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32화 (32/111)

#32

몇 마린지 셀 수도 없었다. 순식간에 무동들이 오합지졸로 흩어지며 팔뚝과 다리를 물어뜯기고 옷자락이 찢어발기어졌다. 뒷마당이 괴성과 비명으로 가득 찼다.

흉측한 도깨비 가면을 쓴 태자가 범람을 뚫고 뒷마당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왔다.

꼭 십사 년 만의 재회였다. 해운은 마치 그 고요한 태자궁의 안뜰, 무시무시하고 서슬이 퍼랬던 검둥개들과 도깨비 가면을 쓴 채 자신을 내다보던 동복아우와 마주쳤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아아, 오지 마…. 오지 말란 말이야!”

해운은 뒤넘어가듯 주저앉아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덜덜덜 떨어 대었다. 한 발 한 발 천천히 다가오는 태자의 도깨비 가면이 그때처럼 모로 기울었다. 마침 해운은 태자의 옆을 따라 걷던 충직한 돌치와 눈이 맞았다. 사나운 눈초리를 구기며 콧등을 일그러뜨리고 그르릉, 이빨을 까 올리는 검둥개에게서 맹수와도 같은 살기가 흘렀다. 태자가 돌치 옆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적을 앞에 두고 긴장하여 돌처럼 단단하게 굳은 돌치의 목 근육을 부드럽게 어르던 태자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물어.”

돌치가 쏜살같이 해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해운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혼비백산하여 후들거리는 무릎걸음으로 석계를 기어올랐으나, 고대로 정복 자락을 물려 주르륵 끌려갔다. 향선들이 발길질을 하고 돌을 던져 보아도 한번 문 것은 절대 놓지 않는 돌치는 두두둑 옷자락을 찢어 내기에 이르렀다. 거의 넝마가 되어 부들부들 떠는 해운을 향선들이 들쳐 업고 허둥지둥 뒷마당을 빠져나갔다. 오밤중에 개 짖는 소리가 더없이 통쾌하였다.

새옹과 연홍은 얼이 쏙 빠진 얼굴로 상황을 관망할 따름이었다. 향선들과 무동들이 모조리 달아나자 곧이어 까만 복면을 쓴 화경과 병사들이 나타나 검둥개들을 향해 털썩털썩 시뻘건 고깃덩이를 던졌다. 꺄울, 깽깽, 언제 그렇게 사납게 입질을 했냐는 듯 순식간에 온순해진 검둥개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와 봉긋한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그 아수라장의 한복판에 묵묵히 서 있던 태자가 천천히 고개를 튼 것도 그때다.

새옹은 망극하고 또 황송하여 덜덜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태자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엎드렸다. 난데없는 상황에 여전히 얼이 나간 연홍은 그저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로 멍하니 올려다 볼 뿐이다.

“태자 전하이시다. 어서 부복하지 못할까!”

보다 못한 화경이 나서서 연홍을 향해 우렛소리를 질렀다. 그럼에도 연홍은 너무 혼란스러워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긴 몸태에 검은 용포를 걸치고 괴상하게 생긴 도깨비 가면을 쓴 저 자가 이 나라의 태자라니, 눈으로 보고도 어쩐지 믿기지가 않았다.

“…….”

말없이 연홍을 응시하던 태자가 천천히 다가들었다. 연홍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눈물이 범벅된 얼굴을 망연히 들어 올렸다.

“…연홍?”

기울어진 도깨비 가면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제야 정신이 반짝 돌아오는 기분에 연홍은 서둘러 흙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켜 힘겹게 무릎을 꿇었다.

“태,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천세를 누리소서.”

태자가 말없이 연홍의 앞에 쪼그리고 앉더니 가면 쓴 얼굴을 들이밀었다. 당황스럽고 두렵고 망극하여 연홍은 얼른 고개를 푹 숙였다. 태자의 고개도 따라 내려왔다. 연홍은 어떻게든 회피하고자 고개를 이쪽저쪽 연해 돌려 보았으나 그 또한 따라 좇는 것이다. 더는 여의치 않음을 깨달은 연홍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도깨비 가면의 뚫린 눈구멍 사이로 얼핏 도깨비불처럼 새파란 무언가가 번뜩이는 듯했다. 등골에 찬결이 흘렀다.

“너는 해어화인가.”

나지막이 묻는 태자의 음성은 담담하였다. 연홍은 가쁜 숨을 삼키고 떨리는 음성을 꼭 억누르며 더듬더듬 아뢰었다.

“그, 그러하옵니다. 도경의 중심거리에서 갖바치 일을 하시는 아비와 단둘이 살다가, 연전에 해어화로 선발되어 다향원에 들었사옵니다.”

“허면, 아비가 참 그립겠구나.”

“…예?”

그의 면전에서 나온 말이 너무 설고도 정곡을 찔린 듯해, 연홍은 잠시 두려웠던 것도 잊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태자가 문득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연홍의 가냘픈 어깨를 천천히 짚었다.

“아비 곁으로 돌아가.”

연홍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태자가 속삭이며 비스듬히 얼굴을 가져왔다. 연홍은 얼음처럼 굳어 뚫어져라 앞만 보았다. 귓전으로 다가 드는 태자에게서 찰랑, 금귀고리 흔들리는 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시는 금성으로 돌아오지 마.”

***

말 네 필이 이끄는 사마의 속도조차 사람의 세 치 혀로 떠벌이는 말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그만큼 간밤의 검둥개 난입 사건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다향원 내부에 퍼져 나갔고, 아침부터 이 소식을 접한 정통 향선들은 내막도 모르는 채 덩실덩실 깨춤을 추며 신통의 일대 망신을 있는 힘껏 고소해하였다.

“태자 전하께서 신통 것들을 박살 냈다는 게 참말이냐?”

매일 같이 다향원을 돌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원주 미함 또한 이 소식을 듣고 입이 귀까지 째져서는 댓바람부터 홍의의 처소로 들이닥쳤다. 홍의도 막 새옹에게 간밤의 정황을 보고 받고 아직 기연가미연가하던 중이었다.

“그러니까 바로 그 순간 태자께서 검둥개들을 이끌고 나타나 빌어먹을 신통 놈들을 한 방에 제압하신 겁니다. 그뿐인 줄 아십니까? 가엾은 연홍까지 따로 구제해 주셨다니까요?”

“…연홍을?”

“예! 사실 해어화들은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는 곧 죽어도 금성을 벗어날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그를 가엾이 여기신 전하께서 연홍에게 귀향길 편하라고 평교자도 내리시고, 쌀 스무 섬에 전답까지 하사하신 겁니다.”

홍의는 멍한 동태눈으로 이것이 말인가 방구인가 셈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너무도 복잡하여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그러니까 평시에 태자궁을 벗어나는 일도 드물고 사신단의 연회가 아니면 만인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조차 없던 그 무지렁이 같던 인사가, 난데없이 정의의 사도가 되어 패륜을 일삼는 신통을 처단하고 연홍에게 자비까지 베풀었다?

‘…과연 새옹의 말대로 오롯이 정의 구현의 차원에서 그런 모험을 감행하였을까? 그치가?’

마침 건너편에 앉아 잠자코 팔짱을 낀 채 이야기를 듣던 원주 미함도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헌데 태자 전하 또한 신통이거늘, 어찌 같은 신통과 척을 지고 나선 거지? 무엇보다 해운과 전하는 동모형제가 아닌가.”

그리고는 홍의를 향해 물었다.

“태자 전하께오서 정녕 피아조차 구분하지 못할 만큼 심각한 얼치기셨나? 아니면 그들 형제 사이에 누구도 모를 알력 다툼이 있었던 게냐?”

홍의는 차마 대꾸하지 못하고 시선을 회피했다. 사실 알력 다툼이라기보다 해운의 지질지질한 뒷담을 훔쳐 듣고는 끝내 속으로 삭여 내지 못하고 기어이 앙갚음을 한 게 틀림없었다. 물론 가타부타 정황을 알 리 없는 정통 인사들이 보기엔 이무기들 진흙탕 노니는 데 용 한 마리 난입한 꼴이라 이래도 신나고 저래도 재미난 구경거리겠지만 말이다.

‘아나, 형제가 쌍으로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었나. 쌈박질을 해도 참으로 휘황찬란하게 일을 벌이는구만 그래.’

속속들이 상황 파악을 마친 홍의만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까 벌써부터 등골이 저릿할 따름이었다. 미함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재우쳐 물었다.

“홍의 네가 근래 들어 태자와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더니, 따로 언질도 듣지 못한 게냐?”

“아직 사담까지 주고받을 만큼 속 깊은 사이는 아니라 놔서….”

“흐흠, 그래도 정말 대견하다. 태자 전하의 스승 노릇하면서 허송세월이나 보낼 줄 알았더니 낚시로 용을 낚았구나. 이번 사건으로 말미암아 신통 향선들의 기세가 한풀 꺾여 누그러졌으니 이야말로 나라의 위계를 바로 잡을 절호의 기회다.”

홍의는 잠시간 말없이 미함을 응시하였다. 태자의 행동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는 용이 걸렸다느니 위계를 잡을 기회라느니, 온갖 휘황한 사족을 붙이는 미함이 어쩐지 뜬구름을 잡는 듯 허황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혹 내가 태자 전하와 따로 알현할 수 있게 네가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겠느냐?”

심지어 그 질문에는 약간 빈정까지 상했다. 마치 태자를 정통을 부활시킬 발판 따위로 여기는 듯한 말투라 유난히 거슬렸다. 그리 막 무시해도 되는 그런 사내는 아닌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홍의 또한 스스로가 조금 놀랍고 살짝 열없었다.

“예 뭐, 공의 뜻은 전달해 보겠으나 실질적인 알현은 어려울 것입니다. 전하께서 워낙 별스럽게 낯을 가리시는 데다 의외로 정사도 다망하시고… 아니 그보다도, 애초에 누가 뵙자고 한다고 아무 때나 뵐 수 있고 그런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홍의가 건성으로 툭툭 대꾸하니 미함은 다소 민망스럽고 괴란쩍은 기분이 되어 홍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네가 지금 내 앞에서 태자 전하의 역성을 드는 게냐?”

“…아닌데요.”

홍의는 딴청을 피우며 마루를 손톱 끝으로 득득 긁었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치던 미함은 눈썹을 꼿꼿이 세운 채 새옹을 쳐다보았다.

“좌우지간 네가 홍의 대신 간밤에 고초가 많았겠구나.”

새옹은 뱁새눈으로 홍의를 흘겨보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제게 죄가 있다면 상관을 잘못 둔 죄겠지요? 해운이 어찌나 홍의 놈 홍의 놈, 하고 이를 갈던지.”

“어헛 참, 이래서 상관을 잘 만나야 하는데.”

“당사자인 홍의는 그 시각에 처소에서 또 그놈의 그림 쪼가리나 끄적거리고 계셨다지요. 만일 전하가 아니었다면 저는 밤새 목줄 매여 조리돌림 당하고 이렇게 두 발로 성히 서 있을 수도 없었을 겁니다. 아 그냥 주군 갈아 치우려고요.”

“그래라. 기왕이면 이놈 간에 붙었다가 저놈 쓸개에 붙었다가 하는 주군보다는, 줏대 있고, 응? 지조 있는!”

“…….”

홍의는 말없이 쪼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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