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44화 (44/111)

#44

크큼, 잠시 목청을 가다듬은 옥지는 턱을 치켜들고 눈을 내리깔았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전하께오서 내자들을 극구 거부하시어, 실제로 합방에 성공한 분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홍의가 눈동자를 슥 까올렸다.

“허면, 정녕 전하께오선 제대로 된 방사를 치러 본 적이 없다?”

“그런 줄로… 압니다.”

어휴 더워라. 처녀 입으로 참. 옥지는 먼눈을 던지며 열이 오르는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였다. 와중에도 홍의는 어지간히 충격받은 몰골이었다.

‘뭐야. 허면 전하나 나나 그 짓거리 경험에 있어서는 거기서 거기, 오십보백보란 소리 아녀.’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홍의는 엄지손톱을 까득까득 물어뜯으며 사색에 잠겼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옥지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무어가 말씀이십니까?”

“옥지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홍의가 옥지를 매섭게 응시하기 시작했다. 옥지는 황망하게 되물었다.

“소인이 잘못 알고 있다니요?”

“생각을 해 보렴. 여인을 품어 본 경험도 거의 없으신 분이 그토록 능수능란하실 순 없는 노릇 아니냐. 아무래도 궁인들조차 몰래 전하께서 밤놀이를 도시나 보다. 옥지 너에게도 비밀로 하고, 이 여인 저 여인, 이 사내 저 사내 죄 후리고 다니시는 게 틀림없다!”

“…홍의 님! 어찌 그리 불충한!”

반쯤 맛이 간 홍의는 자기도 모르게 무시무시한 불경지설을 토로하였고, 옥지는 기함을 하며 눈을 부릅떴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소인이 전하를 모신 햇수만 십오 년입니다. 전하는 소인이 가장 잘 압니다!”

“아니라면, 어찌 그리도 태연자약하고, 어? 망측하고, 어? 기술도 완전히 뜨르르하고! 아주 그냥 어부처럼 휙휙 사람을 낚고 사람을 완전히 녹여 버리시더라니까? 옥지 네가 봤어야 해! 대체 어찌 그럴 수 있나? 경험도 없는 일에 그리 빠삭하고 능수능란할 수가 있느냐?”

홍의가 삿대질까지 하며 횡설수설하자 옥지도 치맛자락을 쥔 양 주먹을 팍팍 내리치며 불쑥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서슬이 어찌나 시퍼렇고 매서운지 홍의는 딸꾹, 하며 입을 다물고 한 발 물러섰다.

“전하께오선 그 누구보다 고결하고 순결하십니다! 다만 그 색사의 기교란 것에 있어서는…!”

“있어서는?”

옥지는 움푹 팬 까만 눈 밑을 옴찔거리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하였다.

“그저, 타고나신 것뿐입니다.”

“……!!!”

홍의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

홍의는 태어나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열등감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제 음경 크기가 태자보다 살짝, 아니 좀 많이 작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굳이 대물이 중요한가? 대물이 밥을 먹여 주고 대물이 나라를 지키고, 대물이 무동들을 먹여 살리며 대물이 부모님을 공양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양물은 양물답게 잘 서고 잘 싸면 그만이라고 합리화를 하는 순간, 세상이 다시 평온해지고 자존감은 물밀어 들었다. 잘 싸지름에 있어 이 벽해에 홍의만 한 인재가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홍의는 방중술에 깊은 지식을 두지 않았던가?

하지만 뒤늦게야 알았다. 아무리 선도 방술을 줄줄이 꿰고 방대하고 엽렵한 지식을 쌓았더라도 선천적으로 그 짓거리에 타고난 자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을.

옥지의 말과 스스로 겪은 바에 의하면 태자는 색사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밤의 호색꾼이었다. 기술로서 지상 최대의 춘궁 비록을 자아낼 풍류 나비 색골. 대체 그런 자를 무슨 수로 만족시킨단 말인가?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했거늘, 결코 이겨 먹을 수 없는 상대라면 초심대로 파정이라도 시켜 보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 우후죽순 자라나는 자괴감을 조금이나마 떨쳐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헌데 그러한 기회조차 주지 않고 내빼?’

홍의의 코끝이 씰룩였다. 마음도 말갛게 비었다.

‘그래도 오후에 기침하셨다니까 저녁 무렵엔 따로 찾으실 줄 알았는데, 당최 기별도 없으시고.’

하아. 한숨과 함께 내다본 창밖의 달빛이 더욱 서럽기만 하였다. 정통 향선들이 남산의 누마루로 밤놀이를 가자며 꼬드기는 것도 아스라이 손을 흔들며 거부하고, 이렇게 홀로 처소에 남아 그리운 님 초상화나 그려 대려니 참으로 청승이 가중이렷다.

이럴 때는 미주 가효도 아무려나 쓸모없었다. 마음이 이토록 헛헛한 바에야 닥치고 그림에나 몰두하는 편이 나았다. 다만 남산 누마루의 달빛 머금은 연못 위로 이맘쯤 붉디붉게 피었을 배롱나무의 백일홍을 보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쉬웠다. 더위가 기승할수록 오동보동 탐스럽게 물오르는 고 새빨간 꽃나무.

“전하께서는 남산 누마루에 가 보셨을까.”

기회가 된다면 전하와 그곳에 유오를 나서 단둘이 차도 마시고 꽃도 보고…. 연못 위에 만개한 연꽃과 배롱나무 꽃 사이에서 흐드러지게 웃는 태자를 상상하니 입이 절로 째지고 양 볼에 홍조가 올랐다. 그렇게 먹물이 옷소매를 적시는 줄도 모르고 으흐흐, 음흉한 웃음을 질질 흘리고 있는데 바깥에서 또 하나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껄껄껄. 껄껄껄.”

홍의는 순식간에 뱁새눈을 뜨며 반색했다. 마침 창밖의 다향원 내정을 가로지르는 것은, 우람한 몸피에 터질 듯한 연분홍 시녀복이었다. 요상한 낌새에 냅다 붓을 던진 뒤 처소 밖으로 나와 보니, 재바른 녀석은 그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껄껄껄, 나리도 차암.”

“너 웃을 때 때리는 버릇 좀 고쳐… 참말로 아프다….”

“껄껄껄, 농담도 차암.”

“아악! 진짜로 아프다니까…!”

희미하게 울리는 말소리를 쫓아 슬금슬금 담장을 따라가 보았다. 담벼락 너머로 고개를 쭉 빼고 매화 숲을 건너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녹빈이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라 한 무동을 꽁무니에 매달고 있었다. 어쩐지 석 달은 굶은 것처럼 비쩍 말라 있는 게 영 보기 안쓰러웠다. 실제로 그 무동은 녹빈에게 호구 잡혀 열세 번째 개구멍서방이 된 자로, 녹빈의 야살에 홀려 가세 탕진 직전에 놓인 불운의 사내였다.

“아니, 난 이런 곳은 싫은데…. 무서운데…. 이렇게 금성 안에서 대놓고 남색을 하였다가 향선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멸치 무동은 새카만 사위를 두리번거리며 안 그래도 좁은 어깨를 더욱 오므리고 덜덜 떨었다. 녹빈은 희멀건 가루 분칠 위 푸르스름한 수염 돋은 얼굴로 돌아보며 껄껄껄 웃었다.

“빈이가 곁에 있는데 무섭긴 뭐가 무서우셔요? 깍쟁이 같으시긴.”

“…네가 있어서 더 무서운 건데….”

“아아, 달님과 메아리가 우리들의 흥취를 돋울 것이어요! 내숭 고만 떠시고 바지를 벗어 주시겠어요? 저는 이렇게 나리와 야외 합을 꼭 즐겨 보고 싶었다고요!”

마침 담장에 팔과 얼굴을 걸치고 있던 홍의는 반쯤 썩어 들어가는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아주 똥을 싸라. 똥을 싸.”

“으헉! 호, 홍의 님!”

“에그머니! 나리!”

대관절 홍의의 등장으로 두 사내는 동시에 돌아보며 기겁을 했다. 대체 저놈은 이 금성에 상주하며 무슨 난질을 벌이는 것일까. 기도 안 차서 싸늘하게 내려다보려니, 잠시간 흠칫흠칫 홍의의 눈치를 살피던 멸치 무동은 그대로 토도돗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멀어지는 비쩍 마른 등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녹빈이 이내 표독스레 눈을 치뜨고는 홍의를 매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대체 나리는 뭐 하는 분이여요? 어찌 잘 밤에 잠은 안 자고 쥐새끼처럼 싸돌아다니며 남의 대놀음에 훼방을 놓아요, 훼방을 놓기는!”

홍의는 아예 훌쩍 담에 뛰어올라 풍류랑의 자세로 걸터앉아서는 빙글빙글 웃었다.

“내가 너 좋은 일이나 시켜 주려고 잠을 자겠느냐?”

“에나? 별꼴이야, 증말!”

“…네 이놈!”

홍의는 정색을 하며 눈을 부릅떴다.

“천한 것이 하해와도 같은 성총 아래 금성에 머물기로 했으면 얌전히 본전에서 자리나 지킬 일이지, 어찌 틈만 나면 다향원까지 기어 들어와 풍기를 문란케 하느냐?”

“뭐라고욧?”

확 성질이 북받친 녹빈이 네발짐승처럼 털을 곤두세우고 캬옹거렸다.

“흥, 지엄한 척 어깃장 두지 마시지요! 그래 봤자 빈이도 다 압니다. 나리께서 왜 이토록 쓸데없이 이리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시는지 말예요.”

“뭬야?”

“나리의 사랑에는 아무런 진척이 없는데, 빈이만 요로코롬 물 만난 고기처럼 이 물 저 물 죄 휘젓고 다니니 고까우신 게지요. 암요?”

‘…저 조둥이를 내 그냥.’

다 죽을 뻔한 목숨 살려 놨더니 후안무치도 이만하면 철판이었다. 그러나 딱히 받아칠 말은 없어 그냥 쳇 하고 마는데, 끝 간 줄 모르는 녹빈은 차가운 풍류랑처럼 미소 지었다.

“저는 신령께서 사내들에게 극락을 선사하라고 세상에 낸 몸. 누구와 붙어먹고 어디서 씹을 하든지 나리가 알 바 아니지요. 고리타분한 훈계 따위 사양하겠어요.”

“…그래라.”

그러세요. 홍의는 다 귀찮고 싫은 기분에 손사래를 치며 턱을 괴었다. 다 내 죄지 싶다. 그때 전하께서 죽인다고 했을 때 못 본 척 놔둘 것을.

“그나저나 참말 어쩐 일이셔요? 아까 보니 다른 향선들은 밤마실이다 뭐다 해서 술이랑 고기랑 싸 가지고 금성을 나서는 것 같던데, 왜 야밤에 홀로 남아 청승이시람.”

읏차, 억센 팔 힘으로 어렵지 않게 담벼락에 올라탄 녹빈이 치마를 휙휙 거두어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는 홍의 옆에 털썩 걸터앉는다. 매사 괄괄하던 인간이 오늘따라 유난히 심각하고 수심이 깃든 얼굴을 보아하니 영 고민이 많은 듯 보였다.

홍의는 여전히 턱을 괸 채 고개만 돌려 심드렁하게 녹빈을 응시했다.

“그러는 네놈은 못 보던 사이 낯꽃이 활짝 피었구나. 무어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게냐?”

녹빈이 우렁차게 웃었다.

“껄꺼러껄껄! 그러믄입지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빈이는 현재 인생 최대의 전성기를 맛보는 중이랍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더니, 아랫녘장수로 통하며 온갖 늙다리들에게 상말이나 듣고 둘암캐 취급이나 당하던 이 몸이 이제야 운이 좀 트이네요, 그래. 우리 옥 같은 태자 전하와 만나고부터 아조 그냥 팔자가 폈달까요…. 아아, 전하는 정녕 빈이의 귀인이셔요. 얼굴도 고우신 분이 어찌 그리 씀씀이도 크고 어여쁘신지!”

…비죽배죽. 남의 속도 모르고 염장 지르는 소리에 홍의의 입술이 절로 위아래로 비틀렸다.

“나리, 제 얼굴을 좀 만져 보셔요.”

녹빈이 홍의의 손목을 답삭 잡아 제 뺨에 철썩 붙여 놓았다.

“어떤가요? 보들보들 매끈매끈하니 파리가 앉았다가 쭈르륵 곤두박질칠 것 같지 않은가요?”

“글쎄. 전혀 모르겠는데.”

“아아, 사내의 씨물로 흠뻑 보습을 하였더니 이토록 피부가 고와졌지 뭐예요?”

“…….”

“제가 엊그제 아주 푸지게 몸보신을 했걸랑요. 꽃같이 낭창낭창한 향선을 잡아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홀라당 꿀꺽!”

홍의의 얼굴이 슬퍼졌다. 그렇잖은가. 누구는 더럽게 못한다는 소리나 듣고 화석이 되었는데 누구는 신나게 철떡철떡 떡메를 쳤다니. 이래서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간밤을 떠올렸는지 혼자 좋아 죽는 녹빈을 가만히 응시하던 홍의는 곧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너는 색주가에 머문 햇수만 십 년이라 했으니, 사내 다루는 데엔 아주 그냥 이골이 났겠구나?”

“어머 나리, 너무 당연한 질문은 때론 실례가 되어요.”

홍의는 목덜미를 긁었다. 어쩐지 평시와 달리 얼뜬 소년처럼 쑥스러움을 타는 얼굴이었다.

“…허면 말이다.”

“예.”

“사내의 물건을 요령 있게 잘 다루는 법도 아느냐?”

예상치 못한 질문에 멈칫했던 녹빈은 다음 순간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꼭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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