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응?”
홍의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충성스러운 돌치의 귀가 쭝긋했다. 그리고 냅다 석계를 오르더니 태자의 발밑에 앉아 홍의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것이다. 홍의는 아주 잠깐 그런 돌치를 내려다보다가 도로 태자를 바라보며 아뢰었다.
“난데없이 사라지시는 바람에 무슨 변고라도 난 건 아닌가, 소신은 댓바람부터 꽁지에서 바람 소리가 나도록 뛰어다니며 전하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깨, 깨앵…? 태어나서 이런 개무시를 당한 건 처음이라 충격받은 돌치가 턱을 덜덜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홍의는 아랑곳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시면 걱정에 사로잡힐 아랫것 생각은 안 하십니까? 전하는 어찌 그리 박정하십니까?”
“오경쯤에 화경이 날 데리러 왔어. 동이 트기 전에 금성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조를 미리 해 놓은 터라서 안 갈 도리가 없었어. 헌데 그대가 너무 곤하게 자기에 깨우기 미안하여….”
태자는 기세에 눌려 살짝 주눅 든 얼굴이었다.
“허면, 금성에 돌아오셔서는 어찌 제게 기별 한번 없으셨습니까? 하도 기이하여 태자궁까지 찾아갔더니 속 편하게 오침 중이시더군요.”
“화양각에서 나는 한숨도 못 잤어. 내가 낯을 많이 가리는 것 그대도 알잖아. 그것이 비단 사람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잠자리에서도 매한가지라….”
“허면! 어찌 소신에게 말 한마디 없이 밤마을을 도셨습니까? 저더러 근위 무관이라면서요? 근위 무관은 전하의 입는 것이나 벗는 것, 먹는 것 잠드는 것 씻는 것까지 전부 돌보는 향선을 일컫는 것이라면서요? 헌데 소신은 왜 전하의 소식을 다른 향선들의 입을 통해 들어야 합니까? 전하께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으르르릉…, 월월! 월!”
돌치는 마루에 훌쩍 오르더니 태자의 뒤에 숨어서 얼굴만 내놓고 마구 짖어대기 시작했다.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런 일에 화가 날 줄 몰랐어.”
“월 월월!”
“예? 무어라 하셨습니까?”
“으르릉, 월!”
“네가, 그런 일로 속상해할 줄 몰랐다고.”
“월월 월월 월워러월월 월월!”
“이익… 이이이 개 놈의 새끼가?!”
개 짖는 소리 때문에 전하의 어성이 제대로 들리지 않자 확 부아가 치민 홍의가 버럭 고함을 쳤다. 저에게 그러는 줄 알고 기함한 태자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며 엉덩이를 두 치쯤 뒤로 물렸다. 이성이 뚝 끊긴 홍의는 한쪽 다리를 휙 들어 올려 벗은 신발이 허공에서 뱅그르르 도는 걸 탁 잡쥐고는 죽일 기세로 쿵쾅쿵쾅 마루를 뛰어 올라왔다. 그 시퍼런 서슬에 난생처음 목숨의 위협을 느낀 돌치가 마루 끄트머리까지 피신하여 꼬리를 말고 오들오들 떨어 대는데, 마침 의리 넘치는 깜치가 나타나 홍의의 옷자락을 물고 늘어졌다.
“월! 월월월!”
“오냐, 늬들 오늘 임자 만난 줄 알아라!”
“깨갱! 월월!”
개와 인간이 한데 뒤엉켜 서로 물고 뜯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려야 할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망부석처럼 굳어서 얼이 빠진 태자는 이윽고 무언가 발견하고는 응? 하였다. 마침 깜치에게 물어 뜯기느라 펄럭이는 홍의의 정복 자락 안쪽, 바지의 허릿단에 꼭꼭 쟁여 놓은 희멀건 막대기 같은 것이 눈에 든 것이다. 저게 뭐지. 옥적인가? 태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엎치락뒤치락하느라 헐렁해진 바지춤에서 흰 막대가 기어이 떨어져 나와 미끈한 마루를 떼구루루 굴러 태자의 앞까지 당도하였다.
태자는 그 길고 희고 딱딱하게 굳은 것을 집게 손으로 집어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가래떡?”
나지막한 혼잣말이었는데 그 순간 거짓말처럼 홍의의 몸이 굳었다. 틈을 놓치지 않고 깜치가 게걸스럽게 홍의의 팔뚝을 잘근잘근 씹어 대었다.
“이, 이리 주십시오!”
홍의가 눈에서 시퍼런 광채를 쏟는 듯하더니, 별안간 간절하게 손을 뻗치며 몸을 날려 왔다. 하지만 그런 홍의를 밀치고 돌치가 끼어들어서는 가래떡을 왕 낚아채었다. 개판이었다. 돌치는 가래떡을 물자마자 섬돌 아래 안뜰로 날쌔게 달아났다. 신난 돌치의 엉덩이가 해맑게 씰룩쌜룩하는 와중, 홍의가 반쯤 벗기어진 바지춤을 잡고 뒤뚱뒤뚱 마루를 내려 그 뒤를 쫓고, 또 그런 홍의의 뒤를 깜치가 쫓는 추격전이 이어졌다. 대관절 야단야단에 못 이긴 옥지와 화경도 마침 헐레벌떡 별당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기가 막혀 헛숨을 삼켰다.
‘…귀여워라.’
마루에 걸터앉은 태자만이 느긋하게 턱을 괴고 즐거이 감상할 따름이었다.
***
옥지는 부랴부랴 태자궁 후원의 별당에 점심상을 보았다. 오후가 넘어가는 시각인지라 점심이라 치기에는 늦은 감이 있었지만, 태자궁은 본디 그 주인이 기침한 때를 기준으로 하루가 시작된다는 것이 오랜 시간 다져진 암묵적인 원칙이었다.
홍의는 다향원에서 이미 점심을 들고 왔음에도 왈칵 구미가 동하여 침을 꼴깍 삼켰다. 돼지고기와 부추를 저며 넣은 쫄깃한 만두와 야들야들한 사태 찜, 꿩과 쇠족을 오랜 시간 푹푹 고아낸 용봉족편, 어리굴젓과 송송이, 숙채와 생채, 팥물로 지어 붉은 윤기가 좔좔 흐르는 홍반까지, 황족이 먹는 음식이라서 그런지 참으로 화려하고 정갈하기 그지없었다.
실지로 구미를 확 끄는 산해진미다. 눈이 다 휘둥그레진 홍의는 양 소매까지 휙휙 걷어붙이고 전에 없던 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밥 위에 짭조름한 육찬 가득 얹고는, 보는 이까지 배가 부르도록 야무지고 복스럽게 밥을 먹었다. 한바탕 난리굿을 벌인 뒤라 더욱 식욕이 왕성한 참이었다.
입 안 가득 밥과 고기를 맛있게 밀어 넣고, 또 다음번에 넣을 어리굴젓을 젓가락으로 콕 집고 있는 와중, 문득 이마로 오묘한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맞은편에 앉은 태자가 숟가락을 아랫입술에 댄 채 웃을락 말락 하는 눈빛으로 말긋말긋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음식을 넣은 채 말할 수는 없어 야물야물 꿀꺽 삼켜 낸 홍의는, 잠시 민망한 듯 눈을 깜빡거리다 물었다.
“전하. 소신을 어찌 그리 보십니까?”
“…아냐.”
태자는 시치미를 떼며 앞에 놓인 죽을 휘저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한 홍의는 문득 태자의 앞에 놓인 죽 그릇을 보았다. 황금빛 유기에 가득 담긴 것은 갓 쑤어 낸 타락죽이었다. 보아하니 다른 찬이나 밥에는 손도 대지 않았고, 연신 그것만 휘휘 젓다 몇 술 뜨고 마는 모양이다. 한창 잘 먹어야 할 때에 어인 편식인가 싶다. 눈을 부릅뜨고 상을 두리번거린 홍의는 사태찜 한 토막을 집어 태자의 죽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별말 없이 받아먹기는 받아먹는데, 성의 없이 질겅대는 것이 영 얹어 드린 보람이 없는 것이다.
“전하께서 이 중에 어떤 음식을 좋아하느냐?”
결국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옥지에게 넌지시 물었다. 옥지는 잠시 난감한 듯 태자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조심조심 작게 아뢰었다.
“지금 오른 찬 중에 전하의 식성에 맞는 음식은… 망극하게도 없는 줄로 압니다.”
“뭐?”
홍의의 미간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산삼 녹용도 몸에 맞지 않으면 독이나 진배없고 서속밥에 푸성귀라도 즐겁게 먹으면 약이 된다 했거늘, 네 어찌 전하를 지척에서 모신다는 아이가 이토록 상전의 입맛 하나 돌보지 못하느냐?”
“전하께오선 평시 육찬보다 바닷고기를 좋아하시는데, 황후 마마께서 전하의 수라에 일일이 관여하시며 소인의 임의대로 수라를 보았다가는 경을 치리라 하시어….”
옥지가 안절부절못하며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태자가 짐짓 미간을 찡그리더니 탁탁, 숟갈로 그릇을 가볍게 쳤다.
“그만해. 왜 애먼 옥지한테 역정을 내고 그래?”
“전하.”
“옥지 말이 맞아. 어머님은 내가 혈기를 돋우는 데 탁월한 육식 위주로 먹는 걸 좋아하셔서, 생선으로 배를 채우면 불호령을 하시니까.”
홍의는 말문이 막혀 헛웃음을 쳤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다. 물가에 내놓은 삼척동자에게도 이 정도로 흥이야항이야 간섭하고 죄어치지는 않을 터였다.
“본래 고기도 먹기는 먹는데, 오늘은 입맛이 좀 없어서 그런 것뿐이야.”
“해서 다른 건 안 젓수고 이런 죽으로 배를 불리신단 말입니까?”
“탕약을 먹으려면 배부터 차야 하니 어쩔 수 없지.”
“탕약이라니요? 지병도 없고 강건하신 분께서….”
“눈동자가 검어지는 약.”
“…….”
“십 년째 전혀 효험이 없지만.”
밥맛 다 떨어졌다는 표정으로 태자를 바라보던 홍의가 돌연히 자리에서 일어난 것도 그때다. 옥지가 놀라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거리낌 없이 상을 돌아 태자의 옆에 무릎을 꿇어앉은 홍의는, 아직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타락죽을 숟가락에 한가득 퍼 올려 호호 불어서 태자의 입가에 들이밀었다.
“소신이 이따가 밤에 소주방으로 가서, 맛난 생선 훔쳐다 드릴게요. 몰래 모닥불 피워 구워 먹겠다는데 황후 마마가 어찌 압니까? 천신도 아니신데 말입니다.”
“…….”
“그리고 전하, 앞으로는 젓수기 싫은 건 억지로 젓수지 마세요.”
태자는 말갛게 눈만 깜빡거렸고 홍의는 진하게 한숨을 쉬었다.
“또한 그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하등 웃기지도 않은 탕약 따위도 말입니다. 사발 하나 준비해서 젓수는 척만 하시다가 몰래 부어 버리십시오. 지난번 매화 숲 정자에서 소신이 하는 것을 보셨지요?”
“…….”
“세상에 이렇게 아름답고 숭고하고 특별한 눈동자가 어디 있다고, 응? 눈알은 개나 소나 다 같이 시커먼데! 쓸데없이 까매져서 뭣에 쓴다고? 우리 전하는 지금도 최고로 곱고 멋지기만 하신….”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주절주절 왜자기던 홍의는 문득 눈앞이 어두워지자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은은한 새물내와 함께 금이환이 찰랑이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입가에 쪽 하며 보드라운 간질임이 와 닿았다. 깜박깜박. 새삼 곱디고운 물빛이 아스라이 눈앞에서 점멸하였다. 수줍은 매혹이었다.
“너, 밥풀 묻었어.”
“…….”
홍의의 입가에서 태자의 입 안으로 옮겨 간 밥알 하나가 한번 꼭 씹혔다. 태자는 흡족한 얼굴로 옆에 밀어 두었던 홍반을 제 앞으로 가져가더니, 이내 맛있게 밥을 먹기 시작했다. 상앗빛 흰 뺨이 올록볼록 도도록해지는 모양이 썩 보기 좋았다.
홍의는 두근대는 가슴을 누르며 슬그머니 등을 돌려 상 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굴러다니던 밥알 한 개를 발견했다. 슬쩍 집어서 입가에 슥 묻혔다. 지켜보던 옥지는 눈꼴셔서 못 보겠다는 듯 아예 뒷짐 지고 뒤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