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33화 (33/111)

#33

태자를 알현하러 태자궁으로 향하던 길, 홍의는 누각에 모여 앉은 한 무리를 발견하였다. 서너 명의 해어화들과 요즘 도경에 유행한다는 화장법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 덩치 큰 사내가 있었다. 터질 듯한 시녀복과 시허연 낯빛과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영 귀에 익었다.

“껄껄껄, 그러니까 요 옥잠화 다진 즙을 가장 처음 낯에 바르는 거란다.”

“그게 참말이야? 분꽃 씨를 빻은 가루를 펴 바르기 전에 옥잠화즙으로 얼굴을 먼저 적시면, 참말로 가루가 허옇게 들뜨지 않고 피부에 쏙쏙 스며든다는 거지?”

“또 소세를 할 적엔 꼭꼭 녹두 가루를 물에 풀어서 거품을 내렴. 화장기가 꼼꼼히 지워진단다.”

“네놈 입술에 바른 연지는 무엇으로 만든 게냐?”

“두말할 것 없이 잇꽃이지! 붉은 윤기 내기로는 잇꽃만 한 게 달리 있느냐?”

어이없이 누각을 올려다보던 홍의가 기척이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돌계단을 걸어 올랐다.

“그나저나 네년은 명주실로 솜털부터 좀 뽑아야겠다. 분칠 다 뭉쳤구나.”

“그러는 네놈은 수염 올라온다, 이놈아.”

녹빈과 여인들이 머리를 부대고 손바닥만 한 면경을 함께 들여다보고 있는데, 별안간 웬 손이 하나 튀어나와 녹빈의 귀를 왁살스레 홈켜쥐었다.

“악! 뭐야?”

“이보게, 소저들. 내 잠시 이 시끄러운 놈을 좀 빌려 가겠네.”

“에그머니나!”

“꺅, 홍의 님!”

화들짝 놀라 입 가리고 수선을 떠는 해어화들을 뒤로하고, 홍의는 저보다 한 뼘은 더 큰 녹빈을 우악스레 누 아래로 끌고 내려왔다. 그리고 수상쩍다는 눈으로 녹빈의 위아래를 매섭게 훑어보기 시작했다.

“네놈이 왜 아직도 금성에 있는 것이냐? 그 차림새는 또 무엇이고?”

“모르시면 모르쇠나 잡으실 일이지 지나가다 어인 행패십니까? 전하께서 빈이를 태자궁의 시종으로 받아 주셨다고요! 어유, 내 어여쁜 귀가 홀랑 떨어지겠네!”

“허?”

암만 생각해도 그 낮도깨비 같은 인간 하는 짓은 알다가도 모르겠는 것이다. 홍의는 어이없이 뒷짐을 졌다. 한참 동안 제 귀를 삭삭 비비며 앓는 시늉을 하던 녹빈이 이윽고 만면에 능글거리는 미소를 가득 띠었다.

“그나저나 나리께서는 댓바람부터 어딜 그리 바삐 가시남요? 혹 꼭두새벽부터 몸이 달아 지아비이신 태자 전하께 살랑살랑…?”

찰싹! 홍의가 손바닥으로 녹빈의 주둥이를 때렸다.

“그러는 너야말로 댓바람부터 다향원까지 기어 나와 무슨 쏠라닥질을 벌이는 거냐?”

“하아. 빈이가 성은을 입어 태자궁에서 편안히 먹고 누리는 것은 좋지만서도 말예요. 그곳은 하도 조용해서 어디 사람 사는 냄새가 나야지요. 궁인들은 하나같이 유령 같고, 뭔 말을 붙여도 이렇다 할 대거리가 없으니…. 게다가 사내들까지 죄다 저승사자 같다고요.”

홍의는 내심 그 말에는 동조하는 바였으나 애써 티 내지 않고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하려 들었다.

“해서, 그토록 좋아하는 사내를 찾으러 다향원에 들었으면 작심이나 이행할 것이지, 왜 여인들과 노닥거리고 있느냐?”

녹빈은 이내 껄껄거리며 홍의의 어깨에 두꺼운 팔을 턱 걸쳤다.

“명일, 벽해 최고의 미녀를 뽑는 경합이 열리지 않습니까?”

“…흉년 뒤에 열린다는 그 행사 말이냐?”

“예! 도경의 제일가는 기루인 저희 화양각에서는 흉년이 들 때마다 귀족들의 원조를 받아 풍작을 기원하는 축제를 주최해 왔지요.”

화양각의 연회라 함은 그 규모가 워낙 크고 화려한 축제라, 도경의 모든 귀족뿐만 아니라 퇴임한 향선들까지 모두 참여하여 만민이 어우러지는 연례행사나 다름없었다. 지난해 기근으로 만백성이 굶주렸지만 올해는 미의 여신께서 백성들을 굽어살피길 염원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바치고 벽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를 기린다. 그러면 그 미모와 정성에 감복한 여신께서 풍년을 하사한다는 것이다.

“벽해의 최고 미인을 뽑는 자리라니 다들 저리 안달이 난 게지요. 빈이의 새롭고 기똥찬 화장법에 감명 받은 해어화들이 한 수 배우길 청하니 어쩔 수 없이 가락 좀 뽑아준 거라고요. 나리는 잘 알지도 못하믄서.”

한참 홀로 투덜대던 녹빈은 소매에서 작은 면경을 꺼내 보며 콧노래를 홍알거릴 뿐이다. 흥, 말로는 비님을 기리자면서 결국은 농탕을 일삼으려는 귀족들의 뻔뻔한 만냥판이 열리겠구먼! 홍의는 하늘을 우러르며 쯧쯧 혀를 끌었다.

***

환한 대낮에 맨정신으로 바라보는 태자궁의 풍경은 야밤과는 사뭇 달랐다. 초목이 스스로 왕성한 생령을 자랑하며 온 세상을 푸르게 뒤덮은 초여름이었다. 사방의 높은 담장 밑 화단에는 패랭이꽃, 금낭화, 수레국화, 쑥부쟁이가 자줏빛 앵두빛 보랏빛 구름빛을 내며 씽글거렸고, 밤낮으로 둘레를 지키는 검둥개들이 시원한 농음에 게으르게 엎디어 뒷발로 목덜미를 긁어 대었다. 개들은 명민하여 주인을 알아보고 주인과 우호적인 관계의 사람도 한눈에 알아보는 법이었다. 서열의 우두머리 격인 돌치가 말갛고 순한 눈으로 말끄러미 홍의를 바라보기만 하자 다른 개들도 점차로 경계를 풀고 귀를 뒤로 젖혔다. 싸늘하고 강강하게만 보였던 궁인들은 한가롭게 안뜰을 거닐며 화초에 바가지 담아 온 물을 뿌려 주거나 우물 간에 쪼그리고 앉아 푸새를 하거나 멱을 감거나 사발을 씻가시고 들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물방울 튀는 소리가 가시질 않는 것을 보니, 벌써 불볕더위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단청 아래서 깜치를 쓰다듬으며 잠시 다리쉼을 하고 있던 옥지가 대문간을 들어서는 홍의를 발견하고는 부리나케 일어나 총총 달려왔다.

“홍의 님 오셨습니까.”

이제는 이 아이를 보아도 깜짝깜짝 놀라지 않는 스스로가 대견해 홍의는 전에 없이 푸근하게 웃었다.

“그래, 그간 무고하였느냐, 옥희야.”

“옥지입니다.”

“…흐흠, 전하는 어디 계시느냐?”

“전하께서는 후원에 들어 계십니다. 먼저 가 계시면 곧바로 시원한 냉차를 대어 올리겠습니다.”

회랑을 돌아 후원에 들어서자 딱, 딱, 목검 부딪치는 소리와 사내들의 기합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홍의는 순간 휘파람을 부는 것처럼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높게 장대 세운 천막 아래 훤히 웃통을 깐 태자가 화경의 감독 아래 검법 연마에 한창이었다. 숱한 추문들이 말하는 비실비실 약골 흉한에 유충한 허수아비는 어딜 가고, 소년의 태를 벗고 갓 장성한 약관의 사내가 옥같이 매끈한 상박근을 드러낸 채 유연하고도 능숙하게 검을 다루었다. 다향원에서 검술이라면 으뜸인 미함만큼이나 그 동선이 날래고 가벼워 지켜보는 홍의는 어이가 없었다.

‘대체 저 인간의 정체가 뭐지?’

황족들은 벽해 최고의 고수들을 수족으로 부리며 지척에 첩첩이 세워 두면 족할 따름이라, 굳이 검법에 통달할 필요도 없으며 미립날 재간도 없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저리 몸과 검을 가볍게 다루는 본새를 보아하니 하루의 반나절은 수련으로 탕진해도 얻어 가질 수 있을까 말까 한 고강한 실력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애당초 지밀 간의 문제를 제외한 태자의 결점은 무엇이란 말인가? 홍의는 순간 기가 다 질리는 기분에 고개를 설레 젓고 말았다.

마침 태자는 검을 허공에 던져 버리고 주룩주룩 비 맞은 듯 쏟는 땀을 팔뚝으로 닦아 내었다. 가쁜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단단한 가슴팍에도 맑은 빗물 같은 땀방울이 굴러 내렸다. 이윽고 처마 밑에 서서 오도 가도 못 한 채 우왕좌왕하던 홍의를 발견하고는 잠시 땀 닦는 것도 잊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홍의도 잠시 잠깐 멈칫하였다.

“홍의다.”

태자가 또렷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럼 내가 홍의지 홍삼이니.’

괜히 훔쳐보다 들킨 것 같아 머쓱한 기분에 홍의는 먼 산을 보며 입속으로 툴툴거렸다. 태자는 화경이 내미는 수건으로 얼굴을 훔쳐 내었고, 막 커다란 쟁반에 얼음 동동 띄운 결명자차를 받쳐 들고 오던 옥지가 부랴부랴 쟁반을 내려놓고 포를 펼쳐 어깨에 둘러드렸다. 홍의가 슬금슬금 다가와 시선을 회피하며 읍을 올렸다.

“나 보러 온 건가?”

태자가 찻잔에 아랫입술을 붙인 채로 물었다.

“아니 예, 무어, 딱히 전하를 뵈러 왔다기보다는 올릴 말씀도 있고 하여….”

어험 엇흠 으흠. 홍의는 연신 헛기침을 해 가며 줄곧 한곳에 시선을 두지 못하고 두리번거렸다.

“할 말? 무언데.”

망설이던 홍의는 곧 양손을 모았다.

“저어… 간밤에 제 부관인 새옹을 구해 주셨다 들었습니다.”

“…….”

“높고 크신 은혜에 참으로 망극하옵니다.”

자분자분 아뢰고 머리 숙여 읍을 올렸다. 태자는 별다른 대꾸 없이 마주 서 있기만 하였다. 민망하였다. 다시 고개 들어 올릴 마땅한 때를 놓치고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있는데, 별안간 태자도 수굿이 고개를 내리고는 비스듬히 눈을 맞추고 들었다. 놀란 홍의의 두 눈이 끔쩍거렸다.

“말로만?”

태자는 어수를 뻗어 홍의의 턱을 부드럽게 받치고 고개를 들게끔 하였다. 이윽고 마주친 맑은 물빛의 눈동자는, 어쩐지 장난스러운 웃음이 한가득이었다. 땀을 한껏 흘리고 더위를 타서인지 양 볼이 연분홍으로 붉었다. 또 무슨 얄궂은 속내를 품었기에 저리 웃는가, 잠시 뾰족한 의구심이 솟구쳤으나 어쩐지 입 밖으로 말이 나가지 않았다. 태자가 평시와 달리 한껏 움직이고 땀을 쏟고 아이처럼 웃고 있는데, 그냥 그렇게 두고 싶었다.

“정 고마우면 앞으로 내 근위 무관이 되어 줘.”

“근위… 무관이요?”

“응.”

홍의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하의 근위 무관이라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요?”

“내 지근거리에서 날 보필하는 거야.”

“그런 이라면 이미 화경이 있지 않습니까?”

“해서, 싫어?”

“…….”

“역시 말로만 고마운 거였군.”

태자가 홍의의 턱을 놓고 휙 돌아서며 수건을 툭툭 털어 내었다.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던 홍의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싫다니요, 당치 않습니다. 부족한 소신에게 과분한 직책이 심히 망극할 따름입니다.”

“허면… 좋다는 말인가?”

태자가 조심스레 묻는데 홍의는 어쩐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문득 불어와 더위를 한풀 식혀 주는 소슬한 바람이 좋았다. 괴상한 인연이라고 뒷걸음만 치던 홍의는 이제야 이 청대처럼 푸르고 복사꽃처럼 해사한 사내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섰다.

“예… 좋다는 말입니다.”

이내 선선히 대꾸하는 홍의의 입매로 시원스러운 미소가 발쪽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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