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그러거나 말거나, 홍의는 진정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머리까지 싸매더니 주절주절 방언을 읊기 시작했다.
“아니 나는 참말 잘한다고 한 것이다…. 잘한다고 한 것인데. 전하께서 나더러 못한다고… 그냥 못하는 것도 아니라 드럽게 못한다고… 그것도 뻔뻔하게 웃으면서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비소인지 아니면 그냥 내 하는 꼬락서니가 어지간히 웃겨서 그러신 것인지 알 턱이 없… 아니 근데 씨불, 전하께서 무지막지 크신 걸 나라고 어찌하겠느냐? 당나귀 물건만 한 것이 목젖을 푹푹 찌르고 숨통이 턱턱 조이는데, 어휴 내가 진짜, 차마 말도 못 하겠다.”
“이미 다 말씀하셨는데요.”
녹빈은 전에 없이 인자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었다.
“좌우지간, 그렇군요. 나리께서 참말 더럽게 못하시나 보군요.”
“야! 그런 게 아니라고! 진짜 이만하셨다니까! 진짜로!”
홍의는 진정 억울했다. 그래서 또 소맷자락을 휙휙 접어 올리며 녹빈의 코앞에 제 팔뚝을 들이대며 버럭버럭 호소하였다. 녹빈은 피식피식 헛웃음이나 흘리더니 문득 검지와 중지를 나란히 하여 슥 들어 올렸다.
“나리.”
“왜!”
“전 두 개도 들어갑니다.”
“…….”
털썩.
홍의는 놀라 까무러치다 못해 담장에서 뒤넘어가 떨어졌다.
“…….”
여기가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렇게 풀숲에 육자배기로 뻗었다가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멀겋게 달을 올려다보는데, 문득 녹빈의 얼굴이 또 다른 달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방도가 있습니다.”
“…방도…? 무언데?”
홍의는 비실비실 상체를 일으키며 머리칼과 등허리에 묻은 풀떼기를 떼어 내었다. 녹빈은 그런 홍의의 앞에 털썩 양반다리로 주저앉아 차분하게 팔짱을 꼈다. 유난히 엄숙한 표정이었다. 화들짝 무릎이라도 꿇으며 머리라도 조아려야 할 만큼 위세가 넘쳤다. 원래도 컸지만 오늘따라 더 커 보이는 녹빈의 덩치 앞에 홍의는 자기도 모르게 기가 눌려 흠칫흠칫 녹빈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홍의를 유심히 살피는 녹빈의 눈동자에 문득 망상스러운 빛깔이 언뜻번뜻하였다.
“그냥 숨을 쉬시면 되어요.”
그렇게 반색을 하며 활짝 웃는데, 홍의는 순간적으로 탁 맥이 풀려서는 헛숨을 삼켰다.
“…내 말을 만다. 네놈한테 무언가 도움을 바란 내가 미친놈이지.”
홍의가 으이그, 하자 녹빈도 질세라 으이그, 하였다.
“이놈이…?”
“아 자꾸 헛구역이 치밀고 숨이 안 쉬어진다믄서요. 그럴 땐 그냥 구역을 참고 숨을 쉬시는 게 제일이다, 이 말이에요.”
말이 빙빙 돈다. 홍의는 뱁새눈을 뜨고 계속 반신반의했다.
“몸이란 건 간사해서, 목구멍에 낯선 이물질이 들어오면 구역질을 하여 그것을 뱉어 내려 하지요. 그럴 때 굳이 헛구역을 하지 않고 물건을 꿀꺽 삼킨다고 생각하면 호흡도 편안해지고 더는 구역질이 나지도 않고 움푹하게 깊은 목을 쓸 수 있다고요. 나 참, 어찌 그리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지.”
“…선도의 서책들에는 그런 내용 안 적혀 있었다.”
“그래요? 허면 빈이는 이만.”
치마폭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발딱 일어나는 녹빈의 치마꼬리가 답삭, 붙들렸다. 녹빈이 새치름히 돌아보니 홍의가 나라 잃은 표정으로 울먹울먹 올려다보고 있었다.
“깊은 목이… 뭐라고?”
본디 배움의 길은 멀고도 험한 법이었다. 녹빈은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소매를 뒤적여 딱딱하게 굳은 가래떡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홍의는 홀린 듯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유난히 창창한 달빛이 기다란 가래떡에 내려 반짝이고 있었다.
***
같은 시각, 정통계 향선들은 더운 공기를 피해 남산 아래 한적한 골짝에 놓인 남산 누마루로 밤 나들이를 나선 참이었다. 물 한가운데 지은 누각에서 향선들은 시중을 들겠다는 여인들을 물리치고 사내들끼리만 둘러앉아 향을 피우고 설렁설렁 부채질을 하며 수박을 쪼개 먹었다.
“신통 놈들은 또 고새를 못 참고 해어화들을 끼고 술판을 벌였다는구먼.”
“그것이 곧 그 모리배 족속들과 음전한 우리들의 격차인 게지.”
“흥. 십수 년 전만 해도 금성에서 기도 못 펴고 천골 취급이나 받던 것들이 황후의 뒷배로 기세등등한 꼴이라니. 그놈들이 실세를 잡고 나서 이토록 패륜이 성한 게 아닌가. 에잇!”
신통 사내들은 대놓고 헐뜯고 작정하여 시비를 붙인다면, 정통의 사내들은 뒤에서 모여 앉아 입방아 짓찧기를 좋아하는 족속이었다. 이렇듯 인통 싸움은 언제나 일상 속에 산재해 있었다. 이에 지긋지긋한 염세를 느낀 나함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누를 내렸다. 곁눈을 던지던 초탁이 난간에 팔을 걸치며 물었다.
“나함, 어디 가는가?”
“물 빼러 가네.”
뒷간도 없는 골짝이라 대충 누각을 돌아 어둑어둑한 곳에서 바지를 까 내렸다. 그러자 수박과 냉차로 배를 불린 나머지 사내들도 요의를 느꼈는지 줄줄이 따라 내려와 일렬로 늘어선다.
“그나저나 소문 들었는가?”
“뭔 소문?”
다 함께 무성한 여름풀에 오줌발을 쏘는데 문득 초탁이 운을 떼었다.
“왜, 얼마 전 화양각 연회에 청옥의 눈동자를 지닌 무산선녀가 나타났다지 않아.”
“그래, 촌음에 눈이 멀 만큼 굉장한 미인이었다지. 헌데 듣기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더라고. 신통의 해운이 그 여인에게 수작을 붙였다가 호되게 타작을 당했다는구먼.”
“하하, 그 정도란 말인가?”
“대체 어느 집안의 여식이기에 그토록 야무지단 말인가? 참말 우리 벽해에 풍작이 들 길조네그려!”
흐음. 가장 먼저 볼일을 보기 시작했음에도 남들이 다 방뇨를 마치고 바지춤을 올릴 때까지 오줌발을 쏘고 있던 나함이 문득 혀를 끌끌 찼다.
“여인이란 모름지기 착착 감기고 연싹싹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토록 성질이 사납다면 옥문도 쇠판이라 파고들 틈이 없겠군.”
향선들이 일시에 낄낄거렸다.
“천간성(天奸星, 하늘을 간음할 별) 나함도 뚫지 못하는 동굴이 있었는가?”
“열네 명의 아녀자를 거느리는 저 위용을 좀 보게. 방중술의 신이라는 팽조처럼 곧 신선이 되어 승하하겠구먼.”
“하여튼 이 자는 욕심이 과해. 대체 어찌하면 그토록 많은 여인들을 한 손에 주무를 수 있는지, 그 비법 좀 공유해 주게나!”
뿌듯함에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린 나함은 헛기침을 하며 바지를 추어올렸다.
슬슬 향선들에게 이제 그만 돌아갈 길을 잡자 이르려던 찰나였다.
나함은 먼눈을 팔며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처음에는 잘못 본 것인가 하여 눈시울을 좁혔다.
“저것이… 무어지?”
마침 뒤돌던 초탁 또한 그 기기묘묘한 불 놀음을 보았는지 멈칫하였다. 어두컴컴한 남산의 숲 어귀에 사람 아스라한 불빛 열댓 개가 일렁일렁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다. 이윽고 그 일대에서 사나운 엽견이 컹컹 짖는 소리가 어렴풋이 울려 퍼졌다.
“…태자께서 간만에 도깨비 떼를 쫓아 밤마을을 나선 모양이로군.”
나함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일제히 마른 침을 꼴깍 삼킨 사내들은 숲속 깊은 곳으로 빨려 드는 도깨비불을 망연히 응시하였다.
***
돌치와 깜치가 앞장서며 조붓한 오솔길을 골라 나섰다. 뒤를 쫓는 태자궁의 병사들은 들짐승 날짐승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간신히 한 치 앞을 밝히는 작은 등불에 의지하여 상전을 어렵사리 인도하였다. 안 그래도 칠흑같이 어두운 숲을 헤쳐 나가는데 면사까지 드리운 바에야 태자는 봉사 신세나 매한가지였다. 그런데 용케도 휘청거리지 않고 성큼성큼 잘도 나아가는 것이다. 곁을 지키던 화경은 행여 옥체가 상할까 저어하여 아뢰었다.
“전하, 신의 등에 오르시지요.”
태자가 드물게 웃는 소리를 냈다.
“날 업으면 십 리나 가겠느냐?”
작고 여윈 태자가 화경에게 업혀 허위허위 숲을 올랐던 어릴 적과는 양상이 적이 달랐다.
태자는 언제부턴가 매일같이 몸을 닦고 근육을 벼렸다. 그래야지만 잠을 잘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도 할 수 없는 끄트럭의 운명은 한 소년에게서 생기를 빼앗고 웃음을 빼앗고, 하다못해 잠조차 앗아 갔다. 그래서 짬이 날 때마다 쉼 없이 체련하고 검법에 정진하여 몸을 혹사했다. 그리고 기절처럼 잠들었다.
어릴 적엔 그토록 높고 가파르게 보였던 산비탈도 장성하여 근육으로 꽉 찬 다리로 짚고 보니 나는 듯 가볍기만 하다. 태자는 열 발은 뒤처져 걷고 있던 옥지에게 문득 손을 뻗으며 밑을 조심하라 이르기까지 했다. 다정한 성려가 황송하여 안절부절못하다가도 내민 어수를 감히 거부할 수는 없어, 옥지는 곱실한 채로 두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전하.”
도통 먼저 입을 떼는 법이 없는 옥지가 웬일인지 가쁜 숨과 함께 질문했다.
“왜 이리 갑작스레 ‘그분’께 가리라 하시는지 여쭈어도 되옵니까?”
아직은 전하께서 그분을 찾을 리 없다고 짐작한 옥지에게 지금의 잠행은 의문스럽기만 했다. 황실에서 쓰는 온갖 귀한 약재와 여러 벌의 옷과 장정 다섯이 삼 일 밤낮은 먹고도 남을 산해진미가 두둑한 등짐이 되어 병사들의 지게에 얹혀 있었다.
“그냥, 갑자기 보고 싶어서.”
태자는 예사롭게 중얼거리며 나아가고 있었다. 옥지는 묘한 두려움과 조바심으로 미간을 모았다. 삼 년 전 패악을 잊으신 것일까. 종종 병사들만 따로 보내 생사를 확인한 바로, 여전히 그자의 사납기가 들짐승에 버금간다 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태자는 자학과 자괴에 붙매여 있던 여린 소년이 아니었다. 특히 홍의를 만나고부터 태자의 성정이 부드러워졌다는 사실은 태자궁의 식모살이 아이마저 알 정도였다. 옥지는 말없이 미소 지으며 태자의 마디고 커다란 손을 조심스레 꼭 쥐어 보았다.
비탈을 다 오르자 전망이 훤히 트이며 밝은 달빛이 화안하게 드러났다. 밤새와 풀벌레 우는 소리가 삐유삐유 찌르르, 흩어졌다.
봉우리를 돌아 반대편으로 한참을 내렸다. 이윽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험준한 골짝, 무성한 나무에 파묻히듯 숨은 낮고 초라한 초막 한 채가 간신히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