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48화 (48/111)

#48

여름의 신 염제의 관할 아래 찌는 듯한 더위가 맹위를 떨쳤다. 낮수라를 양껏 마친 태자는 말타기도 할 겸 피서도 즐길 겸 생선도 먹을 겸, 겸사겸사 유오를 나서자고 말했다. 서천이나 북천, 금성을 감고 흐르는 남천은 이미 도경 귀족들과 민인들로 북새통을 이룰 시각이었다. 한참 어디가 좋을까 셈하다가 결국은 황족의 피서지인 목란골로 길을 잡기로 하였다.

각자 움직이기 편한 의복으로 갈아입고 금성의 동쪽 샛문에서 만나기로 했다. 태자는 금방 오겠다면서 홍의의 뺨을 보드랍게 매만졌다. 얼굴이 팡, 하고 터지는 줄 알았다. 우둔우둔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겨우겨우 부여잡고 허공에 두 치쯤 동실동실 뜬 홍의는 거의 날듯이, 준마보다도 빠르게 다향원 처소로 냅다 달렸다.

평시 아껴 두고 한 번도 입지 않았던 빳빳한 진솔옷을 꺼내 입고 속살에 향분을 묻혔다. 참빗으로 머리를 여러 차례 빗어서 윤기가 돌게 했다. 머리끈을 풀어서 동그랗게 상투를 두어 안 쓰던 은잠까지 꽂고 나니, 그토록 공들여 꽃단장하는 제 모습이 스스로의 눈에도 무척 낯설고 객쩍기만 하였다.

제 눈에도 그러할진대 새옹의 눈엔 오죽했으랴. 새옹은 마침 무동들의 수련을 돌보고 그 진행 상황을 보고 하러 들렀다가, 신바람 난 김에 거울 앞에서 격렬히 춤을 추고 있는 홍의를 발견하고 귀신이라도 본 듯이 놀랐다. 주군 어디 아프냐면서 이마를 짚기까지 하였다. 내내 태자의 수줍은 미소를 떠올리며 홀로 히쭉거리던 홍의는 무심코 새옹을 돌아보았다가 덩달아 같이 놀랐다.

‘오징어가 말을 하다니.’

알 리 없는 새옹은 여전히 오징어의 형상을 한 채로 혹여 속탈이 나신 거라면 의원을 부르겠다고 지절지절 염려를 늘어놓았다. 내내 태자의 고운 옥안이 머릿속을 떠다녔던 바에야, 월궁항아 칠 선녀가 내려도 반 건조한 오징어였을 터다. 콩깍지가 쓰여도 몇 겹은 쓰인 홍의는 붉은 장유 자락 다팔다팔 나부끼며 빛의 속도로 다향원을 빠져나갔다.

샛문 앞에 당도하자마자 마침 태자도 간편하고 푸른 무복을 꾸린 채 커다란 핏빛 말을 타고 훌쩍 다가왔다. 만월 보살 불보살의 강림인 듯 후광이 쨍하여 차마 두 눈 뜨고 똑바로 볼 수 없음에야! 홍의는 어이쿠쿠, 하며 실지로 고개를 돌리고 양손으로 빛을 차단하려는 듯 홀로 한참을 허우적거렸다. 지랄이 풍년이었다. 작은 노새에 짐을 싣고 있던 옥지와 화경은 썩은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는 것 같기도 한 무표정으로 홍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금성의 샛문으로 통하는 뒷길로 두 사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말을 몰았다. 한혈마라 불리는 명마는 하루에 천 리도 달릴 만큼 힘이 좋은 데다 속도가 몹시 빨라 피땀을 흘린다는 명성에 걸맞게 한달음에 구지를 넘어 단숨에 남산 허리를 파고들었다. 숲속이라도 계속 덥고 습한가 했더니, 삼릉을 지날 때부터 시원하고 축축한 바람이 철벅철벅 불어와 부딪쳤다. 바람결에 나붓나붓 나리는 검투명한 면사가 이따금 홍의를 돌아보았다. 홍의는 빠르게 들썩이는 안장 위에서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울연한 골짝 어귀에 들어서자 공기가 확 시원해지면서 익숙한 전경이 펼쳐졌다. 폭포가 세차게 쏟는 가운데 새하얗게 부서지는 물거품 너머로 아롱아롱한 무지개가 또렷하게 피어 있었다. 화경은 나무에 말들을 매어 놓고 솔가지와 땔나무를 모아다가 화톳불을 피웠다. 그리고 함지를 열어 소금 절인 청어 두엇 마리를 꺼내서 불 위에 올리고 자작자작 굽기 시작했다. 금세 비릿하고 매캐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쏴아아아, 귀청을 때리는 폭포 소리가 시원하고 청량하여 귀가 절로 트였다. 자연이라는 장인이 빚어낸 웅장한 혈암이 초록 꽃가지 피운 채로 우뚝하니 서서 치밀한 여름의 열기를 막아주고 있었다. 홍의는 신선처럼 뒷짐을 지고 홀로 소풍이 벌어지는 자리를 떠나 산골짝을 따라 슬렁슬렁 걸었다. 한참 너른 요새 같은 병풍바위를 따라 걷다 보니 문득 목란골 구석의 빽빽한 나무에 가린 채로 또 하나의 작은 둥지처럼 놓인 맑은 물웅덩이를 발견했다. 높고 커다란 바위틈을 타고 쏟아져 내린 계곡물이 폭포에서 부서져 여기까지 흘러든 모양이었다. 살짝 발끝을 담가 보니 과연, 시원한 그늘 아래 볕을 쐬지 못한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뒷골이 다 에이는 듯했다.

‘천신께서 선녀들 목물하라고 두셨나 보다.’

보는 눈도 없겠다, 홍의는 훌렁훌렁 의복을 벗고 땀받이 차림으로 바위 위에서 미끄러지듯 웅덩이로 풍덩 빠져들었다. 푸하. 정수리까지 죄 담갔다가 빼내자 정신이 버쩍 들었다. 차디찬 물로 목덜미를 훔치고 세수를 하고, 몸을 한껏 뒤로 젖히며 동실동실 뜬 채로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초록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가 바람결에 살랑이면서 그 틈새로 빛이 터졌다가 점멸했다가 하였다. 홍의의 녹녹하게 풀린 얼굴 위로 꽃그늘이 어룽거렸다.

“뭐 해?”

돌아보니 태자가 막 바위에 훌쩍 오르더니 쪼그리고 앉았다.

“전하, 저기 폭포수보다 이곳 물이 훨씬 차갑고 좋습니다. 한번 들어와 보십시오.”

홍의가 개구쟁이처럼 송곳니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태자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무릎 위에 겹쳐 놓은 양팔에 입을 묻고 웅얼거렸다.

“…많이 찬가?”

“예, 아주 그냥 뼛골까지 으슬으슬합니다. 여기에 일각만 잠겨 있으면 몸이 냉해져서 밤까지 끄떡없을걸요?”

재잘재잘 떠드는 홍의의 콧대를 타고 맑은 물방울이 또록또록 굴렀다. 태자는 이토록 환하게 웃는 홍의를 보면 요즘 들어 이상하게 가슴이 저렸다. 귀가 멍멍하고 눈앞이 먹먹하고 누군가 가슴 안을 갉작갉작 긁어내리는 듯도 하고….

“전하?”

“…….”

태자가 그 자세 그대로 말없이 보기만 하자 홍의는 의아한 듯 올려보다가 물살을 헤치며 다가왔다. 하얗고 투명한 고의가 수면 위에 두둥실 떠올랐다.

“물이 너무 차가울까 저어되어 그러십니까? 갑자기 어찌 그리 존용에 수심이 가득하십니까?”

바위 밑까지 다가온 홍의가 염려가 깃든 눈빛으로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태자는 무심코 손을 뻗어 홍의의 단단한 이마에 엉겨 붙은 축축한 머리칼을 거둬 귀에 꽂아 주었다. 그러다가 얼핏, 언젠가 그토록 핥고 싶어 했던 귀 뒤의 동그랗고 여린 부분을 스쳤다. 간지러웠는지 홍의가 낮게 웃으며 목을 움츠렸다. 태자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가슴이 뛰고 몸이 더워지기 시작했다. 바위를 짚고 미끄러지듯 차디찬 물속으로 들어왔다. 그래도 몸과 맘이 뜨거웠다.

“전하, 뙤약볕을 너무 쐬셨나 봅니다. 볼이 다 붉어지셨어요.”

멋모르는 홍의는 물 묻어 찬 손으로 태자의 후끈한 뺨을 쓸어내렸다.

‘…홍의가 부쩍 상냥하니까 되레 이상하다.’

내심 적응이 안 되어 홀로 기연가미연가 하는데, 홍의가 대뜸 입을 열었다.

“전하. 소신이 일전부터 참말 궁금했던 것이 있는데요.”

“무언데?”

홍의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생기로 빛났다. 사실 여태껏 홍의는 허허실실 익살을 가장하면서, 진솔하고 정이 넘치는 본성을 감추고 살아왔다. 그 또한 생의 비겁한 원리에 치일 대로 치인 홍의 나름대로의 생존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실 누구보다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내였다. 그가 비밀히 품은 영롱한 빛은 냉랭하게 굳어 버린 타인의 가슴마저 뜨겁게 눅일 만큼 홧홧하였다.

‘홍의 님은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계시는군요.’

언제가 겨울, 냉골이나 다름없는 다향원 뒷방에 틀어박혀 추위를 견디려 옷을 기워 입는 달래가 안쓰러워 누빔 버선과 털가죽을 몰래 놓고 가려니, 그녀는 버석버석 마른 입술을 살포시 열고 웃었다.

‘종종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를 제게 하시지요? 태어나면서부터 담뿍 모정을 받고 자란 아이는 누가 이르지 않아도 스스로 사랑하는 법을 터득한다고 하더군요.’

홍의는 헛웃음을 쳤다.

‘허면 사랑하는 방법이란 것이 따로 정해져 있단 말인가?’

‘마땅히 그러하지요. 삶이 곧 사랑일지니, 사는 법과 사랑하는 법이 다르지 않지요.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하고 좋은 것은 좋다고 말하며, 어여쁘고 사랑옵은 것을 감추지 말고 온전히 표현하는 것, 그가 바로 제가 믿는 삶의 도이며 사랑의 옳은 방법이랍니다.’

더는 그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홍의는 한 번도 사랑으로 울어 본 적이 없는 무구한 소년처럼, 혹은 무엇에도 거칠 것이 없는 용맹한 장부처럼, 태자에게 성큼성큼 다가서길 멈추지 않는다.

“전하는 대체 무얼 젓수셨기에 이토록 피부가 곱고 말랑거리십니까?”

“…….”

홍의의 촉촉한 손끝이 태자의 볼과 콧대, 입술, 턱을 서슴없이 만지작대었다.

“혹시 따로 날개옷이라도 감춰 두신 것은 아니십니까? 생김생김 하나하나가 곱고 화안하여 종종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멀리 봐도 잘생기셨고, 곰곰 뜯어보아도 모난 곳이 없으셔요. 전하께서는 그걸 알고 계십니까?”

참으로 대꾸하기 민망스러운 질문이었다. 태자는 잠시 요연한 눈을 했다. 사실 어릴 적 천둥벌거숭이로 통했던 홍의와는 정반대로, 태자는 본디 여자아이처럼 수줍음이 많은 편이었다. 함께 어울릴 동무가 없기도 했지만 다른 사내아이들처럼 뛰어다니고 칼싸움하는 것보다 칠교놀이나 소꿉을 사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렇게 차차 나틀면서 말타기와 검무가 재미나고 몸 쓰는 일이 좋은 걸 알았지만, 또 생이 워낙 고달프다 보니 괴팍하고 잔혹해진 면도 얼마간 있지만, 지금도 낯선 상황, 낯선 사람, 생각지 못한 일과 얼결에 마주치면 어김없이 그 내성적이고도 무른 숫보기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태자가 결국 홍의의 손목을 잡아 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만해.”

“…왜요?”

“그냥.”

냉랭한 대꾸에 홍의는 확 풀이 죽었다.

“…소신이 너무 무엄했습니까?”

홍의가 눈치를 살피고 들자 태자는 눈을 아래로 깔고 얼른 읊조렸다.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열없다.”

“예?”

“…부끄럽다.”

순간 홍의의 두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가, 이내 허를 찔린 것처럼 아이고 전하, 커다랗게 박장대소를 하였다. 가슴 속부터 울리는 시원스러운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러나 비소인가 싶어서 태자는 괜히 골이 났다.

“전하! 내외는 진즉에 하셨어야지요! 이제 와서 그리 말씀하신들 소신이 어찌 믿겠습니까?”

“…그대야말로 그리 나를 싫다 하고 도망만 다녀 놓고는.”

“그랬던가요?”

말이야 바른 말이다. 난데없이 잘생겼다고 추켜세우는데 그 말을 어찌 믿겠는가. 난봉꾼이 수작질 붙이는 것도 아니고. 계면쩍어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태자가 입을 다무는데 문득 홍의가 태자에게 다가와 쪽 하고 입맞춤했다. 태자가 멈칫했다. 한 치의 거리에서 흔들림 없는 눈빛들이 말갛게 부딪쳤다. 고요하였다. 어쩐지 바람도 멎고 숲도 숨죽이고 새들의 지저귐도 우연히 멎은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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