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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련-51화 (51/111)

#51

옥지가 황후궁에서 나와 자리끼와 침의를 챙기러 태자의 침전에 들었을 때, 마침 태자는 턱을 고이고 지게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살구, 앵두, 매실, 능금이 앞다투어 매달린 궁원으로부터 향긋하고도 새곰새곰한 냄새가 풍겨 들었다. 후원 너머 남천에서 사내들이 천렵을 즐기는지 이따금 물장구치는 소리와 잡았다, 놓쳤다, 왜자기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장신구가 든 옥갑과 목함을 받쳐 든 옥지가 곁으로 다가섰다. 태자는 여전히 지게문 밖을 응시하며 중얼거린다.

“곧 홍의가 올 거야.”

“머리를 정돈해 드리오리까?”

“상투관 말고 가벼운 끈으로 묶어 줘.”

“그리하겠습니다, 전하.”

등받이에 몸을 눕듯이 기대고 천장을 바라보는 태자는 졸린 눈을 깜빡거리며 연신 멍한 얼굴이었다. 옥지도 만만찮게 피로한 상태였지만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묵묵히 제 할 일을 섬기는 데 이골이 난 그녀는 결코 상전 앞에서 그러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황후 마마께서 홍의 님에 관하여 이것저것 여쭈었사옵니다.”

등 뒤에 붙어 선 옥지가 빗질을 시작했다. 긴 머리칼을 여러 번 빗어 윤색을 내고, 평소처럼 상투를 틀지 않고 성기게 똘똘 말아 금실과 은실로 수놓은 비단 끈으로 동그랗게 동여매 주었다. 투명한 달빛과 주홍색 등불이 아롱아롱 내실을 밝히는 사이사이, 어머니의 손길처럼 부드럽고 엽렵한 옥지의 손이 태자의 턱을 살짝 올려서 머리를 젖히게 하였다. 태자와 거꾸로 눈이 마주쳤다.

“무어라 하셨는데?”

“늘 그렇듯 전하의 옥체에 관해 저어가 많으셨지요. 특히 홍의 님과 더불어 파정을 이루셨는지… 그를 가장 궁금해하셨사옵니다.”

“파정이라.”

“…….”

“무슨 느낌일까.”

……. 소인이 어찌 알겠사옵니까. 옥지가 당황하여 마른 입술을 축이는 사이, 알게 모르게 눈빛이 가라앉은 태자가 일어서더니 스스로 포를 벗고 속저고리를 풀어 탈의하였다. 옥지가 얼른 목함을 열어 안에 든 비단 포를 꺼내어 어깨에 대어 주었다. 익숙하게 오른쪽 팔부터 밀어 넣는 어깨로 탄탄한 보조개가 패었다.

“무슨 옷이 이리 부드럽지?”

검고 붉은 옷감의 조화가 농홍하고도 요염하였다. 미끈거리고 흐늘거리는 것이 맨살에 닿으니 차갑고도 가벼워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양 편안한 것이다. 옥지가 가벼운 요대로 허리춤을 비끄러매자 검붉은 침의 자락이 가슴팍에서 흘러내릴 듯 벌어졌다.

“연초에 예국 황실에서 박래품으로 보내온 하절기용 침의이온데, 내내 아껴 두었다가 오늘 처음 드리옵니다.”

실은 황후궁에서 받아 온 것이었지만 옥지가 무슨 생각인지 시침을 뚝 떼는데, 마침 내실 밖에서 화경이 고했다.

“전하, 향선 홍의 존전에 들었사옵니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홍의가 들어섰다. 그런데 조신하게 읍을 올리다 말고 태자를 보더니 입을 떡하니 벌리는 것이었다. 왜 저러는가. 영문을 모르는 태자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는데, 옥지만이 흔흔하게 코를 들었다. 누구 손으로 꾸며 드렸는데 저 정도 반응이야 마땅하고말고.

‘각 잡고 분위기 좀 태우라는 황후 마마의 명을 받자와 일부러 저런 침의를 입혀 드렸는데 어찌 마음에 차십니까?’

‘마음에 차기에 앞서 오금이 저리고 오금이 저리다 못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옥지와 홍의는 말없이 눈짓으로 주고받았다. 허공을 웽웽거리는 초파리 한 마리가 아무래도 홍의의 벌어진 입으로 들어갈 기세기에 맨손으로 휙 잡아채고는, 조용히 양전에게 읍을 올리고 내실문 밖으로 종종종 사라지는 옥지였다.

태자가 여전히 앉은 채로 손짓했다. 어험. 헛기침으로 애써 사색을 떨쳐 낸 홍의는 주홍색 책보를 탁상 위에 올려놓고 머뭇머뭇 태자에게 다가갔다. 태자가 다리를 벌려 앉을 틈을 내어놓고는 턱 끝으로 그곳을 가리켰다. 홍의는 어이쿠, 큼큼, 헛기침을 하며 목덜미를 만졌다가 먼 곳을 보다가 하더니 슬그머니 엉덩이로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의자가 다 삐걱거렸다.

“미함 공한테 안 혼났어?”

태자가 홍의의 허리를 감으며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홍의는 간지러워서 킥킥거리면서도 더듬더듬 태자의 손에 깍지를 끼워 넣었다.

“안 혼나기는요. 명일 저더러 정통 무동들의 옷을 모두 빨래하라 하십니다.”

“…미친놈 아니야?”

“허허, 전하. 아무리 그래도 원주께 미친놈이라니요. 미친놈까지는 아니시고 다만 그와 비슷한 분이신 게지요.”

“그 말이 그 말이지.”

“어감이 다르지 않습니까. 또한 검둥개 막사를 소제한 내공으로 미루어 빨래 그까짓 것은 일도 아니지요, 무어.”

태자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나 찔리라고 하는 말이야?”

홍의도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전하 찔리시라고 하는 말입니다.”

고개를 살래살래 젓던 태자는 한 팔로는 홍의의 허리를 감고 나머지 손을 뻗어 탁상 위 보자기를 풀었다. 보자기에 든 물건은 여태껏 홍의가 착실히 그린 초상화였다.

“아, 제법 많이 그렸네?”

“손목이 부러지지는 않았는가 모르겠습니다.”

홍의가 코를 들고 지절대자 태자가 홍의의 오른쪽 손목을 주물러 주었다. 홍의는 팔자 좋게 태자의 품에 퍼져서는 잔뜩 거드름을 피웠다.

“헌데 전하, 이쯤 되면 말씀해 주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무얼?”

“저 그림들을 어디에 쓰시려는지 말입니다.”

“응… 헌데 홍의야.”

“예, 전하.”

“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허벅지가 참 굵구나.”

“…….”

태자의 손이 예고 없이 미끄러져 허벅지 안쪽을 잡아당겼다. 홍의는 방금 전까지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도 까먹고 잠시 숨을 멈췄다.

“나보다도 굵고 단단하잖아. 말타기를 자주 해?”

“…마, 말타기도 말타기지만, 재작년까지 틈만 나면 향선들과 축국을 했었지요. 구를 높게, 멀리 차려면 아무래도 허벅다리가 튼실해야 하니 하체를 강화하는 체련을 꾸준히 해 온지라….”

“힘줘 봐.”

이것도 태자의 명인가. 홍의는 잠시 민망스러웠지만 이내 명을 받자와 얼른 근육을 세웠다. 하얀 가반에 둘러싸인 허벅지가 팽창해 올랐다. 하도 탄력적이고 단단해서 칼로 찔러도 튕겨 낼 것 같았다. 태자는 순수하게 감탄하는 소리를 내더니 감도를 측정하듯 깊은 안쪽을 억세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팔걸이를 짚은 홍의의 손톱이 허옇게 질리며 힘이 들어갔다.

“핫, 저, 전하. 아프옵니다….”

“여기가 말탈 때 쓰는 근육이지? 향선들은 다 이런가?”

어느덧 홍의의 온 얼굴이 붉어졌다. 얼핏 등 뒤에서 맞춰 오는 푸른 눈동자에서 진심으로 부럽다는 기색이 흘렀다. 아아, 애초에 이러려고 온 것이긴 하지만 너무 빠르지 않은가. 아직 선도 방술 책들도 보자기에 싸인 채고, 어느 정도 수업하는 시늉이라도 좀 하다가 느긋하게 거사를 치르리라 예상했건만! 이 색골이 벌써! 그러나 내심 지금 하나 나중에 하나 아무래도 좋았던 홍의는 뜨끈해진 볼을 태자의 목덜미에 문지르며 지금껏 숨겨 왔던 수줍은 색을 썼다.

“아이고 전하, 이러다 애써 벼려온 근육이 다 풀리겠습니다, 돌연히 어찌 이러십니까…!”

“…그래.”

그런데 나지막이 대꾸한 태자가 다음 순간 몸을 일으키려는 듯 홍의의 등을 밀었다.

“피곤한데 이만 잘까.”

“예, 이만 자지….”

“…….”

“…요?”

대꾸하는 홍의의 얼굴이 천천히 굳으며 어느 순간 정색이 번졌다. 그 찰나에도 오만가지 사색이 흘렀음은 물론이다.

‘…이만 자자고? 어떤 잠을 말하는 거지? 그 잠이야? 아니면 그냥 잠이야? …에이, 설마 후자겠어?’

그러나 태자는 등불을 훅 불어서 끄고 휘장을 걷은 뒤 홍의를 눕히더니 그 옆에 나란히 누워 잘 자라고 속삭인 뒤 그대로 등을 지고서 색색 콧소리를 내며 세상 포근한 얼굴로 깊은 단잠에 빠져들었고 홍의는 깊은 살의에 잠겨 들었다.

***

저잣거리의 아침은 활기차다. 상인들은 걸걸한 목청을 드높여 물건값을 왜자기고 행인들은 값 타박을 하며 흥정을 붙인다. 댓바람부터 코를 벌겋게 물들이고 비치적비치적 춤을 추는 고주망태들 사이로 집채만 한 짐들을 바리바리 얹은 황소가 워낭을 울리며 지나친다.

군부의 말을 빌려 아침 일찍부터 금성을 나선 홍의는, 막 도경의 동쪽 장터에 당도한 참이었다. 허리끈으로 친친 동여맸던 보검을 내리고 먼지 묻은 평복 자락을 털어 내었다. 평시 궁 밖으로 출타할 적이면 향선의 표식이라고 자랑스럽게 장식하고 다녔던 비취 경식과 관모마저 차리지 않은, 평범한 공자의 차림이었다.

그렇게 민간인으로 위장한 홍의는 헛기침을 하며 말고삐를 끌고 주막으로 들어갔다. 마침 마구간에서 말똥이나 치고 있던 중노미(주막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내)가 선족으로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헤헤, 귀공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는 어인 일이십니까요?”

썩은 앞니를 드러내고 히죽히죽 웃는 모양이 비위에 거슬렸으나, 홍의는 접선을 펼쳐 들고 설렁설렁 부채질을 하였다.

“내 겉귀로 듣자 하니, 이곳 도경의 동쪽 장터에만 구할 수 있는 귀한 토산품이 있다던데.”

그러자 중노미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접선으로 반쯤 가린 얼굴도 그렇거니와 나지막한 옥음에서도 귀태가 자르르한 것이 물정 모르는 공자님이로고. 어디서 소문은 부리나케 듣고 달려와서는 귀골 행세는!

“아아, 얼마 전 제 불알친구 놈이 차린 ‘홍안 상점’ 말씀입니까요? 그렇다면 맞게 잘 찾아오신 겝니다! 그곳이야말로 남녀노소를 막론하며 장생불사를 돕는 고귀한 물품들이 득시글한 곳입지요. 자자, 쇤네를 따르시지요. 요짝에서 저짝까지, 서른 보 안짝이면 당도합니다요.”

중노미는 촐랑이 수염처럼 짓까불며 앞장을 서기 시작했다. 홍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뱁새눈을 뜨다가, 행여 누가 알아볼까 접선을 코밑에 댄 채 조심조심 그 뒤를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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