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홍의는 시커먼 밤의 숲을 걷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두운 산세가 익숙하고 전혀 설지 않은 것을 보니 언젠가 향선들과 밤마을을 나섰던 남산의 깊은 협곡 어딘가에 빠진 건 아닐까? 무심하게 발밤발밤 걸었다. 문득 고개를 쳐들어 밤하늘을 확인하니 물을 머금은 달이 진하게 번져 붉은 달무리를 띠고 있었다.
망연히 밤하늘을 보다 시선을 내렸을 때, 홍의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의 검은 눈동자 위로 비친 푸른 불빛이 어른어른 흔들렸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연푸른 불꽃이 요사스럽게 흔들리며 허공을 휘돌았다. 홍의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손을 그대로 통과했다. 뜨겁지도 않았고 모양이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도깨비불이로구나.’
홍의가 깨달음과 동시에 망령들의 탁한 웃음소리가 사위를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홍의는 두려움에 허리춤을 더듬었다. 다행히 칼이 매달려 있었다. 칼을 뽑아 요사스러운 도깨비불을 향해 마구 휘저었다. 닿지 않았다. 불은 날래게 휘어 이리저리 잘도 빠져나갔다. 칼을 휘두르는 팔이 물이라도 먹은 것처럼 무거워졌다. 약 올리듯 눈앞을 배회하던 도깨비불이 문득 휭하니 허공을 박찼다. 너르고 길게 호선을 그리며 뻗어 나간 그것이 열 보 앞에 있는 우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홍의는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차돌로 쌓은 둥근 돌담과 참나무로 삼은 지붕은 아무리 봐도 이 산중에 어울리지 않았다. 홀린 듯이 다가가 튼튼해 보이는 도르래를 만져 보다 조심스레 우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깊은 우물이었다. 어두운 허구렁 안에 작은 사내아이가 옹송그리고 앉아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눈구멍에 도깨비불이 붙어서 시퍼렇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눈이 아프다.’
우물을 돌아 오른 소리가 귓구멍을 웅웅 울렸다. 아이의 눈구멍에서 검은 재가 툭툭 부서져 흩날렸다.
***
비가 그친 창호 너머에서 첫닭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삼 경쯤 되었을까. 잠자코 시각을 셈하던 태자는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살짝 고개를 틀어 아스라이 흔들리는 주홍 등불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몽롱하다. 태어나 한 번도 태자궁 침전이 아닌 곳에서 잠들어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새하얀 기숫잇 씌운 비단 금침에 익숙한 몸뚱이는 낯선 침상, 낯선 이불, 인공적인 나무 냄새 등이 영 설고 불편하였다.
말없이 흔들리는 등불을 바라보고 있던 태자가 문득 옆자리의 고른 숨결을 찾아 몸을 돌렸다. 홍의의 단단하고 단정한 옆얼굴이 코앞에 놓여 있었다. 물빛 눈동자로 희미한 미소가 차올랐다. 빗물에 씻긴 달빛이 방 안까지 침투하여 온통 은은하였다.
다음 순간, 홍의의 눈이 반짝 뜨였다.
홍의는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분명히 눈을 뜨기 직전까지만 해도 꿈의 내용이 생생하였는데, 잠시 후 고개를 틀어 옆자리를 바라본 순간 까무룩 잊어버리고 말았다.
홍의는 멍하니 코앞의 태자를 응시하였다. 태자 또한 갑자기 눈 뜬 홍의를 보고 놀라는 기색 없이 베갯잇에 가만히 볼을 붙이고 한참을 말없이 마주 보았다. 꼭 붙어 있던 태자의 입술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조금 떼였다. 홍의는 잠자코 집중했다.
“…찍.”
“주무십시오.”
홍의가 벌떡 상체를 일으켜 침상을 내리려 하자 등 뒤에서 팔이 쑥 튀어나와 홍의를 다시 침상에 내리눌렀다. 등 뒤에 찰싹 달라붙은 부들부들한 살갗의 온기와 귀에 닿는 숨결이 여상하였다. 코로 한숨을 내쉬던 홍의가 몸에 힘을 풀고 다시 태자를 돌아보았다. 민망했다. 조금 갈증이 나는 것도 같다. 홍의는 메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간밤에는 소신이… 만취하여 그런 것입니다.”
“…….”
“지난번엔 약 때문이었고 간밤엔 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합니다. 절대 소신이 조루인 것이 아니오라….”
“…….”
“다음번에는 반드시 전하의 파정을 도울 수 있도록 노력, 또 노력할 터이니… 이번 추태는 제발 잊어 주….”
“부럽다.”
“…예?”
“너는 매번 양물을 만지지도 않고 찍 하잖아.”
“…….”
“그거 언젠가 정모들한테 들었는데, 손 안 쓰고 황홀경에 이르는 것도 경지래. 경지.”
빌어먹을. 또 이것으로 책잡혀서 한동안 찍찍거리게 생겼다. 홍의는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뭉갤 듯이 세게 마른세수를 하고는 묵묵히 태자를 바라보았다. 맨살을 전부 드러내고 멀뚱멀뚱하기에 행여 감환이 드실까 싶어 포단으로 목 밑까지 꼭꼭 여며 드렸다.
“아직 동이 트려면 멀었건만 어찌 더 주무시지 않고요.”
“너는? 갑자기 깨던걸.”
“그러게요…. 무언가 몹시 두렵고 서글픈 꿈을 꾸었던 듯한데.”
“응.”
“눈 떠 보니 전하의 용안이 보여 전부 까먹었지 뭡니까.”
태자가 소리 없이 조금 웃었다. 홍의도 따라 웃었다. 나란히 마주 누워 베개에 볼을 대고 바라보려니 어둠 속에서도 말갛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질리지도 않고 신비스럽기만 했다. 이제는 보지 않아도 눈에 맺힌 상이었다. 매일 틈날 때마다 손수 그려 내면서도 감탄스러워 경외하는 얼굴이었다. 소녀처럼 날렵한 콧대, 살굿빛 고운 입술, 곱고 결이 촘촘하며 누르면 물이라도 함빡 나올 것처럼 촉촉한 피부… 고운 얼굴은 화를 낼 때도 고왔고 웃을 때는 더 고왔고 보고 있자면 벅차올랐다. 그러다 보니 돌연히 묻고 싶었다. 어찌하여 눈동자가 그런 빛깔을 내시는지. 망설이던 홍의가 입을 떼려던 찰나, 태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는 왜 늘 붉은 옷을 입지?”
홍의가 잠시 뜸을 들이다 답을 올렸다.
“어머니가 살아생전 가장 좋아하시던 색입니다.”
“…….”
“또한 홍의, 붉은 뜻이란 정의와 의리를 뜻하지요. 위로는 대의를 위해 아래로는 벗을 위해 죽는다는 향선의 이념을 몸소 받들기 위해 부러 붉은 옷을 지어 입습니다.”
“그대는 어머니를 몹시 좋아했나 봐?”
태자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묻고 있었다. 홍의는 잠시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저런 질문을 몹시 궁금하다는 듯 건네는 것인가. 본인의 사랑이 모나고 실금이 터졌다면 남의 사랑도 같은 모양으로 이해하는 걸까.
“소신은 여염에서 나고 자란 터라 궐내의 사람들이 어찌 맘을 나누고 정을 붙이며 사는지는 잘 모릅니다. 허나 부모 자식 간의 끈덕진 핏줄 아래 좋고 싫고를 따지어 뭣하겠습니까?”
태자는 대답 없이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음…. 전하의 아명은 누가 지어 주신 것입니까?”
“어머님.”
“물론 고울 여 자에 물결 운 자를 쓰시겠지요?”
“그건 어찌 알았어?”
홍의는 잠깐 웃었다. 투명하고 맑은 연안의 물을 부어 놓은 듯한 눈동자와 옥을 깎아 놓은 듯 맵시 있고 아름다운 생김생김을 두고 지레짐작한 것뿐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황후 마마의 마음이 물씬 느껴지는 이름이군요.”
“…….”
태자가 문득 몸을 돌려 똑바로 누웠다. 천장을 노려보는 반듯한 옆얼굴이 새삼 싸늘하였다.
“또 함부로 입을 놀리는군.”
고요한 무표정이었지만 분명히 성이 나서 할기족족하였다. 이토록 불시에 휙휙 바뀌어 버리는 태자는 참으로 적응하기 어렵고 여러 번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어머님께 가장 많이 들어 본 말이 무엇인 줄 알아?”
“…….”
“‘고 숭한 눈’이야.”
“…….”
“어디 고 숭한 눈 좀 보자, 고 숭한 눈 좀 가리어라, 고 숭한 눈을 하고 어딜 싸돌아다니느냐, 고 숭한 눈으로 뭘 잘했다고 눈물 바람이냐, 고 숭한 눈으로, 고 숭한 눈 고 숭한 눈….”
태자의 말소리가 점차로 잦아들며 늘 그렇듯 긴 속눈썹을 내리깔아 살며시 눈동자를 가렸다. 홍의는 잠시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묵묵히 손을 뻗어 태자의 눈 밑을 어루만졌다. 상처를 대하듯 가만가만, 부드럽고도 촉촉하게 매만졌다. 홍의의 엄지손가락이 눈 밑을 부빌 때마다 익숙지가 않아 태자의 눈두덩이 살짝살짝 찡그려졌다.
“고 숭한 눈이라고요? 거꾸로 하면 숭고한 눈이네요.”
“…….”
“허긴, 이토록 아름답고 고귀한 눈동자가 또 있을까요? 소신이 관상을 조금 볼 줄 아는데 말입니다. 눈동자에 하늘과 바다가 동시에 담겼으니 반드시 태평성대 요순시절을 이루시는 성군이 되실 거예요. 틀림없습니다.”
잠시 무표정으로 아연하던 태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밌어?”
“흐흐. 예.”
홍의는 이를 씩 드러내고 넉살 좋게 웃고 있었다. 허무맹랑한 소리였지만 그렇게 아무려나 웃고 있으니 결국 태자조차 헛웃음이 나는 것이다. 늘 눈치코치 없고 하나부터 열까지 유쾌하기만 하여 도무지 웃지 않을 수 없다. 그 앞에서라면 모든 세상만사가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았다.
“전하.”
“응.”
홍의는 여전히 태자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전하의 눈동자에 어찌 하늘이 담기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순간 태자의 푸른 눈동자로 슬픈 듯도 하고 두려운 듯도 한 어지러운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곧바로 파도가 멈춘 바다처럼 고요히 가라앉았다.
“아니. 여쭙지 마.”
무미건조하게 읊조린 태자는 무어라 대답을 올리기도 전에 와락 입술을 덮쳐 왔다. 홍의는 건듯 놀라 뜨인 눈을 짧게 깜빡거리다가 느리게 파고드는 혀를 느끼고는 질끈 눈을 감았다. 더듬더듬 태자의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등을 껴안았다. 두 다리로는 허리를 엇갈려 감았다. 태자의 단단하게 굳어 있던 몸뚱이가 순간 녹작지근하게 풀리는 듯하더니, 나지막이 앓는 소리를 내며 더 꽉, 틈도 없이 껴안는다.
그렇게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엎치락뒤치락 침상 위를 뒹굴다 결국은 홍의가 태자를 아래 깔고 올라탔다. 꽉 죄어 문 입술들이 늘어졌다. 요사스러운 짓거리를 행한다는 자의식은 있었으나 죄의식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뻔뻔하게 물고 빨고 핥는 농탕질을 즐기다가 백옥처럼 눈부신 사내의 나체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홍의의 입술과 혀가 태자의 울근불근 굴곡진 복근을 타고 내려가 가슬가슬하고 수북한 음모에 닿았다.
이번에야말로 진정으로 원했다. 턱밑을 묘한 감촉으로 문지르는 뜨듯하고 묵직한 뿔, 가장 비밀스럽고 요사스럽고 거만하면서도 수줍은 살덩이를 다시 한번 뜨겁게 맛보고 싶었다. 아까 태자에게 배운 대로 아직은 힘을 받지 못해 말랑한 기둥을 붙잡고, 부숭부숭 말라 있는 귀두를 혀에 대고 진득하게 문질렀다. 태자의 탄탄한 복근에 흠칫, 하고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하….”
태자가 낮게 신음하며 홍의의 머리칼을 아프지 않게 그러쥐었다. 전하께서 좋으신가 보다. 홍의는 어린애처럼 신이 났다. 뭉근하게 이리저리 휘어지던 기둥이 점차 힘을 받아 입 안을 가득 메우는가 싶더니 결국 꼿꼿하게 발기하여 여린 목구멍 안쪽까지 왁살스레 찔러 댔다. 홍의는 올칵 솟구치는 욕지기를 두 눈 질끈 감고 버텼다.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물이 맺혔다.
“흡… 하아.”
미끄덩거리며 입 사이를 튕겨 나간 귀두가 물기를 반드르르 머금은 채 꽃분홍으로 빛났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반드시! 사기가 타오른 홍의의 두 눈도 번뜩 빛났다. 묘한 색으로 번들거리는 성기의 겉면을 붙들고 위아래로 야살스럽게 흔들어 보았다. 머리카락을 헤집던 태자의 손이 슬슬 내려와 홍의의 귓불을 붙잡았다.
“하… 홍의야.”
“예, 저아.”
입에 한가득 문 성기 때문에 발음이 뭉개져서 나갔다. 태자의 붉게 달뜬 목덜미가 깊게 호흡하는 듯 움푹 팬 뼈대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태자는 제 샅에 웅크린 홍의에게로 살며시 상체를 숙여 왔다.
“너 진짜….”
홍의가 고개를 들었다. 한 치 앞의 가까운 거리에서 비밀스레 마주친 태자의 뽀얀 얼굴로 발그레한 볼웃음이 번졌다.
“더럽게 못한다.”
“…….”
쩌적.
홍의는 그대로 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