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그 사내는 쏟아지는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권태롭다는 듯 하품을 하고 있었다. 붉은 옷감이 몸에 배인 색처럼 잘 어우러졌다. 훌쩍 큰 키대와 다부진 체격도 강건해 보였다. 얇게 속 쌍꺼풀 진 부드러운 눈매로 무심하게 주변의 풍경을 응시하다가, 마침 몸집이 왜소하고 어린 여비가 무거운 술동이를 들고 곁을 지나자 성큼 그 앞으로 다가가서 동이를 장난스럽게 휙 들어 올리는 몸짓에는 어떠한 사심이나 가감도 없어 보였다.
여비가 새빨개진 얼굴로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허리를 굽혔다. 사내는 제 뒤의 무동들에게 일러 동이를 대신 옮기게 하고는 어린 여비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한 차례 씽긋 웃어 주었다. 이윽고 묵묵히 향선 행렬로 다시 끼어드는 사내는 아마도 지금, 자신의 붉은 정복 자락 끄트머리로 뭇 여인들의 애달픈 시선이 촘촘히 따라붙었을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있으리라.
“방금 보았어? 금성의 향선이라면 필시 지체 높은 귀족이 분명한데, 어찌 한갓 여비에게 저리 차별과 경계 없이 상냥할까?”
“저 사내의 이름은 무얼까?”
“신통도 필요 없고 정통도 눈에 안 찬다! 나는 오늘 밤 저 사내와 빛나는 운우지정을 쌓아 보련다!”
불현듯 음기가 끓어오른 유녀들이 하나같이 치마꼬리를 옴팡지게 말아 쥐고 사기를 불태우는데, 문득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불쑥 뒤통수를 울렸다.
“아서라, 이년들아!”
화들짝 놀란 유녀들이 일제히 돌아보니 기루에서 남색가를 손님으로 받으며 잔뼈가 굵어진 녹빈이 서 있었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휘황찬란하게 꾸민 가체를 들쓰고 접선으로 입술을 가리며 저보다 머리 하나씩은 더 작은 여인들을 향하여 한껏 등을 굽히고 자근자근 뇌까리었다.
“저분은 홍의 님이라고 곧 부제 향선에 오르실 분인데, 이미 임자 있는 몸이니 헛물켜지 말거라.”
녹빈의 오달진 타박에 산월이 샐쭉이 아름다운 입매를 어그러뜨렸다.
“이미 임자가 있다니 그게 누구랍니까? 혹 금성에서 궁중 창기 노릇이나 하는 해어화인 게요?”
“궁중 창기 같은 소리 하네. 언감생심 너희들은 상상조차 못 할 무지막지한 부와 권력과 미모를 겸비하신 분이니, 멋모르고 새살을 깠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경을 칠 줄 알아라!”
그렇게 부리부리한 눈을 위아래로 치뜨며 단단히 윽박지른 녹빈은 뒤늦게 연회장의 문설주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슬슬 오실 때가 되었는데 감감무소식이시네?”
***
술시가 되자 연회는 절정에 이르렀다. 도경의 최고 미인을 가리는 경연이 열리고, 연회장 한가운데로 이목이 집중되었다. 화사한 등롱 아래 화초선 쥘부채를 양손에 차린 선녀들이 바람결에 꽃잎 나리듯 사푼사푼 걸어 들어 가지각색의 미모를 뽐내기 시작했다. 악공들의 꽃 가락에 맞추어 제각기 풍성한 맵시를 자랑하며 요나한 춤사위를 선보이고, 이 같은 정취에 감화된 모리배들이 앞다투어 채전을 던지거나 꽃잎을 뿌렸다.
“해운, 이제 그만 기분 풀고 감미롭게 즐겨 보세나. 기왕 화양각까지 나와서는 계속 죽상을 쓸 참인가?”
태자와의 마찰이 있은 후 이틀이나 지났건만, 여전히 해운은 그날의 충격과 자존감을 펄펄 홰치는 오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해운과 도경에서 함께 유년기를 자란 사촌지간인 사염과 노수는 계속 눈치를 살피며 위로랍시고 어살버살 뜬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자 해운이 설미지근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들놀이가 한창인 연회장 한복판을 살펴보았다.
“흥, 이따위 허섭스레기 같은 경연에 애초에 기대는 않았다만, 당최 누가 미녀들이라는 건지. 분을 어찌나 떡칠을 했는지 거칠거칠한 안면에 시들시들한 표정이 사람이 아니라 끓는 물에 빠진 푸성귀들이 펄럭대는 줄 알았다.”
그러자 잔뜩 주눅이 든 노수와 사염이 꼬리를 말고 깽깽거렸다.
“그, 그러게, 자네의 말을 듣고 보니 참으로 옹망추니들의 향연이 따로 없군.”
“이크, 우리가 큰 실수를 할 뻔했군. 벽해 최고의 재색을 갖춘 해운의 눈에 칠 선녀라고 한들 성에 차겠는가?”
언제나 더할 나위 없는 충복인 두 사내가 안쓰럽게 땀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아부를 늘어놓는데도, 해운의 기분은 쉬이 나아지질 않았다. 연신 술잔을 기울이는 그의 시야로 원주와 나란히 앉아 있는 홍의가 들어왔다.
‘저런 놈 말을 믿고 연홍을 한 번 취해 보지도 못한 채 금성에서 떠나보내다니, 이게 죽 쒀서 개 준 꼴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또한 저들은 뭐가 그리 떳떳하고 잘나서 나를 흉악하고 파렴치한 놈으로 모는 거지?’
한심하다는 얼굴로 같잖은 정력제를 건넸던 홍의와, 징그러운 흉한인 주제에 태자의 위랍시고 기세등등하던 여운을 떠올리면, 꾹꾹 억눌렀던 화기가 다시 확 치밀어 오르곤 했다. 연신 술을 들이켠 해운의 흰 볼로 취기가 발그레 올라오고 있었다.
“비대한 불알, 다정한 말 한마디와 비단 패물? 대체 그딴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내가 눈길 한 번 주면 치마를 걷어 올릴 빌어먹을 백치들이 도처에 널렸는데!”
풀린 눈으로 냅다 소리를 지른 해운이 비치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 살피기 시작했다. 노수와 사염이 어딜 가느냐고 말려 보아도 막무가내였다. 마침 주변에 산재한 인파를 거칠고 무작스럽게 헤치며 정처 없이 나아가던 해운의 흐릿한 시야로 막 내정에서 연회장으로 통하는 입구로 들어서는 한 여인이 보였다.
커다란 가체에 화관을 들쓴 채 검자줏빛 어두운 망사를 드리운 채라 그 생김생김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여인치고는 너무 커다란 키대가 유독 눈에 띄었다. 얼핏 보이는 길쭉한 목덜미에는 값비싼 비취 경식을 늘어뜨렸고, 귓전에 흔들리는 금이환과 손가락에 들이끼운 고운 금지환들, 비단 포에 비단 유 아래로 풍성한 치맛자락을 화려하게 떨쳐입은 것을 보니 필시 유녀나 여염의 여인이 아니라 귀족가의 영애가 틀림없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고, 고고하여 오르기 힘든 나무일수록 자빠뜨렸을 때의 보람이 곱절은 큰 법이었다. 해운은 취기 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 내고는 만면에 꾸며 지은 미소를 가득 머금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풍채가 사뭇 여인답지 않게 떡 벌어졌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얼큰한 취기로 인한 사색쯤으로 치부하였다. 해운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왔을 때 가만히 그 자리에 멈추었다. 이런 연회는 처음인 것인지 묵직한 가체를 쳐들고 천진하게 둘레둘레 살피고 드는 여인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다.
“나랑 갑시다, 낭주.”
남자는 박력이었다. 또한 자신이 이렇게 눈초리를 한껏 접으며 입 가장을 발씬 말아 올렸을 때 남들 눈에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비치는지 해운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목소리를 낮게 깔고 단숨에 여인의 손목을 잡으며 스스럼없이 돌려세웠다. 갑작스러운 힘에 놀랐는지 여인의 가체가 기울면서 잠시 휘청거렸다. 답삭 허리를 안아 받치고 비스듬히 시선을 맞추었다. 키대가 엇비슷하여 코앞에 자리한 검자줏빛 면사가 한순간 펄럭였다. 그 사이로 비밀스레 감추었던 투명하고도 맑은 살결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데….
“…….”
“…….”
아름다웠다.
눈에 비친 여인의 얼굴이 너무도 아름답고 신비스러워, 해운은 그대로 넋을 놓고 말았다. 놀라 크게 뜨인 눈동자는 연하고 말간 물빛으로 슴벅대며 당황한 기색이 가득 차올랐다. 날 때부터 벽해 최고의 미남자로 불렸으며 금성에 들어서도 다향원이라는 꽃밭에 안기어 살아온 해운조차 그 특별한 아름다움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해운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우아한 눈시울 사이로 맑고 은은하게 반짝이는, 마치 천상에서 하강한 선녀나 지녔을 법한 이 말갛고 푸른 눈동자라니. 해운은 자기도 모르게 떨리는 손으로 여인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그대의 눈동자에… 하늘이 있군요.”
“…….”
그런데 그 순간 여인의 눈두덩이 움찔 떨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깎은 옥처럼 매끈하던 미간이 우악스레 콱 구겨졌다.
“아, 개씹.”
여인의 붉은 입술에서 별안간 냉랭한 사내의 저음과 함께 나지막한 쌍욕이 새어 나왔다. 놀라 피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단단한 돌주먹이 해운의 명치에 퍽 하고 박혀 들었다.
“헉!”
“해운! 이보게!”
신통 향선들이 허둥지둥 달려오고 해운은 그대로 배를 감싸 쥔 채 몸을 고부라뜨렸다. 여인은 퍽 더러운 걸 만졌다는 듯 주먹을 허공에 대고 탈탈 털어 내다가, 마침 웬 복면을 쓴 사내가 곁으로 다가가 뭐라고 뭐라고 타박을 하자 시큰둥하게 가체나 좀 받쳐 달라면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발악을 하는 신통 향선들을 뒤로하고 슬렁슬렁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놀이판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미인 경연의 장원으로 유녀 산월이 뽑히고, 벽해 제일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꽃비와 돈 비가 흩날렸다. 포도주 국화주에 잔뜩 젖어 든 권주가들이 홍련처럼 풍성한 홑단치마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농탕치기 시작하고, 녹빈은 특유의 걸쭉한 입담과 미립난 눈치로 정통 향선들 틈에 끼어 앉아 난장을 주도하고 나섰다.
“임은 품어 맛이고 잔은 차야 맛이라고, 이 밤, 마시다 까무러치기로 합의를 보는 겁니다!”
“옳거니!”
술잔이 잇대어 놓였다. 그리고 잇댄 술잔 사이에 다시 조그만 잔들을 얹은 녹빈은, 비장한 얼굴로 첫 잔을 손가락으로 톡 밀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술잔이 카랑카랑 뒤섞였다. 잡기와 다름없는 허술한 묘기임에도 이미 한바탕 건하게 들이킨 이들은 소리 높여 환호하는데, 그 와중에 홍의는 죽을 맛이었다. 아까부터 듣도 보도 못한 한 여장 남기가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홍의의 앞에 직접 엄지를 담가 휘휘 저은 혼돈주를 대접째로 내미는 것이었다. 홍의는 아연실색하였다.
“이걸 사람 먹으라고 내놓은 게냐? 대체 너는 누구기에 아까부터 내게 달라붙어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느냐?”
여장한 사내는 팔뚝인지 장딴지인지 모를 튼실한 팔뚝을 들어 올려 가체를 받치며 고개를 숙였다.
“녹빈의 동기인 군영이라 합니다.”
“이름이 구녕이라고…?”
“예, 군영입니다.”
홍의는 등줄기에 오한이 드는 느낌에 엉덩이를 밀어 군영에게서 한 치쯤 떨어졌다.
“미안하지만 나는 말술이 아니어서 이리 과도한 양은 삭여 낼 수 없다.”
그러자 상석의 미함 곁에 붙어 있던 녹빈이 난데없이 쩌렁쩌렁 육성을 내질렀다.
“저 정도도 한입에 털어 넣지 못한다면 그것을 어찌 사내대장부라 할까요! 허우대만 말짱한 속 빈 강정이라고 스스로 떠드는 꼴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나리들!”
“그러게, 홍의 오늘따라 왜 이리 점잔을 빼나? 사내답지 않게!”
“흐흠, 그래, 이런 날까지 점잖게 구는 것이 사내로서 자랑은 아니다.”
분위기에 한껏 취한 미함마저 고개를 끄덕이자 향선들은 다 같이 홍의의 고추 실존 여부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어이없어 헛웃음을 치고 있는 홍의 앞으로 마소조차 받아 삼키지 못할 어마어마한 양의 대접이 다시 들이밀렸다. 온몸으로 발악을 하며 거부하던 홍의는 결국 군영에게 양팔을 결박당했고, 비명을 내지르는 그의 입으로 정확한 비율에 의거한 혼돈주가 마치 사약처럼 들이부어졌다.
“색절편입니다, 나리.”
“우욱…. 싫어!”
안주랍시고 술에 푹 저미어 흐물흐물해진 절편을 홍의의 입술 사이로 욱여넣는 군영은 녹빈의 친구답게 팔심이 여간 좋은 것이 아니었다. 마침 녹빈은 멀찍이서 눈을 빛내며 홍의의 볼이 달아오르고 눈이 개개풀리며 기어이 취기로 물드는 과정을 낱낱이 살펴보고 있었다.
‘모든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구나. 이제 우리 전하만 당도하신다면…!’
살며시 접선으로 입을 가린 녹빈에게서 낮고도 게걸스러운 웃음이 트흐흐,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