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37화 (37/111)

#37

작년의 가뭄으로 만백성이 허기지고 목이 탔으니 올해는 비를 기린다. 양은 태양이요 음은 비를 뜻하니, 백성들은 온 땅을 흠뻑 뒤덮을 비의 여신이 벽해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몸을 빌어 현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때문에 이날의 주인공으로 추대된 유녀 산월을 품을 수 있다면 벽해의 사내로서 양과 음의 조화를 몸소 체현하는 광영을 누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두 받고 살꽃을 파는 여타 유녀들과 달리, 산월은 오늘 밤 스스로 자신의 대지에 실뿌리를 뻗고 싹을 움트게 할 뭇별을 입맛대로 골라 딸 수 있었다. 채전은 이미 듬뿍 쌓였고, 기왕이면 다홍치마랬다. 다리 사이에 늘어진 배를 끼우고 몇 번 씨근거리다 나가떨어질 늙다리 영감들보다야, 젊고 청초한 청년과 긴긴 밤을 만끽하는 것이 몸도 맘도 만족스러울 터였다.

“나리, 연회가 한창인데 어찌 벌써 만취하셨나요?”

산월이 한 송이 훈화초처럼 탐스럽고 요염한 자태로 사푼사푼 걸어 들어 간살스러운 음성을 내었다. 그에 붉은 정복 갖춘 너른 등이 한 번 꿈틀거리며 반응했다. 산월은 야들야들한 손가락으로 술독에 절인 듯 축 늘어진 홍의의 어깨를 짚어 보았다. 마침 녹빈은 누군가를 마중하러 간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군영은 맡은 바 임무를 끝내고 다른 귀족들을 응대하러 간 참이라 홍의의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주변은 귀청이 따가울 만큼 시끄러웠다. 혼돈주를 연속해서 들이킨 다른 정통 향선들도 얼근히 취하여 사리 분별을 못 하고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홍의는 문득 귓가를 쓰다듬는 보드랍고 따뜻한 손길을 느끼고 멍한 얼굴을 들었다. 취중에도 눈앞의 여인이 굉장한 미인이라는 사실은 인지할 수 있었다. 위로 약간 쳐들린 검은 눈동자로 나른한 시선을 보내며 풍만한 가슴을 슬그머니 붙여오는 산월에게서는, 충만하게 달뜬 음기와 알싸한 사향내가 뒤섞여 풍기었다.

“아… 내가 혼돈주를 거푸 마시고.”

평소 사향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홍의는 순간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파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정신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앞이 어지러웠다. 와중에도 산월은 몇 시진 전에 보았던 홍의의 꾸밈없는 미소를 떠올리자 괜스레 몸이 달았다. 또한 너른 등판을 웅크리고 두통에 인상을 찡그린 채 색색 아이처럼 숨을 내쉬고 있는 그가 이유 없이 짠하고 귀엽기도 하였다. 산월이 부드러운 손길로 홍의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홍의의 등허리로 단단히 근육이 서더니, 조금 놀란 것처럼 돌아본다. 산월은 오히려 더 뻔뻔히 마주 보았다.

“…여러모로 수고가 많겠구나. 고맙다.”

계면쩍은 미소와 함께 읊조리는 음성이 맑고 잔잔했다. 눈빛도 그러하였다. 순간 산월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에 잠시 숨을 멈추었다. 밤새도록 암퇘지 부리듯 흘레붙고도 따로 자리끼를 준비하지 않았다며 역정을 내는 사내들만 봐 왔다. 다담상에 손가락이 얼얼하도록 안주를 집어 주고 잔을 채워 주어도 무어라 한마디 일별조차 없이 어깨부터 밀어뜨리고 속속곳을 벗기려 드는 사내들만 가득하였다. 어느 누가 길가의 버들을 향해 인사를 건네고 이름 모를 풀꽃에게 고마움을 표하겠는가? 노류장화의 삶이란 본디 그런 것이니 억울한 마음도 달리 없었고, 그저 이 사내의 다부진 몸과 출중한 외모가 썩 맘에 찼을 뿐이었다.

그런데 사내는 뜻밖에도 고맙다고 말했다. 채워 준 잔도 내어준 몸도 아닌, 그저 다독거림 한 번에 말이다. 열없는 심정에 산월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가슴도 기분 좋게 들떠 올랐다. 장원을 하여 옥갑이 두둑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토록 멋진 사내까지 만났으니, 오늘은 그야말로 산월의 날이었다. 자신감으로 충만해진 낯을 들어 올리며 산월은 그 어느 때보다 농밀하게 미소 지었다.

“나리, 오늘 밤은 제가 뫼시겠습니다.”

“…뭐?”

대관절 낯선 여인의 교용에 홍의는 깜짝 놀라 취기가 확 가신 얼굴을 하였다. 그에 더욱 애가 탄 산월은 홍의의 손목까지 잡아 흔들며 채근하였다.

“오늘 회합에 장원을 한 산월이라 합니다. 미의 여신께서 비님을 품고 소녀에게 내렸으니, 더불어 동침을 하신다면 틀림없이 나리께도 길할 징조랍니다.”

홍의는 입을 멍하니 벌린 채 스스로 미의 여신의 재림이라 일컫는 산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맹신하고 그 사실을 과시하는 그녀의 모습 위로, 어쩐지 누군가의 가만히 내리깐 물빛의 눈동자가 스쳐 지나는 듯했다. 그는 이 여인과 달리 자신의 아름다움을 믿지 못하고 철저히 외면하였다. 또한 그렇게 갖은 모욕과 멸시 속에 살면서도 누구보다 수줍은 볼웃음을 지어 보이곤 하는 희한스러운 사람이었다.

‘…홍의야.’

이상한 일이었다. 어찌하여 지금 이 순간 그 음성이 떠오른 것인가. 어떻게든 머릿속을 비우겠다는 강다짐으로 이처럼 내키지도 않는 도경 연회에 쫓아 든 것인데, 사실 취하면 취할수록 태자의 담담한 음성과 차가운 손끝과 말간 눈빛이 더욱 또렷해지니,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홍의는 복잡한 심경으로 산월을 바라보았다. 귀족 청년 앞에서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당당하게 합일을 요구하는 본새가 요망하고 앙큼하기도 했다. 홍의도 사내인지라, 산월의 맑은 눈빛과 당돌한 여랑의 태도에 불쑥 호기심이 동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진심 없는 색사는 한갓 난질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홍의는 이런 방면에 있어 영 촌스럽고 고집 센 사내였다.

“네 뜻은 갸륵하다만, 이제 막 안면을 튼 여인과 동침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홍의는 잠자코 웃으며 산월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산월은 더 꼭 쥘힘을 쓰며 오만한 고개를 치켜들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셔요. 오늘 밤 이 자리에 소녀보다 아름다운 여인이 있는지요?”

“…….”

그때였다. 문득 향비파 가락이 드높아지고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한층 거세어지는데, 그 만냥판의 틈을 뚫고 상쾌한 새물내와 난향이 풍겨 들었다.

산월은 막 자신의 귓가를 스치는 백포 둘린 어깻죽지를 느끼고 고개를 꺾어 무심코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생경한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말았다.

“비님이 오신다!”

“미의 여신께서 풍운을 일으키며 지상에 내리셨도다!”

마침 연회장 바깥의 내정으로 장대비가 쏟는지 민인들의 환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비를 몰고 나타난 그 신비스럽고도 낯선 여인은, 넋 빠진 산월을 그대로 지나쳐 홍의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손목을 거칠게 붙들어 어디론가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

홀로 남은 산월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만 검자줏빛 면사 틈으로 언뜻번뜻 비치던 푸른 눈동자, 그 짧은 일별의 순간에도 얼음송곳처럼 서늘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차가운 물빛의 시선만이 아찔한 시야에 어렴풋할 뿐이었다.

***

‘누군가를 연모하면, 그 사람의 뒤편에서 꼭 만월 보살님처럼 해사한 광채가 쏟는 법이란다.’

홍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한갓 인간 따위에게 후광이 들다니 죄 헛소리지. 그저 사랑이라는 감정에 몹시 도취한 나머지 선잠의 봄꿈처럼 잠시 잠깐 꾸고 마는 환상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답삭 믿고 보았을 홍의조차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만큼은 영 뜬 소리 같고 객쩍어 듣는 둥 마는 둥 딴청이나 부렸던가 보다.

그런데, 바로 지금, 정녕 그 기이한 광대(光帶)를 등 뒤에 매어 찬 한 사람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말았다.

아지랑이처럼 살랑거리는 검자줏빛 쓰개가 벌어지고, 백분 묻힌 낯빛과 홍보석처럼 붉은 입술이 기가 막히게 어우러진 미모가 드러나자 가슴이 두근대다 못해 뻐근하게 옥죄는 듯했다. 참으로 요사스러운 일이었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머리를 저릿저릿하게 만들던 두통이 씻은 듯이 가시는가 싶더니 아무래도 가슴께로 흘러들었는지도 몰랐다. 그 사람이 한 발 한 발 다가들 때마다 빛도 아름다움도 강해져, 눈이 부실 정도였다.

하지만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것이고 기가 막히는 건 기가 막힌 것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손목을 우악스레 잡쥔 두 사내, 아직 취기가 남은 홍의와 칠보단장을 꾸린 태자가 꽁지에서 바람 소리가 나도록 허둥지둥 연회장을 벗어났다. 태자는 자꾸만 엉기는 치맛말기를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고 짜증스럽게 걷어붙였다. 어기적어기적 비척걸음도 우습고, 구름처럼 커다란 가체를 물동이라도 받든 양 한 손으로 쥐고서 쉬이 목도 가누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아이고아이고, 침음이 절로 새었다. 마침 빈 내실을 발견한 홍의가 서둘러 문을 열고 그리로 태자를 끌고 들어갔다.

“이 무슨 행보입니까? 혹여 지난번처럼 황후 마마께 일별도 없이 몰래 밤 나들이를 나선 것은 아니시겠지요? 대체 그 해괴망측한 차림새가 다 무어란 말입니까?”

답할 여유도 주지 않고 쏟아붓는 잔소리에 태자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딴 곳이나 보았다. 홍의는 슬슬 깨어 가는 술기운에 머리를 다 싸쥐었다. 나라의 국본이자 장차 이 나라의 황제의 위에 오를 황태자가 색주가 남창들이나 챙길 여장을 꾸리다니, 이는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솟구칠 일이었다.

“설마 녹빈이 놈에게 물들어 망극하게도 여장에 취미를 붙이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

“전하…?”

왜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란 말인가. 순간 더럭 겁이 난 홍의는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며 태자의 지척으로 다가가 붙었다.

“어찌 대답도 않으시고 눈도 맞추지 않으십니까? 정녕 제 말이 맞는 것입니까?”

‘…홍의는 사실 난봉꾼인가.’

사실 태자는 영 딴생각을 하느라고 대답할 겨를이 없던 것뿐이다. 연홍을 금성 밖으로 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유녀와 밀담을 나누며 씽글씽글 웃고 있던 홍의가 자꾸만 떠올라 짜증이 울컥울컥 솟았다.

태자는 홍의의 어깨 너머의 향기롭고 푹신해 보이는 침상을 잠시간 응시했다. 이대로 홍의의 사지를 매몰하게 결박하여 밤새도록 울며불며 매달리도록 사정없이 물어박지르고 싶었다. 언젠가 저를 좋아하는 여인을 줄 세우면 구지를 꽉 채운다기에 시답잖은 헛소리라 여겼더니 어쩌면 사실이었는지 모른다. 하나 퇴치하면 또 하나가 엉겨 붙는 꼴이라 심사가 다 비틀리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음을 얻겠답시고 죽 쒀서 개 대접할 바에야 코앞에 보이는 몸뚱이라도 취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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