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내가 땀을 많이 흘려서 목간을 하려는데, 그대가 좀 돌봐 줘.”
얼마 후 다 같이 후원을 나서는데 태자가 냉수 마시고 쉰 소리를 지껄였다. 이제 다향원으로 돌아가 점심이나 때우려 생각 중이던 홍의가 귀를 의심하며 그 자리에 턱 멈춰 섰다.
“제가 왜 전하의 목간을 돌봐 드립니까?”
“내 근위 무관이 되어도 좋다며.”
“…….”
“근위 무관이란 앞으로 내 입는 것 벗는 것, 씻는 것 잠드는 것, 또 먹는 것 마시는 것까지 전부 지척에서 돌봐 주는 향선을 일컫는 거야.”
이 무슨 아닌 밤중에 개 풀 뜯어 먹다 훼까닥 자지러지는 소리란 말인가. 순간 불뚝성이 솟구치며 얼굴이 벌게질 뻔했으나 홍의는 초인적인 힘으로 내리누르며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려 애썼다. 더 이상은 태자의 농간 아래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장단을 맞춰 놀기 싫었다.
“그것은 아니 될 말씀입니다. 쉴 짬마다 전하의 어진을 그린다고 가뜩이나 몸살이 날 판인데, 이제는 일국의 향선을 그리 사사로운 일에까지 동원하려 드십니까?”
“그동안은 그 사사로운 잡일을 오롯이 옥지 혼자 도맡는다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걸.”
“…….”
홍의가 홱 고개를 돌려 옥지를 바라보았다. 쟁반을 머리에 인 채 종종걸음으로 따라붙던 옥지의 낯빛으로 잠시 당황스런 기색이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잠자코 시치미를 떼면서 남는 손으로 제 허리를 두들기고 땀을 닦는 시늉을 하는 둥 부산을 떠는 것이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옥지는 더할 나위 없는 태자의 편짝이었다.
“사내가 한 입 갖고 두말할 셈인가.”
태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넌지시 물었다. 말문이 막힌 홍의의 양 볼이 당과라도 주워 문 것처럼 불퉁해지고 말았다.
***
본당 깊숙한 곳에 자리한 태자의 입욕실에 뽀얀 수증기와 향긋한 백단향이 몰씬 피어올랐다. 시비들은 편백나무로 넓게 맞춘 탕조에 따스한 물을 받고는 갖가지 꽃잎을 띄우고 홍화 다발을 촘촘한 망사에 넣어 담가 놓았다. 구석에 주저앉아 턱을 괴고 그 광경을 잠자코 지켜보던 홍의가 문득 손바닥으로 얼굴을 두어 번 쓸었다.
‘…태자 전하는 남색가인 것인가.’
아주 칠푼이가 아닌 바에야 태자가 저에게 외따로 음심을 품고 있음을 응당 알아챌 수 있었다. 도경에만 나가 보아도 능수버들처럼 날렵하고 애살스러운 미남 미녀들이 널렸거늘, 왜 유독 자신에게만 그리 집착을 하고 유난하게 굴고 치대지 못해 안달인지 곤욕스러울 따름이다.
선도에서 말하는 남녀의 등하색(燈下色, 불빛 아래 성교)이란 비단 정욕을 푸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응당 받들어야 마땅할 자연스러운 이치와 다름없었다. 그만큼 음양의 조합이란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이치였고, 홍의는 그 이치에 순응하는 것만이 인간의 바른 도리라 여기며, 속된 말로 같은 사내끼리 통하는 비역질은 어딘지 저열한 행위라 간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 본다면, 무릇 천지 만물이란 상황에 따라 역변하고 흐름을 따라 나아가기를 반복하는 속성을 지녔으니…. 홍의는 욕통에 찰랑이는 향긋한 붉은 물을 응시하다가 문득 그 고인 물이 쪼르르 바깥으로 흘러내리는 상상을 했다. 흘러넘치기에 그치지 않고 폭포수처럼 쏟아 내리는 붉고 투명한 물줄기, 마음이란 그릇에 담긴 갖가지 감정, 욕망, 그 새빨간 갈급증. 그렇다면 더 고여 있지 못하고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저 하는 야릇한 박동 또한 마땅히 순응해야 할 자연의 이치가 아닐런가.
마침 바깥을 가리던 금빛 장막이 걷히고 태자가 옥의를 갖춰 입은 채 욕탕 안으로 들어섰다.
시비들은 서둘러 머리를 조아리며 종종걸음 쳐 밖으로 나갔다. 그녀들이 전부 사라지고 난 뒤에 태자는 스스로 금관을 빼 들어 면사를 벗었다. 홍의는 바짓부리와 소매를 잘 걷어붙이고 말없이 태자의 등 뒤에 붙어 서서 머리를 조금 젖혀 달라 간했다. 태자는 예사롭게 고개를 젖혀 주었다. 스윽, 금 상투관과 용잠이 빠져나간 자리에 천천히 뽀얀 옥잠을 대신 꽂고 살며시 머리칼을 죄었다. 홍의의 손놀림은 익숙치 않은 일을 하느라 느리고 어설펐으며, 태자 또한 굳이 채근하지 않고 묵묵하였다.
이윽고 홍의는 태자의 앞으로 걸어갔다. 차마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대었다. 그러다 결심한 듯 포를 천천히 끌어 내리고, 비단 장유의 옷고름도 잡아당겼다. 매끄러운 비단이 맞부딪는 소리가 귓가를 긁듯 사각사각하였다.
사실 태자는 이러한 시중을 받는 것이 날 때부터 너무 익숙하여 여상하게 반응하고 있었지만, 항시 책이나 검만 쥐고 살았던 홍의는 그와 사정이 달랐다. 귓불이 뜨끈해지면서 더운 숨이 절로 쏟아져 나오고 심장 박동이 어지간히 빨라지는 것이었다. 특히 옷고름을 다 풀고 태자의 너른 어깨 끄트머리에 걸린 마지막 고의를 양손으로 잡아 끌어내릴 때, 불끈 각이 져 동그랗게 튀어나온 어깻죽지가 새하얀 살성으로 투명하게 드러났을 때는, 일순 눈앞이 아찔하였다.
‘…참말 천상에서 하강한 신선이 따로 없구나.’
군살 없이 매끈하고 탄탄한 근육의 나신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아름다움은 다만 아름다움이라 그 깊이를 논하는 데 성별은 아무려나 쓸모없었다. 홍의는 문득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내의 아름다움이 진심으로 아까웠다. 만일 태자가 대의를 품고 만인의 앞에 당당히 선다면, 거추장스러운 면사 따위로 가리지 않은 온전한 제 모습을 떳떳이 드러낸다면, 필시 많은 상황이 바뀔 터였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야릇하고 오묘한 조바심이 솟구쳐 오른다. 이 사내의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을 계속 자신 혼자만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율배반과도 같은 욕심 말이다.
“…….”
“…….”
찬찬하게 마주 보는 물빛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곧기만 하였다. 홍의는 문득 허튼 생각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한 번 털어 내고는 서둘러 태자의 팔뚝을 잡고 욕조 안으로 이끌었다.
“…전하.”
“응.”
붉고 투명한 물속에 잠긴 태자는 한껏 몸을 풀고 늘어지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 욕조 난간에 팔을 괴고 앉아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홍의가 문득 입을 떼었다.
“전하께서는 어찌 고운 아녀자들을 스스로 마다하시고 젊은 혈기에 독수공방하십니까?”
그러자 나른히 감겨 있던 태자의 눈꺼풀이 천천히 뜨였다. 말간 눈빛이 물기 어려 촉촉하였다.
“역겨우니까.”
맑은 눈빛과는 적이 다른 날카로운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구중을 따라 흘러나왔다.
“그 여인들도 날 구렁이 보듯 징그러워하고, 나 또한 그 여인들이 매한가지로 징그럽고 역겨우니까.”
홍의는 새삼 기분이 묘해서 황황히 태자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누구도 모를 지밀 간에 눈으로 보이지 않는 은밀한 속사정이 더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백년가약을 맺은 자신의 부인과 그 잉첩들을 저리 홀시할 리 만무한 것이다.
태자는 손바닥에 물을 적셔 얼굴을 몇 번 훔치고는, 문득 몸을 돌렸다. 잔잔한 붉은 물을 길고 탄탄한 팔뚝으로 부드럽게 헤치며 한달음에 홍의의 코앞에 다가온다. 홍의는 어쩐지 그 자리에 매인 사람처럼 피하지 않고 잠시 멈칫하였다.
“사실, 나는 살면서 누구에게도 색심이 인 적이 없어.”
태자는 나지막이 읊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붉은 물 속에 잠기어 축 늘어진 자신의 고간이 어룽어룽하였다.
“그런데 그대와 있으면 온통 야한 생각이 들어.”
그야말로 심증이 현실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홍의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대가 늘 차리는 그 붉은 정복을 거칠게 찢어발기고… 성가신 내 옷들도 모두 벗어젖히고….”
“…….”
“그렇게 우리 둘 다 알몸이 되어 숨차게 껴안아 보고 싶어.”
평시 말수 적은 태자가 느릿느릿 조곤조곤 읊조리는 소리가 입욕실의 내벽을 타고 잔잔하게 울렸다. 다음 순간 태자가 지그시 시선을 맞춰 오는데, 왜일까, 홍의는 불에 덴 사람처럼 움찔, 떨었다가 그대로 몸이 굳고 말았다.
태자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짙고 불순하였다. 아니, 맑고 순수하였다. 그렇게 두 가지 양상이 동시에 가득하였다. 마치 어린 소년 같기도 하고 장성한 사내 같기도 한 미청년이 농홍한 숨결을 후끈하게 흩뿌리며 다가 드는데, 홍의는 일순 정신이 다 혼미하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태자가 문득 축축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홍의의 귓불 뒤, 동그랗게 옴쏙 들어간 은밀한 부근을 살며시 눌러 왔다.
“여기, 입 맞추고 싶어.”
“…….”
실로 그러하였다. 태자는 현재 지독하게 홍의와 교합하고 싶었다. 음양의 이치는 뒤꼍의 돌치 깜치에게나 주어 버리고, 오롯이 눈앞에 자리한 이 잘생긴 연상의 사내의 목덜미에 깊숙이 코를 묻어 보고 싶었다. 단단하고도 유려한 능선에, 일자로 뻗어 짙고 고운 눈썹에 살며시 입을 맞추고 싶었다. 활짝 웃으면 얼굴 이곳저곳에 올록볼록 도드라지는 애살스러운 살들에, 개구쟁이처럼 한껏 휘어지는 눈매에, 또 언젠가 몰래 엿보았을 때 유난히 새싹처럼 보드라워 보였던 귓불 뒤의 연한 부근에, 일일이 입 맞추고 진진하게 핥아 내어 혀끝으로 그 맛을 정확히 확인하고 싶었다.
투박스러운 언사와 얄궂은 말만 골라 내뱉는 입술을 억지로 벌리고 혀를 욱여넣어 샅샅이 유린하고 싶었다. 거칠게 반항하는 단단한 몸뚱이를 있는 힘껏 잡죄어 제 아래에 누이고 가랑이를 잡아 벌려 은밀한 곳까지 낱낱이 핥고 빨고 깨물어 맛을 보고 싶었다. 밤새도록 두 팔과 두 다리 모두 얽고 침상 위에 얼크러져 땀을 흠뻑 쏟으며 하릴없이 뒹굴고 싶었다. 그렇게 삼일 밤낮을 부둥켜안고 논대도 지치거나 질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색욕이었다. 지독하고 지독하였다.
“…하.”
그리하여 태자는 탄식처럼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누군가가 만지지도 않았는데 단지 상상만으로, 섰다. 태자는 붉게 일렁이는 물속에 빳빳이 발기한 자신의 물건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내 몸을 어떻게 좀 해 줘.”
“…….”
“홍의야.”
나체로 흠뻑 젖어 든 채 나른하게 칭얼거리는 미끈한 묘랑(妙郞, 스물 안팎의 청년)의 모습은 괴이하면서도 관능적이었다. 홍의의 눈이 크게 뜨였다. 태자가 자신의 이름을 온전히 발음하였을 때, 아랫배에서 울꺽- 하고 뜨겁고 붉은 화염이 확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