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태자는 코앞의 홍의의 입술, 코, 그리고 눈을 순차대로 바라보며 고른 숨을 내쉬었다. 물속이 차가웠지만 춥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세차게 가슴 뛰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홍의는 어설픈 웃음기가 아직 남은 얼굴로 계면쩍게 시선을 회피했다. 태자는 울대를 움직여 잠시 침을 삼키고 홍의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그리고 홍의의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홍의가 고개를 조금 들고는 어딘지 간절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태자는 그 눈꺼풀에도 쪽, 했다. 말랑하고 따스했다. 홍의가 소리 죽여 웃었다. 태자는 웃지 않았지만 눈빛이 전에 없이 초롱초롱하였다. 돌이킬 수 없는 연정으로 가슴이 뜨겁게 벅차올랐다. 처음으로 마주 보는 사랑 앞에 두 사내는 시간을 거슬러 수줍은 소년이 되었다.
태자가 고개를 틀어 다가왔다. 홍의도 함께 다가갔다. 잠깐 입을 맞추고 떼려는데, 별안간 허리를 답삭 붙들렸다. 동시에 입 안도 내어 주어야 했다.
입술과 입술이 벌어지고 뜨거운 혀가 얽혔다. 홍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접문은 참으로 희한했다. 눈으로도 볼 수 없고 손끝으로도 만질 수 없던 상대의 내밀하고 깊숙한 부분을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행위였다. 물속에서 허벅지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태자의 단단한 허벅지를 느끼며 홍의는 허리를 들썩거렸다. 양팔을 엇갈려 미끈하고 단단한 태자의 목을 부드럽게 죄어 감았다. 고개가 열심히 이쪽저쪽 기울었다. 조금이라도 더 깊숙이 혀를 얽기에 맞춤한 방향을 찾으려고 잠시 입을 떼었다가도 다급히 맞물리기를 반복했다.
“아… 전하.”
물속에서 한껏 가벼워진 홍의의 몸을 태자가 어렵지 않게 들어 올렸다. 홍의는 제 가슴께에서 슴벅대는 물빛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그 눈매를 손끝으로 쓸었다. 끼끗하고 맑은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태자가 순수한 욕망으로 입꼬리를 우아하게 끌어 올렸다. 어느 때보다 생기가 넘쳤다. 너를 갖고 싶다고, 너와 온몸으로 부딪치고 싶다고 그 물을 닮은 눈이 말하고 있었다. 태자는 홍의의 탄탄한 엉덩이를 휘주무르다, 고의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헛. 전하….”
당황한 홍의가 발을 딛으려 했지만 태자는 내려주지 않고 홍의의 목덜미를 살포시 깨물 따름이었다. 홍의의 귀가 빨개졌다. 눈동자도 나른하게 풀렸다. 태자의 입술이 뜨거운 숨결과 함께 올라와 귀 뒤의 오목한 부분을 핥고 빨았다. 순간 소름이 돋아서 헉, 어깨를 움츠렸다.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면서 등줄기로 짜르르한 전율이 흘렀다. 그러나 마지막 이성의 끈을 붙들고 홍의가 태자의 양 볼을 잡아 들어 올렸다.
“전하, 이곳에서는 안 됩니다.”
“…다른 곳에서는 돼?”
이 와중에 저 미심쩍은 표정이라니. 홍의는 웃음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얼마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여 잠시 대답을 못 했다. 태자는 성에 안 찬다는 듯 홍의를 억세게 끌어안고 살며시 드러난 어깨를 살살 베어 문다.
“안 된다니까요… 참.”
안 된다는 목소리치고는 몹시 간드러져서 그냥 된다는 말로 들린다. 홍의의 온몸을 품에 가득 끌어안은 태자가 고개를 숙여서 뒷덜미까지 빨았다. 홍의는 웃음을 참는 기묘한 음성으로 꾸물꾸물 몸을 뒤채었다.
“아, 전하, 참말 안 돼요. 누가 볼까 저어됩니다.”
“…….”
“전하?”
“…미 봤어.”
“예?”
무어라 웅얼거리는 소리에 잠자코 되묻는데, 그러고 보니 태자의 움직임이 아까부터 멎어 있었다.
“이미 누가 봤다고.”
“…….”
태자가 경계 어린 눈으로 바위 너머 숲을 노려보고 있었다. 홍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고 태자의 시선을 따라 좇다가 기함을 하여 입을 쩍 벌렸다.
우거진 나무 틈 사이, 씹다 만 솔잎을 턱에 붙인 미함이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
“예, 이미 다 보았으니 거둥을 편히 하시지요.”
기어이 소풍이 벌어지는 자리까지 쫓아온 미함은 비딱하게 일갈했다. 특유의 굵직하고 우렁우렁한 음성에 홍의는 절로 기가 죽었다. 내내 낯가리느라 홍의 등 뒤에 숨어 있던 태자가 슬그머니 어깨 위로 이마와 눈을 내밀었다. 홍의는 들창눈을 뜬 채 연신 미함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화경과 옥지 또한 돌연히 나타난 미함을 경계하느라 화로 위의 생선이 시커멓게 타드는 줄도 몰랐다.
“원주 미함, 태자 전하를 뵙나이다.”
절을 올리는 미함의 품새는 가분하고도 절도 있었지만, 어쩐지 스스로 낮추는 인사가 어울리지 않는 사내였다.
‘…미함 현군이라.’
태자는 물끄러미 보다가 싸늘하게 눈빛을 가라앉혔다. 다향원의 원주이자 태후의 막내아들인 미함은 폐하의 동복아우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태자에게는 작은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덧없는 핏줄이었다. 혈연 간의 첫인사치고는 아무 감흥도 없었다. 다만 모계 혈통으로 이어지는 인통에 따라 태후의 아들인 미함은 정통계라, 그것이 거슬릴 따름이다. 정통인 미함이 신통인 태자를 곱게 볼 리 없는 것이다. 태자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반감이 가득 차올랐다.
‘저런 자에게 내 눈을 들키고 말았다니.’
타닥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눈치를 살피며 태자에게 등이 안긴 상태로 굳어 있던 홍의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저어, 미함 공. 생선 구이라도 한 점 뜯으시렵니까?”
“너나 많이 처먹거라.”
“예.”
나나 처먹으랍신다…. 홍의는 씁쓸한 미소로 옥지에게 일렀다. 옥지는 모닥불에 대고 부채질을 하며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는 표정을 지었다.
“홍의.”
“예?”
문득 미함이 부리부리한 눈을 치떴다.
“아까부터 어딜 올라타 있는 게냐?”
험궂은 표정이 분기탱천한 염라대왕 같았다. 홍의는 자동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올라탄 것이 아니라 안겨 있는 것인데요…. 변명 같은 속말이 입 안을 맴돌았다.
“군신의 예와 향선의 도는 어디에 처박아 두고 감히 황족의 무릎을 타고 앉았느냐? 어서 썩 비켜나지 못할까!”
여기서 대거리라도 했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을 지난 구 년간 뼈저리게 체감해 온 홍의는 불수의근의 작용처럼 재빨리 일어서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홍의의 허리를 끌어안은 태자의 팔에 콱 힘이 들어가는 것이다. 홍의가 헉 하며 돌아보았다. 태자가 홍의의 어깨에 턱을 건 채 비스듬히 시선을 주었다. 순식간에 아름다운 옥안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괜찮아. 그냥 있어.”
…그럴까요, 전하? 홍의는 속도 없이 얼굴이 벌쭉 풀려서는 아리딸딸, 헤롱헤롱, 홍냥홍냥대었다. 으이그. 탄다 타. 뒤에서 지켜보던 옥지와 화경이 헛숨을 삼키며 거세게 부채질을 하여 쓰디쓴 탄내를 멀리 날려 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홍의는 얼뜨기 천치처럼 헤실거리며 태자의 너른 품에 더 폭삭 등을 기대는 것이다.
‘저런 푼수데기를 보았나!’
경천동지할 꼬락서니에 기가 막힌 미함이 곧 주위를 둘러보다 작달만 한 조약돌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고대로 홍의의 이마에 명중시켰다. 악! 홍의가 비명을 쳤고, 덩달아 놀란 태자가 얼른 홍의의 이마를 살피다가 손으로 싸매 주었다. 그리고 확 고개를 돌려 사납게 미함을 노려보는 것이다.
‘아주 그냥 쌍으로….’
나라가 대체 어찌 되려는가. 미함의 잇새에서 규탄과 침음이 뒤섞여 흘렀다. 홍의는 또 불호령이 떨어질까 미함의 눈치를 보기는 보되 제 허리를 감싼 태자의 손을 꼭 잡쥔 채 놓질 않고 있었다. 지극한 색신이 나셨구나! 그토록 몰인정하게 해어화들의 연심도 뿌리치고 홀로 신선인 체는 다 하더니만, 결국 이 사달을 내고자 그리했던가? 수십 명의 향선 중 가장 아끼고 믿었던 홍의이기에 더욱 괘씸하고 참담한 심정을 지울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사랑 타령을 당사자도 아닌 삼자가 무슨 방법으로 끊어 낼 수 있겠는가. 미함은 혀를 끌며 태자를 보았다. 내성적이지만 욕심 많은 사내아이처럼 홍의를 끌어안고 이쪽을 쏘아보는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굳이 자세히 뜯어보지 않아도 태자가 풍기는 기운은 묘할 수밖에 없었다. 화려하면서도 우아미가 깃든 외모, 듣도 보도 못한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
“…신비하군요.”
“…….”
“하늘의 기운이 서린 그 눈동자 때문에 그간 만인 앞에 존모를 감춰 오셨나이까?”
태자는 대답이 없었다.
“세간에 떠돌던 전하의 용안에 관한 괴이한 소문은 모두 뜬소문이었음을 불충한 제가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허나.”
강한 미함의 시선이 태자를 꿰뚫을 듯 쏘아보았다.
“전하의 됨됨이가 한갓 어리석은 파락호(破落戶, 귀한 가문의 난봉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문은 낭설이 아니라 진실인 듯하군요.”
“…….”
“장차 옥좌에 오르실 분께서 천골도 마다할 비역질이라니요? 그러한 자질로 어찌 만인지상의 직책을 편편히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냉랭한 일침에도 태자는 별다른 반응이 없는데, 막상 홍의가 기함하여 앉은 자리에서 펄쩍 몸을 뒤틀어 올렸다.
“미함 공! 당치도 않은 망언을 거두어 주십시오!”
“…뭐야?”
“어찌 존전에서 이 같은 무례를 범하신단 말입니까?”
“얼씨구?”
미함의 얼굴에 순간 황망함이 스쳤다.
“네가 지금 나더러 망언이라 하였느냐? 아주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아니, 지금 미친 것이 저뿐이랍니까? 공께서도 회까닥 정신이 나가셔서 위아래 구분도 못 하고 마구발방을 하시잖아요. 거참 아실 만한 분이 왜 이러세요?”
멀찍이서 방관하는 옥지와 화경은 새삼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속언을 떠올릴 따름이었다. 홍의의 야단야단에 목이 조금 붉어진 미함이 이내 살짝 누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전하께서 연신 하교도 없으시고, 영 내 말을 무시하시는가 싶어 골이 나서 그랬지.”
“그러게 제가 전부터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우리 전하께서는 낯을 엄청 가리셔서 아무나와 말 안 섞으신다고요. 아, 귀지가 많으신가 제가 좀 파 드려요? 예?”
우리 전하아? 귀지이? 코웃음도 안 나온다. 미함은 이대로 제 구역인 다향원에 돌아가 얄미운 홍의를 삼끈으로 꽁꽁 묶어서 나무에 거꾸로 매다는 상상을 했다.
“…남색이 문제인가.”
내내 꿀 먹은 듯 조용했던 태자가 선뜻 입을 연 것도 그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