수라장으로 선뜻, 첫발을 떼었다.
“내가 그대와 마시려고 주안을 보았어.”
수줍지만 올차게 중얼거린 태자는 흡사 칭찬이라도 바라는 것처럼 물끄러미 응시하였다. 하지만 태자의 사랑스러운 임은 삐죽, 입매를 비틀어 올리더니 급기야 뱁새눈을 뜨고 태자를 흘기기에 이르렀다.
‘이분이 또 약을 파시려는 모양이구나.’
정자에 덩그마니 놓여 있는 교자상도 그렇거니와, 난데없는 거문고며 아까부터 도랑도랑 빤히 쳐다보는 태자까지 아무튼 모든 상황이 심히 거슬렸다. 홍의가 들창눈을 뜬 채 대놓고 미심쩍은 기색을 피력했다. 태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홍의를 끌어다가 꽃방석에 앉혔다. 그리고 일각 전 녹빈의 신신당부를 떠올렸다.
‘술 시중 들 아이가 따로 없으니 홍의 님더러 시중을 들라 하시어요. 큭큭큭… 아 좋네요…. 참 그리고 맞은편이 아니라 옆자리를 꿰차고 앉으셔요. 상에 팔꿈치를 괴고 턱선을 과시하여 은근하게 바라보시는 모습이야말로 남성미가 가장 부각되는 자세이니 꼭 기억해 두시고요?’
태자는 백포 자락을 양팔로 툭 쳐서 사뿐 들어 올리고는 그대로 홍의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홍의가 아련한 미소로 태자를 잠시 응시하였다. 태자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윽고 홍의는 읏차, 무릎을 꿇더니 방석에 올라앉은 채로 얼음 썰매 타듯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서 죽죽 교자상을 돌아 반대편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동선을 유심히 살피던 태자가 양반다리한 자세로 바닥을 짚으며 마찬가지로 죽죽 쫓아갔다. 한참을 그렇게 뱅글뱅글 교자상을 두고 앉은뱅이 강강수월래를 하다가 참다못한 홍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는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돌아보았다.
“이번엔 독이라도 타셨습니까? 같이 독배 들고 죽자는 것입니까? 전하 진짜 소신한테 왜 이러세요, 예?”
태자는 말간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였다.
“술 시중 들 아이가 없어서.”
“…예?”
“상이 너무 너른데 자리가 멀면 그대가 내 잔을 채울 때 불편할까 봐 그랬지.”
“…아, 그렇습니까.”
홍의가 한 음절 뚝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하며 뒷머리를 긁는 것을 보고 태자는 슬쩍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녹빈은 천재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홍의는 잠시 머뭇대다가 이내 총총총 교자상을 돌아 태자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태자는 짐짓 태연하고도 너그러운 상전의 표정으로 편안히 앉으라면서 홍의의 허벅지를 툭툭 건드렸다. 홍의가 다리를 풀고 양반다리를 하자 태자는 상 위의 다닥다닥 붙은 유기들을 얼마간 밀어내어 공간을 만들고는 그곳에 팔꿈치를 대고 관자놀이를 괸 채 녹빈의 당부를 철저히 이행 중이었다.
홍의는 뽀얀 옥잔에 갈색 계당주를 꼴꼴 따르면서도 연신 게슴츠레한 뱁새눈으로 옆자리를 살폈다. 아까부터 지근거리에서 팔자 좋게 퍼져서는 이상야릇한 자세로 사람 옆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는데 정말 몹시 짜증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계략의 냄새가 나는 것이다. 홍의는 두 잔에 가득 부은 계당주를 절대 먼저 들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전하. 소신이 잔을 쳤으니 어서 음미하여 보시지요.”
“왜?”
“왜냐니요…. 신하가 군주와 겸상을 하는 것도 망극한 일이거늘 어찌 소신이 전하보다 먼저 잔을 들 수 있겠습니까.”
“기미 안 해?”
“…….”
“시음은 원래 신하가 하는 거야. 괜찮아.”
억지를 쓰든 개나발을 불든 어떻게든 술부터 먹이고 보라는 녹빈의 당부를 곱새기면서, 태자는 뻔뻔하게 중얼거렸다. 위기였다. 손톱을 득득 물어뜯으며 안절부절못하던 홍의가 곧 큰맘 먹고 고개를 들었다.
“허면 건배를 하고 동시에 마시도록 하지요.”
“그래.”
태자는 코로 웃음이 새려는 것을 꾹 누르며 담담하게 대꾸하고는 넌짓 잔을 들었다. 술잔 밑을 받쳐 잡고 잔을 탁 부딪친 홍의가 상체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태자 술 넘기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아까 몰래 빼돌려 두었던 사발에 술을 쫄쫄쫄 버렸다. 그렇게 인중을 한껏 늘리고 집중하고 있는데, 홍의의 귀 옆으로 태자가 무표정한 얼굴을 슥 내민다.
“귀한 술을 버리네.”
“…….”
땡그랑. 당황하여 술잔을 놓치고 말았다. 태자는 홍의의 어깨에 턱을 걸고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 눈을 맞추고는 응? 하는 소리를 냈다. 홍의가 여전히 인중을 늘린 채로 게슴츠레 태자를 바라보며 손만 간닥간닥 움직여서 사발을 상 밑으로 밀어 증거 인멸을 하려는데, 마침 태자의 양손이 불쑥 홍의의 양 옆구리를 뚫고 나와 사발을 턱 집어 낸다. 어느덧 태자의 품에 등을 안기다시피한 홍의의 코앞으로 사약 그릇 같은 사발이 들이닥쳤다. 홍의는 거의 울먹거릴 기세로 입술을 감쳐물며 도리도리 고갯짓을 쳐 보았지만, 태자는 전에 없이 끌끌하게 속삭였다.
“태자의 명이다.”
“…….”
“마셔.”
사실 오늘은 약을 친 것도 아니고 단순한 계당주일 뿐이었다. 그런데 비에 젖은 풋병아리처럼 오들오들 떠는 홍의의 반응이 어지간히 귀여운 것이었다. 이게 태자의 귀애 방식이라는 것을 알 리 없는 홍의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입을 조금 벌렸다. 태자의 명이라니, 신하로서 받들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아기 새의 부리만큼이나 조붓하고 소심하게 벌어진 입 새로 사발이 닿더니 앞니에 따각 부딪쳤다. 홍의는 아기 놓는 산모처럼 태자의 양팔을 으스러져라 붙들고 온 얼굴을 찡그렸다. 입 안으로 흘러드는 계당주의 향취에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홍의는 지지 않았다. 최대한 목젖에 힘을 주고 술이 목구멍 안으로 흘러들지 않게끔 단단히 여민 뒤에 볼이 터져라 술을 머금고 간힘을 쓰며 버티었다. 이내 사발이 말끔히 비었다. 술은 여전히 홍의의 입 안에 담겨 있었다.
천천히 사발을 바닥에 내려둔 태자가 슬쩍 고개를 틀고 보니 홍의의 미어터지는 양 볼이 눈에 들었다. 도도록 빵빵하였다. 태자가 집게 손을 올려 홍의의 부풀어 오른 뺨을 살살 간질였다. 순간 뿝, 하는 요상한 소리와 함께 압력을 이기지 못한 술이 찍 하고 조금 뿜어 나왔다.
“하나… 둘….”
셋.
그와 동시에 태자는 가차 없이 홍의의 볼을 폭 찔렀다. 그에 반은 무지개 호선으로 세차게 쭉 뿜어내고, 반은 목구멍으로 꼴깍 삼켰다.
“괜찮아. 약 안 탔어.”
태자가 세상 해맑게 중얼거렸다. 홍의는 세상 해탈한 표정으로 턱에 술을 줄줄 흘리며 태자를 돌아보았다.
“그걸 왜 이제야 말씀하십니까…?”
“그대가 안 물어봤으니까.”
‘…한 대만 때리고 싶다. 거문고로 때리고 싶다.’
그렇게 한참을 등지고 끌어안은 자세에서 비스듬히 눈을 맞추며 전력을 살피는데, 태자가 문득 물었다.
“그대는 대저 술을 마시면 무얼 하고 놀아?”
“…예?”
“향선들이나 무동들과 어우러져 자주 술을 마실 거잖아. 그런 때는 다들 무얼 하면서 흥취를 돋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