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나와 현군의 남색에 관한 견해가 달라서 잠시 말문이 막힌 것뿐이야. 딱히 현군을 무시한 게 아니니 너무 분해 말게.”
태자는 말투는 조금 느렸지만 어느 때보다 또박또박 응대하고 있었다.
“허면 내가 현군에게 묻겠는데, 과연 친남매가 붙어먹는 일보다, 임신한 처자식을 상관에게 팔아먹는 일보다 남색이 더러운가.”
“…….”
“또한 그 덕으로 작위를 얻는 음관들의 득세가, 정녕 남색보다 지당한가. 작위를 위한 친족 간의 상피는 온당하고, 남색만이 부당한가.”
홍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저 연치 유충하시어 매양 태자궁에 틀어박혀 세월아 네월아, 마냥 허송세월하신 줄만 알았는데 제법이시지 않은가. 아주 그냥 어투에서 귀티가 좌르르 흐르는 것이 제가 다 뿌듯한 지경이었다. 아아, 오늘따라 더 잘생겨 보이는 태자를 응시하는 홍의의 두 눈이 아롱아롱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옥지와 화경은 뇌꼴스러워 못 보겠다는 듯 일시에 고개를 돌렸다.
미함은 앞으로 조금 내밀었던 상체를 뒤로 물리며 잠시 헛숨을 삼켰다. 그리고 혼잣말인 척 다 들리게 중얼거렸다.
“물정도 모르는 어리보기 망석중인가 하였더니, 어느 정도 세상 돌아가는 판세는 읽고 계셨구먼.”
“…….”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전하께서 황상을 잇는 일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날이 갈수록 신통의 패륜이 성하고 화난이 무르익는데, 제 얼굴 감추기에 급급하고 홀로는 설 수조차 없는 황후의 꼭두각시가 장차 이 나라를 어찌 다스릴지 보지 않아도 훤하기 때문이지요.”
“허면, 정통의 사람이 황상을 이으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인가.”
“…….”
“정통이 벽해를 장악했던 당시는 과연 태평성대이기만 했나. 차라리 내놓고 즐기자는 신통들의 태세가 나는 더 귀여워 보이는데. 내 눈엔 정통이나 신통, 다 같은 모리배야.”
“허면 장차 그 쓸모없는 모리배들을 어찌 처분하실 것입니까? 모두 불에 태워 죽이기라도 하실 요량입니까?”
결국 태자는 말문이 막혔다.
“하늘의 귀로 만백성의 소리를 듣고, 교화하고, 이끌어야만 하기에 왕이 듣는 소리를 천청(天聽)이라 이릅니다. 시궁창을 기는 천민부터 하늘을 쓰고 교활한 뒷짐을 진 귀족들에 이르러, 모두가 전하의 백성이고 자식이거늘 어찌 그들을 보듬는 데 편파를 두겠습니까?”
“…….”
“패륜이 성한 나라에는 무능력한 왕이 있다 하더이다. 무질서한 정세는 결국 무능력한 왕의 허물이요 책임이라 하더이다. 거룩한 위업을 달성하기에 앞서 온 세상을 너르게 애민할 수 있는 군주, 그리하여 만물이 바라는 소박한 평화를 하나하나 체현할 군주, 전하께서 진정 그런 군주가 되실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군요.”
어험, 헛기침으로 말을 맺은 미함은 정복 자락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가 입 다물고 망연해 있는데, 돌아서서 나서려던 미함이 문득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전하께서 혹여 저와 군신의 관계를 맺길 바라신다면, 사신단의 연회가 파한 뒤 남산 누마루로 오십시오.”
“…….”
“그리고 홍의 네놈은… 다향원에서 보자꾸나.”
서늘하게 일갈하고 돌아서서 가려는 듯하다가, 난데없이 도로 뛰어와서 홍의의 뒤통수를 거하게 후려친 뒤 그제야 분이 풀렸는지 아름다운 목란골의 풍경을 뒷짐 지고 감상하며 슬렁슬렁 멀어지는 미함이었다.
***
남은 자들은 한판 신명 나게 혼난 느낌에 잠시 말이 없었다. 무엇보다 홍의는 따로 후폭풍이 남은 터였다. 불안하면 으레 나오는 버릇으로 엄지손톱을 득득 물어뜯기 시작하는데, 문득 태자에게 손목을 붙들렸다. 다 해진 손끝으로 부드럽게 입술을 저민다. 그 간질간질한 숨결에 결국 홍의의 입가가 슬그머니 풀리는가 싶더니, 와락 웃으면서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혔다. 그새 해가 지려는지 선선한 바람과 함께 하늘이 발그레하게 붉어져 있었다.
“전하.”
“응.”
홍의는 잠시 휘파람을 불다가 태자의 품에 더욱 편히 기대었다.
“미함 공 좋은 분입니다. 믿으셔도 돼요.”
“…….”
“음…. 그래도 저어되신다면 남산 누마루까지 소신도 함께 동행하지요, 뭐.”
깜빡깜빡. 등지고 안겨 서로의 어깨에 턱을 건 채 눈을 맞추었다.
“나야 뭐 괜찮은데 너는?”
“저요?”
“어. 이따가 다향원 돌아가서 엄청 혼나는 거 아니야? 사람이 되게 괴팍하던데….”
에휴. 홍의는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게요. 미함 공 화나면 엄청 무섭거든요. 지난번에 전하랑 놀다가 조회 빠진 날 있죠? 그때도 무동들하고 싸잡혀서 삼 일 굶을 뻔했다고요.”
“태자궁에서 살아.”
“…….”
“내 침상 넓어.”
…그럴까요? 홍의는 감동받은 얼굴로 몸을 잘게 떨다가 아예 뒤돌아 태자의 품을 확 파고들었다. 저희 여기 있어요. 옥지와 화경이 여전히 화로에 부채질을 하면서 대체 먹으라는 생선은 안 먹고 또 저러고들 있다며 표정을 썩혔다. 새로 올린 청어가 이번엔 타지 않길 바랄 따름이었다.
***
태자에게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병이 있었다. 마른 몸과 자주 열이 나는 체질은 다년간의 체련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지만, 그 병은 사뭇 양상이 달라서 아무리 갖은 비술을 동원해도 소용이 없었다.
‘전하의 양물이 잠시 하늘을 보다 금세 시들시들 가라앉고야 마는데, 소녀의 깜냥으로는 도저히 도울 바가 없사옵니다.’
정모들뿐만 아니라 내의들까지 태자의 반항적인 가운뎃다리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아무리 용한 처방과 약재를 써도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의 병까지 뚝딱뚝딱 고쳐 낼 수 있는 의원은 없기 때문이었다. 육신의 일이되 육신의 욕망을 넘어선 문제라, 태자는 어쩌면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스스로 제 몸을 불구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이는 황후에게도 청천벽력이었다. 태자가 파정을 하지 못한다는 건 결국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뜻과 상통한다. 속 빈 강정에 텅 빈 주머니가 황상에 올라 봤자 얼마나 버티겠는가? 어서 빨리 대를 이으라는 문관들의 읍소가 끊이질 않을 것이고, 그로 인해 폐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태자가 장성하여 황위에 오르고, 태후의 삿된 시선을 벗어나 안온히 광영을 누리는 날만 손꼽아 기다려 온 황후는 내 아들은 고자가 아니라고 외치며 펄펄 뛰고 분기탱천하였다.
그리하여 은밀히 사자를 통하여 나라에서 방중술과 미태술이 뛰어나다는 유녀와 부인들을 돌아가며 태자의 침전에 들게 했는데, 그때 태자의 나이 열다섯이었다.
‘전하께서 아직 연치 유충하시어 그런 듯하옵니다….’
‘전하께서 병약하여 그러신 듯하옵니다….’
‘전하께서 여체에 무감하신 듯하옵니다….’
‘타국 황실의 내관들 중 제대로 거세가 되지 않아 발기만 가능한 자가 있사온데, 전하께서 그와 유사한 반응을 보이시니 이는 도저히 감당키 어려운 사례이옵니다….’
제대로 눈도 맞추지 못한 채 떠듬떠듬 늘어놓는 변명도 가지각색이었다. 이후 몇 년간 갖은 방술을 동원했지만 효험을 못 보고, 결국 최후의 보루랍시고 태자가 열여덟이 되던 해 교태와 방중술로는 벽해 제일이었던 이로 서로 자매를 동시에 후궁으로 들였다. 하지만 득의양양한 얼굴로 침전에 들었던 그녀들조차 일각도 안 되어 온몸에 뱀을 휘감은 채 알몸으로 걸음아 나 살려라 뛰쳐나오고 말았으니, 기실 황후의 안면에 깊은 수심의 그늘이 가실 날이 없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태자의 파정을 돕는 일에 굳이 인륜을 따지겠는가? 애초에 그 아이의 성향이 숫되고 말이 없는 것이 꼭 계집아이처럼 여린 면이 있었음에야, 내 이러한 조짐을 능히 예감하였도다. 황통을 보한다는 명목으로 태자의 사사로운 취향까지 간섭할 수는 없는 일. 무엇보다 남색이라면 이미 귀족들도 대수롭잖게 행하고 있는 바이니 큰 허물이 아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황후가 문득 미간을 짚으며 고개를 들었다.
“해서, 홍의와 화락한 뒤 우리 태자의 낯꽃이 몰라보게 피었다고?”
야심한 시각, 황후궁에 불려온 옥지는 예의 조곤조곤한 어조로 아뢰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하옵니다. 뿐만 아니라 좀처럼 낯선 자와 섞이기를 멀리하시며 태자궁을 벗어나기 저어하시던 전하께오서, 근래 들어 말수도 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전처럼 꺼리지 않고, 무엇보다 부쩍 자주 웃으시옵니다. 모든 것이 홍의 님과 사사한 이후라고 태자궁의 궁인들 모두가 수긍하는 바이옵니다.”
“그토록 목석같던 태자가 드디어 마음을 준 이가 하필이면 사내라…. 다행한 일인지는 모르겠구나.”
황후는 고개를 설레 젓다가 문득 음성을 낮추었다.
“한데 말이다.”
“예, 황후 마마.”
“…둘이 진짜 했느냐?”
정곡을 쿡 찌르는 하문에 옥지는 올 게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어서 답을 올리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잠겨 있었다.
“미욱한 소인이 보기로 아직… 끝까지 이르진 못한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어찌하여?”
“그것이… 도경에서 돌아온 직후, 홍의 님이 아무도 몰래 태자궁을 찾아든 적이 있습니다. 헌데….”
“헌데?”
“그것이 망극하게도… 소인은 언제나 전하의 지척에서 갖은 시중을 다 들다 보니 참으로 면구스럽게도 전하의 위용… 을 잘 알지 않사옵니까?”
“흐음.”
“또한 전하의 위용이라는 것이… 보통이 아니시지 않사옵니까?”
황후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준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르다 뿐인가. 내 아들의 위용이 보통은 족히 넘고말고. 묘선이 그 아이도 우리 태자를 가벼이 보고 성급하게 굴었다가 턱이 아작… 아, 아니, 턱이 빠지질 않았느냐.”
옥지는 고개를 돌리고 잠시 기침을 하다가 인중에 솟는 땀을 저고리 고름으로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해서, 홍의 님이 진정 그 위용을 몸으로 모셨다면 평소처럼 거동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데, 그날 홍의 님은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사옵니다.”
“일리가 있구나. 허긴, 여인도 아닌 사내의 몸으로 태자의 위용을 받았다가는….”
잠시 허공을 보며 무언가 헤아리는 듯하던 황후는 곧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목을 움츠리고 한차례 조금 떨고는, 다시 우아하게 정비한 얼굴을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최소 사나흘은 방구들을 져야 할 게야. 사내가 태자와 합일하고 평소처럼 재바르게 싸돌아다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그러하옵니다….”
색사의 세계란 참으로 심오하여라…. 처녀 옥지는 일각 만에 십 년은 늙어 버린 파리한 얼굴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해서, 파정은 아직이라더냐?”
끄응. 옥지는 제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짧게 털어 내고는 풀리려는 눈에 힘을 주었다.
“양전의 지밀 간의 일을 한갓 시비인 소인이 어찌 알겠느냐마는 부족한 소견으로나마 답을 올리자면… 아직이신 듯하옵니다.”
“이런.”
황후는 다향원의 축국 경기를 보다가 실수로 구를 놓치고 넘어지는 무동을 보았을 때처럼 팔걸이를 탁! 치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 태자가 네게 그리 말하더냐?”
“전하께서 일언반구 하시겠나이까? 다만 전날 찾아든 홍의 님의 언행을 미루어 짐작해 보았을 때 소인의 눈치껏 그리 판단했사옵니다. 또한 소인이 보기로 전하께서는 딱히 옥체의 변화가 없으시되… 다만 홍의 님께서….”
“홍의가?”
“홍의 님께서 더 아, 안달을 내시는 듯 보였…. 그러니까 전하의 타고난 재량 덕분에 되레 홍의 님이 신천지를 경험한 게 아닌가 하는… 아 물론 미욱한 소인이 뭘 알겠냐마는….”
“…….”
“…….”
누가 누구의 색신이라는 건가. 순간 할 말을 잃은 황후는 잠시 멍한 얼굴로 옥지를 보다가, 지게문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또 한참을 망연히 눈만 깜빡거리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