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30화 (30/111)

#30

태자의 하문에 홍의는 잠시 술병을 내려놓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대저 중정의 유상곡수(流觴曲水)나 남천가의 누마루에서 즐기옵니다.”

유상곡수는 금성의 놀이터였다. 연회나 밤놀이가 있을 때 향선들과 귀족들이 모여 돌로 만든 구불구불한 도랑에 둘러앉아 술잔을 띄워 즐기곤 하였다. 종을 시켜 물을 흘려보내면 그 위에 동동 뜬 잔이 물줄기의 둘레를 따라 탁탁탁 흘러내렸다.

“그러다 잔이 멈추면, 그 앞에 앉은 사람이 벌주를 마시고 시를 한 수 읊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아 물론 그 신선놀음에 신통 향선들이 끼어들면 양상은 확 달라지곤 하지만요. 나 참, 옷 벗기 놀이라나 뭐라나… 징그러운 호색한들 같으니라고.”

홍의는 대놓고 이를 갈았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신통 가문의 표식인 검은 정복 차린 인사들이 하나 같이 속내도 그리 거무튀튀한지, 옷을 벗으라는 건 기본이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소피를 보라, 알몸으로 춤을 추어라, 개가 교접하는 흉내를 내어라 등등, 밝히는 것도 아주 가지각색이었다. 그 난잡스러움이 갈수록 도를 넘으니 본디 강강하고 끌끌한 성향의 정통 사람들은 그저 탄식할 따름이라, 귀골로서의 체신도 향선으로서의 도의도 몽땅 집어던진 귀족들의 난질이 모두 되바라진 신통 황후가 권세를 잡은 까닭이라고 밑도 끝도 없이 갖다 붙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호색한이 정확히 무슨 뜻이지?”

태자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홍의는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였다.

‘호색한들의 왕 같은 분께서 굳이 뜻을 물으시는구나.’

홍의는 평소보다 또랑또랑 눈을 맞추며 올차게 답을 올렸다.

“호색한이란 말입니다. 발정 난 수캐처럼 시도 때도 없이 들러붙으며 상대방의 아랫도리에 고추가 달렸건 복숭아가 달렸건 괘념치 않고 마구잡이로 들이밀고 보는 몰상식한 안하무인들을 이르는 것이랍니다.”

“그런 몰상식하고 이상한 놈들이 다 있구나.”

“…….”

태자는 홍의의 말을 자르고는 잔을 톡 털어 넣었다. 현자의 눈으로 물끄러미 응시하던 홍의가 슬슬 웃으며 몸을 뒤틀었다.

“아셨으면 이제 좀 떨어져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대답 없이 더 바싹 끌어안고는 뒷덜미에 얼굴을 묻는다. 와중에 엉덩이께를 단단하고 불룩한 것이 묵직하게 누르는 느낌이 들어서 위기감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우리도 할까.”

“…무, 무얼요?”

“옷 벗기 놀이.”

“…….”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던 홍의가 아차, 반색을 하며 젓가락을 집었다.

“참, 전하. 소신이 아직 안주를 안 드렸네요? 방금 잔 비우셨지요?”

“…아니, 괜찮….”

한사코 사양하려는 태자의 인중께로 잣과 깨와 된장으로 양념한 맥적이 턱하니 눌어붙었다.

“어이쿠, 자세가 요러하여 조준이 잘되질 않네요? 송구하옵니다?”

“…….”

아무래도 코가 간질간질한 것이 깨가 콧구멍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잠자코 콧김을 뿜어서 빼내고 있는데, 이번에는 들깨와 무친 죽순 나물이 왼쪽 눈꺼풀로 날아 박혔다. 태자가 인상을 찡그리며 소매로 얼굴을 닦아 내는 동안 홍의는 나머지 손으로 섞박지 국물을 떠서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 괴석 뒤에서 매의 눈으로 이를 관찰하던 옥지가 손수건을 들고 냅다 튀어나가려는 것을 녹빈과 화경이 허겁지겁 눌러 말리던, 그때였다.

별안간 적막한 사위를 뚫고 말발굽 박차는 소리가 딸가닥딸가닥 울려 퍼졌다. 놀란 태자와 홍의가 살펴보니 머잖은 곳에 준마를 탄 향선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태자와 홍의는 동시에 마주 보았다.

“면사, 면사 어디 있습니까?”

홍의가 다급히 묻자 태자가 뜨끔한 시선을 괴석 뒤에 던진다. 마찬가지로 당황한 화경과 옥지가 바위 위로 휘둥그레진 눈을 내밀고 손에 쥔 면사를 흔들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몸부터 굳는 법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연해 있던 태자의 몸이 돌연 확 끌어당겨졌다. 홍의가 태자의 손목을 붙들고 후다닥 돌계단을 내려 정자 밑 커다란 상수리나무 뒤의 농음으로 숨어들었다.

“뭐야? 아무도 없잖아?”

“노수, 정말 홍의가 이곳에 든 게 맞아?”

“그렇다니까, 그놈이 홀로 언덕배기를 넘어 매화 숲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내 눈으로 분명히 보았다고.”

신통 향선들이었다. 가문의 표식인 검은 정복을 갖춰 입고 정자 근처 여운소 앞에 말을 멈춘 그들이 연신 주변을 두리번대며 투덜거렸다.

홍의는 태자를 나무에 등 받치어 앉히고, 그 품에 웅크리듯 뺨을 붙인 뒤 숨을 죽였다. 태자는 제 다리 사이와 가슴팍에 바싹 닿은 홍의를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고요한 가운데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울려 나갈 것 같았다. 홍의의 머리맡에서는 햇살 냄새가 났고 옷깃에서는 은은한 작약 향이 풍겼다.

“빌어먹을, 지난번 앙갚음을 할 절호의 기회인 줄 알았더니!”

소중한 고환이 똑 따일 뻔한 동백산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해운은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맞은편에서 혀를 차던 노수가 팔짱을 끼고 말을 받았다.

“헌데, 해운. 홍의가 근래 들어 태자 전하와 각별한 듯한데, 섣불리 건드렸다가 경을 치면 어쩌려고 그래?”

“그래서 지금 나더러 태자의 눈치라도 보라는 건가? 태자는 어차피 끈 달린 망석중일 뿐이야. 우리 신통의 끄트러기일 뿐이라고!”

“…아니 그러면 그런 것이지 왜 소리는 지르고….”

옆에서 낄낄거리던 사염이 노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서게. 홍의 놈에게 고환이 쥐어뜯긴 것도 모자라, 해어화 연홍까지 뺏기게 되어 저러는 것이니.”

“연홍을 뺏기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노수 자네 몰랐는가? 해운이 요 며칠 연홍에게 온갖 패물과 장신구를 선물하면서 간을 보았는데 돌아온 것은 매몰찬 거절이었다네. 자기는 홍의를 연모하는 중이라 이것들은 받을 수가 없다나 뭐라나.”

“뭐야?”

놀란 것은 신통 향선들뿐만 아니라 겉귀로 훔쳐 듣던 홍의도 마찬가지였다. 연홍이 자신에게 연심을 품었으리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해끔한 미모와 낭창낭창한 몸매로 모든 향선들의 구애를 한 몸에 받는 그 연홍이가 자신을 왜…? 그렇다고 썩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라서 코밑을 쓱 닦고 있는데, 문득 뿌득, 하고 단단한 것끼리 눌려 짓이겨지는 소리가 났다.

태자가 저편의 향선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를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희고 편편한 볼로 악문 잇새가 고대로 태가 날 정도였다. 당황스러움에 눈만 깜빡이던 홍의가 자기도 모르에 양손으로 태자의 볼을 잡아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태자가 낮게 소리 죽여 뇌까렸다.

‘연홍이 누구야.’

홍의는 잠시 아연실색하였다. 무엇이 그리 분한지, 태자의 매섭게 떠들친 눈초리로 사나운 청록색 동공이 아스라이 흔들렸다.

“해서 홍의에게 어떻게 앙갚음을 할 참인데?”

“그놈이 더럽고 천잡한 가랑이로 태자를 사로잡았으니, 나도 몰래 올라타 재미를 봐야지?”

향선들이 동시에 박장대소하였다.

“아니, 나만 올라타면 그 천한 놈이 섭섭해하려나? 연무장에서 신통 향선들과 무동들을 죄 모아놓고 목줄을 채워 한바탕 회술레를 돌리는 건 어떤가?”

“하하, 그 흉물스러운 태자에게 똥구멍이나 대 주던 놈을 얻다 들이밀어? 그냥 둘이 접붙이고 즐기도록 놔두지그래?”

거기까지 들은 태자는 순간 모든 생각이 까물까물 사라졌다. 눈앞도 까무룩 잠겨 들었다. 조금 전 먹었던 술과 음식들이 뱃구레를 휘돌며 울렁울렁 곧이라도 역류할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홍의가 잠시 눈가장을 좁혔다. 마치 코앞의 태자가 분노로 온몸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이윽고 독 같은 살의에 잠기고, 다음 순간 잔잔하고 고요하게 어둠으로 침잠하는 광경을 순차대로 지켜보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홍의는 침착하게 태자를 불렀다.

‘전하.’

태자의 눈빛에 초점이 희미하였다.

‘…괜찮습니다.’

홍의가 다시 속삭이며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태자의 볼을 지분지분 쓸었다.

‘괜찮아요. 다 괜찮습니다.’

‘…….’

‘금세 지나갈 겁니다. 저따위 너절하고 비루한 뒷말질에 결코 꺼둘리지 마십시오.’

홍의는 한껏 다정해진 눈빛으로 태자의 볼을 쓸며 소곤소곤 위로하였다.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몹시 신중하고 부드러웠다. 그에 분노로 뿌옇게 잠기었던 태자의 푸른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조금씩 초점이 돌아왔다. 눈앞이 다시 선명해졌다. 차마 감당하기 벅찼던 분노가 소리 없이 흐너지고 어느 순간 반짝, 정신이 돌아온 듯하였다.

태자는 천천히 손을 들어 홍의의 뺨을 감쌌다. 손이 유난히 차가운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홍의는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

“…….”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년처럼 말간 얼굴을 비스듬히 튼 채 다가드는 태자를 어쩐지 밀어낼 수 없었다. 보드랍고 촉촉한 감촉으로 입술이 닿았다. 태자는 나머지 손으로 홍의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더 깊이, 더 간절하게 파고들었다. 속절없이 입이 벌어지고 뭉근한 혀가 밀려들었다. 곁의 자귀나무에 핀 야합화가 바람결에 흔들리며 아찔한 향기를 뿜어내었다.

“…잠깐. 정자에 저건 뭔가?”

한편, 말을 돌려 매화 숲을 나서려던 향선들은 커다란 거문고와 싸늘히 식어 가는 주안상을 발견했다. 노수는 황급히 말에서 내려 정자로 뛰어 올라가 상차림을 살펴보았다. 옥잔 두 개와 젓가락 두 벌이 놓여 있었다.

“홍의가 이곳에 왔다 간 것이 확실하네.”

“아직 이 근처에 있을 수도 있겠군.”

향선들이 잠시 눈짓을 주고받고는 천천히 말을 몰아 주변을 탐색하기에 이르렀다. 마침 정자 바로 아래에 면한 거대한 상수리나무가 썩 수상하였다. 해운이 눈을 가늘게 좁히고는 슬렁슬렁 그쪽으로 향하려던 찰나, 뒤쪽에서 난데없이 껄껄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일제히 놀란 향선들이 화들짝 뒤를 돌아보니 웬 시녀복을 갖춰 입은 사내가 우람한 팔뚝으로 앞뒤 박수 쩍쩍 쳐 가며 산보라도 나선 양 성큼성큼 매화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미… 미친 자가 아닌가?”

“사람이 맞긴 한 건가?”

“그러고 보니 연전에 매화 숲에 목매달아 죽은 사람이 있다던데….”

마지막 사염의 발언에 향선들이 일제히 마른침을 꿀꺽 넘기는데, 허허실실 숲 한복판을 가로지르던 사내가 돌연히 시허연 얼굴을 틀어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덜컹. 향선들이 고삐를 꽉 쥐었다. 새하얀 얼굴로 턱에 푸르스름한 수염을 치켜들며 향선들의 면면을 빤히 응시하던 사내는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이거 이거, 어여쁜 꽃 공자들이 무더기로 모여 있네? 빈이 주는 건가?”

사내는 더펄거리는 치맛말기를 귀찮다는 듯 돌덩이 같은 허벅께로 슥 끌어 올리고, 뿌득뿌득 목을 꺾어 풀었다. 째릿, 눈이 맞았다. 이윽고 외마디 우렛소리를 내지르며 성난 황소처럼 두두두 향선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에 혼비백산한 향선들이 괴성을 지르며 말달리고, 그렇게 희붐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아나는 향선들과 그 뒤를 쫓는 녹빈마저 작은 점으로 사라지고 난 후에야 옥지와 화경은 조심스럽게 괴석 뒤를 빠져나왔다.

화경이 주변에 또 보는 눈은 없는지 침착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도중, 옥지는 면사를 든 채 종종걸음으로 상수리나무로 향했다. 그늘로 들어서자 나무의 뒤편에 기대앉은 홍의와 태자의 옷자락이 흙바닥에서 붉고 하얗게 엉켜 있는 것이 보였다. 낮게 죽인 말소리도 투덕투덕 흘러나왔다.

‘아니, 왜 갑자기 젖꼭지를 만지십니까? 이런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그래?’

‘안 만졌어. 스친 거야.’

‘농담 따먹기나 하실래요? 당장 손을 빼지 않으시면 또 흠씬 깨물릴 줄 아십시오.’

‘…엉덩이에 손가락 넣어도 돼?’

‘아악, 더 안 됩니다!’

그리고 한참을 옥신각신하는지 끙끙거리는 소리와 퍽 때리고 딱 치는 소리가 심상찮게 울려 퍼졌다. 잠시 얼굴을 붉히며 안절부절못하던 옥지가 고대로 뒤를 돌아 발소리가 나지 않게 총총총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처녀 앞에서 못 하는 짓거리들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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