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새옹은 오늘도 감감무소식인 상관을 대신하여 무동들의 수련을 감독하고 오는 길이었다. 별도 달도 없이 유난히 어둡고 괴괴한 밤이었다.
‘앞으로 주군께서 부제 향선에 오를 날도 멀지 않았구나.’
사실 홍의는 권력에 영 시큰둥하고 타고나기를 무욕한 성정이라, 매번 위를 놓치고도 혼자만 태평한 구석이 있어 보고 있자면 울화가 턱턱 치밀곤 하였다. 주군이 그 모양이니 부관인 새옹이 더 악착같이 챙기고 닦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대로라면 원주는커녕 부제 향선 자리도 꿰차기 어려워 보였던 주군께서 뜻밖의 횡재수를 잡았다는 것이다. 이미 궐내에는 홍의가 황후의 양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 나가는 중이었고, 태자와 둘도 없는 지기가 되었다는 설까지 도는 터였다. 정통도 좋고 신통도 좋다. 새옹은 우리 주군께서 황후의 뒷배로 원주에 오른다면 만사 화평의 지름길이 열린 것과 다름없다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런데 막 다향원의 내정을 가로질러 연무장에 들어서던 참이었다. 별안간 좌우를 에워싼 사내들이 새옹의 양쪽 팔을 꽉 옥죄고 들었다. 그들은 모두 신통 가문의 표식인 검은 무동복을 갖춰 입고 있어, 대충 면면을 살펴보아도 신통 향선들의 끄나풀들이 틀림없었다. 혼자 몸으로 반항을 해 봐야 무용한 일이었음을 깨달은 새옹은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는 말을 주워섬기며 묵묵히 그들이 이끄는 대로 벽선각 뒤뜰로 끌려 들어갔다.
벽선각 뒷마당에는 열댓 명의 해어화 무리와 각기 횃불을 들고 시립한 무동들이 동그랗게 원진을 짜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서 신통 가문의 검은 정복을 갖춰 입은 향선들이 하나둘 튀어나왔다. 마침 석계에 한량처럼 주저앉아 실없이 사과를 던졌다가 받았다가 반복하던 부제 향선 해운이 물끄러미 새옹에게 눈길을 주었다. 진땀이 흘렀다. 안 그래도 군우령의 적자이자 황후의 장자인 해운의 안전에 서면 누구라도 그 기세에 눌려 주눅이 들기 마련인데, 덜미잡이로 끌려와 무릎까지 꿇린 새옹은 오죽 그러했으랴.
‘그래 봤자 해운은 고자다. 해운은 고자다. 해운은 고자다….’
새옹은 두려움을 떨치기 위하여 잠시 속으로 염불을 외웠다. 그러자 정말 맘이 한결 가뿐해졌다. 홍의의 설명에 따르면 해운은 어릴 때부터 옥자둥이 귀동자로 자라나 개차반인 성정에 반해 은근히 틈도 많고 허술한 편이라고 했다. 미인과 선물에 약하다던가. 문제는 새옹은 외모도 평범한 편이고 뇌물질을 할 만한 고가의 물건도 쥐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지만 말이다.
해운이 무동들에게 턱짓을 했다. 뒤에 잠자코 서 있던 무동들이 시허연 횟가루가 든 동이를 바닥에 묵직하게 내려놓았다. 그에 새옹의 쓰리게 입술을 물고 이런, 빌어먹을, 하였다.
사실 신통 향선들이 다른 인통의 향선이나 무동을 납거하여 밤새 조리돌리고 괴롭히는 것은 암묵적으로 왕왕 있는 일이었다. 상대는 대부분 신통에 밉보인 정통 끄트러기나 인통조차 없는 고루한 가문의 자제들로, 저희 눈에 안 차고 시건방진 사내들을 강제로 발가벗겨 다향원을 돌게 하는 일이 그들이 말하는 벽해국의 도이자 다향원의 관습이라 하였다. 윗도리 아랫도리 전부 발가벗긴 뒤 온몸에 횟가루를 묻히고, 맨몸에 북을 지게 한 뒤 두드리며 주목을 시켜 모욕을 주거나, 목에 고삐를 채워 끌고 다니거나, 엉덩이를 두들기면서 무동들과 해어화들에게 밤새도록 희롱을 당하고 나면 종국엔 좋든 싫든 신통이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마다 않는 충직한 끄나풀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년을 데려와라.”
해운의 명령에 해어화들 틈에 가려 있던 연홍이 비치적거리며 끌려 나왔다. 가녀린 여인을 흙바닥에 밀어 넘어뜨리는 힘이 우악스러웠다. 새옹은 명민한 머리를 굴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해 나갔다. 확실한 정황은 알 수 없더라도 연홍을 보자 어느 정도 희미하게 가닥이 잡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 해운이 저리 화가 나 펄펄 뛰는 이유인즉슨….
“네 상관인 홍의 놈이 분수를 모르고 나를 기망하려 드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해운은 몹시 화가 났다. 정력제는 개뿔, 입에 대었을 때만 잠시 잠깐 효능이 돌 뿐이지, 먹지 않은 상태에선 다시 물건이 시무룩 데치기를 무한 반복이었던 것이다! 또한 신통의 산하로 들어오라는 자신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듣는 척도 안 하더니 어느새 태자의 꽁무니에 붙어 흥야항야 주도권을 틀어쥐고 거만하게 구는 모습도 영 배알 꼴리고 거슬렸다.
무엇보다 해운은, 홍의의 말을 신봉했다. 여인의 맘을 얻는 법은 비대해진 불알 따위가 아니라 하기에 갖은 보옥과 열성을 바치며 연홍의 맘을 얻기 위해 애면글면했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소녀는 홍의 님을 연모하고 있으니 이것들을 도로 가져가 주세요.’
거기에 안 그래도 부실한 고환이 왁살스레 쥐여 잡혔던 기억까지 더하니, 그야말로 철천지원수지간이라는 말은 홍의와 해운을 두고 생겨난 말인 듯싶었다.
마침 해운과 함께 몰려다니며 못된 짓거리를 일삼는 신통 향선 사염이 터벅터벅 새옹에게 다가가 턱을 쥐어 올렸다.
“홍의의 약점을 불어라. 허면 회술레는 면해 주지.”
“…….”
새옹은 슬펐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 홍의의 약점을 죄 떠올려 보려 애썼고 나불나불 꼰지를 만반의 준비도 되어 있었다. 아니, 살려면 뭔 짓을 못 하겠는가?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인간의 약점이라면 강자에 강하고 약자에 약해서 당최 실리적이지 못한 성정이라는 것 외에, 암만 생각해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 것이다. 한참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간을 보던 새옹이 곧 별수 없이 유순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어… 대단하신 신통 자제분들께서 세상 두려울 게 무어 있다고 홍의 님께 뺨맞고 애먼 저에게 화풀이를 하시는지 통 이해가 가질 않네요. 아 말이야 바른 말입니다. 홍의 님이 분수를 모르고 날뛴다면 당사자를 잡아다가 문초하시면 되는 겁니다.”
자기가 뿌린 씨는 자기가 거두어야 마땅한 법이거늘, 이 사달을 자초한 망할 놈의 주군은 어디 가서 허허실실 노 났는지 코빼기도 안 보였다. 새옹이 생긋생긋 웃으며 대거리를 하자 향선들은 일제히 그 나물에 그 밥이라며 헛웃음을 쳤다.
한참 새옹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해운의 시선이 곧 새옹의 옆에서 말없이 몸을 떠는 연홍에게로 꽂혔다. 해운도 경련이라도 인 것처럼 눈 밑을 떨었다.
“마지막 기회를 주마.”
“…….”
“지금이라도 내 품에 얌전히 안기겠다고 한다면, 내 너를 평생 귀애하겠다.”
순간 연홍의 커다란 방울눈에 왈칵 눈물이 고이는가 싶더니, 뺨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에 신통 향선 노수가 끌끌거리며 혀를 찼다.
“다른 해어화들은 해운과 동침하지 못해 안달이건만, 어찌 너는 그리 빳빳하고 굄성 없이 굴어?”
그 말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해운은 현재 벽해 최고의 미남자로 통하였으며 신통 향선들의 수장으로서 다향원에서는 황제가 부럽지 않을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이대로 그에게 순종한다면, 연홍의 앞길도 탄탄대로와 다를 바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연홍은 웃었다. 눈물을 흘리는 채 뜨거운 헛웃음을 싸늘하게 토해 내는 외에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지금 네가 비소하는 것이냐?”
해운이 물었다. 연홍은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예, 우스워서 비소하는 것입니다.”
“대체 뭐가 우습다는 말이냐?”
“당신께서 하시는 말들, 전부가 우습습니다.”
아니, 연홍은 사실 그 순간에 자기 스스로가 황당하여 웃은 것이었다. 일순이나마 해운의 설탕 발림에 넘어가고자 왈칵 마음이 기우는 것을 본인도 모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연홍은 그리 살 수는 없을 것이었다. 입만 열면 험악스러운 말로서 여인들을 윽박지르고 암캐 취급을 하는 포악한 앞에 나부죽이 엎드려 같잖은 사랑을 갈구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다.
“…….”
그 사내의 미소를 기억한다.
분수 모르는 치기로 사내들에게 험한 꼴을 당할 뻔한 날이었던가. 늦봄이었고, 볕이 유난히 쨍했던 것 같다. 붉은 정복 휘날리며 소년처럼 밝게 웃던 한 사내가 있었다. 연홍에게 그 사내는 빛이었다. 무심히 스치는 와중에도 한 줄기 따스한 염려가 깃들었던 눈빛. 누군가의 귀애를 받는 것만이 일생 최대의 과업이며 광영이라 여기는 다른 해어화들과 겉돌고, 해어화 주제에 매사 앙알거린다며 따귀를 올려붙이고 무작스러운 발길질도 마다 않는 사내들에게 매일같이 시달리면서도 견뎌 낼 수 있었던 건, 오롯이 그 짧았던 마주침의 기억, 그 단 한 사람 때문이었다.
한사코 다른 욕심은 없었다. 그저 소중한 마음 품어 안고 단 한마디, 감사하다는 말만 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였다. 연홍이 고개를 수그리고 말없이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게워 내자 한참 지켜보던 해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저 연놈들을 발가벗겨라.”
“…….”
“지금 당장 저 연놈들을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말고 발가벗겨, 목에 사슬을 채우란 말이다!”
해운이 벽력처럼 소리 지르자 해어화들이 호들갑을 떨며 물러나고, 무동들이 불쑥 다가왔다. 순간 새옹과 연홍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사내들의 검고 단단한 손들이 일시에 뻗쳐 들고, 두 사람은 두 눈을 잘끈 감았다.
그때였다.
시근덕거리던 해운이 문득 눈가장을 좁혔다. 어두컴컴한 뒷마당의 억새풀 너머로 노란 안광들이 번뜩이었기 때문이다. 반딧불이라도 나는가 하여 눈에 힘을 주고 살피는데, 풀들이 갈라지며 거무튀튀한 윤곽이 천천히 드러났다.
도깨비가 키우는 검둥개들이었다.
해운은 너무 놀랍고 두려워 그 자리에 찍소리도 못 하고 얼어붙었다. 나머지 향선들과 무동들도 괴이한 낌새를 느끼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던 그때, 뒷마당을 컹컹 우렛소리처럼 울리며 집채만 한 검둥개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