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52화 (52/111)

#52

향선 체면에 말이 아니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으려니. 중노미를 쫓는 홍의의 눈시울이 어쩐지 붉어진다. 중천에 뜬 해조차 야속하기만 하다.

…우리 전하가 달라지셨다.

아무리 눈치코치를 개밥 말아먹은 홍의라지만, 상황이 이쯤 되면 깨닫지 아니할 수 없었다. 태자가 변했다. 화양각에 다녀온 이후부터. 사실 이유를 찾으려니 스스로 그간 부렸던 추태를 되짚고 톺아야만 했는데, 그러한 과정 중 손발이 아스라이 증발할 뻔한 것은 예삿일일 뿐이었다. 밤새 노그라져 꿀잠을 자는 태자 옆에서 홍의는 긴긴밤 바늘로 허벅지 찌르는 심정으로 지새워야만 했다.

지금까지 방사를 보채며 시도 때도 없이 들이대던 것은 태자 쪽이었다. 원래의 태자였다면 어젯밤 절호의 기회를 놓쳤을 리 없다. 그랬던 그에게 어찌하여 난데없는 관음보살이 쓰였는고? 홍의의 양물이 너무 작아 실망한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충 볼 장을 봤더니 확 흥미가 가셨는가? 그도 아니라면, 홍의가 못해도 너무 더럽게 못해서 천년의 사랑마저 식었는가!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도 도무지 아귀가 머슬머슬했다. 정녕 마음이 식은 것이라면 전날 목란골에서 입맞춤은 왜 했단 말인가? 그토록 앞뒤 안 가리는 호색한처럼 굴다가도 손바닥 뒤집듯 무욕의 성인군자로 변모하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사내였다.

‘이제 나랑 하기 싫어지신 것일까…? 벌써 내가 지겨운 것일까…? 내가 조루라서? 자꾸만 찍찍 싸서?’

홍의는 기억한다. 간밤에 침상으로 걸어가면서 짧은 순간 마주친 그 태무심한 눈빛을. 그때 정녕 태자의 눈빛에는 한 자락 성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녕 이대로 주무시려는 건가. 목까지 차올랐던 질문도 쏙 들어갔다. 남과 여의 성욕이 나이와 계절에 따라 다르게 들놀아 그 시기를 맞추기 어렵다는데, 홍의와 태자도 딱 그 짝이 아닌가. 꽃봉오리는 봄에 개화하고 피리는 가을에 노래함에야! 이야말로 인간사 구경에 재미 들린 천신의 얄궂은 농간이 틀림없었다.

어찌하겠는가. 홍의는 원했다. 태자의 곱고 맑은 눈동자에 전처럼 푸른 정욕이 들끓기를,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원했다. 어여쁜 눈두덩을 핥고 꿀을 빨듯 달콤하게 입을 맞추고 싶었다. 짓궂은 손짭손 아래서 한없이 파헤쳐지고 농락당하고 싶었다. 다급하게 치러진 데다 끝까지 가 보지도 못했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기필코 만반의 준비를 하여 영혼과 육신을 남김없이 내어 주고 싶었다. 꿀을 찾아 천지를 떠도는 벌과 나비의 습성은 기실 홍의에게도 충만하였다. 급한 자가 뒷간 찾는다고, 태자의 성욕을 다시 왕성하게 지필 수만 있다면 섶 지고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자신이 있었다.

그리하여 댓바람부터 미복을 꾸리고 장터의 음기구 상점까지 기웃거리는 것이다. 물론 이 일을 미함에게 들킨다면 당장 묏자리부터 알아봐야 할 터였다. 홍의는 중노미의 뒤를 쫓으며 고개를 숙이고 접선에 얼굴을 더욱 감추었다.

“이보, 빈 선생! 내가 댓바람부터 아주 귀한 손을 모셔 왔으니 어서 나와 판을 열라고!”

‘…빈 선생?’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설마하였다. 하지만 우중충한 예감은 늘 틀리는 법이 없으니.

중노미의 커다란 외침에 삼나무로 가판을 세운 작은 노점 안에서 익숙한 껄껄껄 웃음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홍의의 표정도 단숨에 썩어 들어갔다.

“예라꼐라! 물렀어라! 댓바람부터 이런 꽃 공자가 첫손으로 오셨으매 오늘 할당은 다 팔았네그려!”

우람한 팔뚝으로 파리를 쫓으며 육성으로 웃어 젖히는 자는 아니나 다를까, 지긋지긋한 녹빈이었다. 홍의는 접선 뒤에 얼굴을 숨긴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이 시각이면 으레 그렇듯 시녀복 차리고 다향원이나 기웃거리고 있었을 놈이 어찌 이곳에!’

녹빈이 그간의 공로로 태자에게서 은자 닷 근을 하사받고, 집 사고 땅 사고 남몰래 장사까지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홍의는 응당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이 귀한 첫 손이 다름 아닌 홍의라는 사실을 알 리 없는 녹빈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화장을 떡칠한 얼굴을 들고 날듯이 가판을 빠져나왔다.

“어유, 꽃 공자님! 부끄러워 마시고 이 빈이에게 다 털어놔 보시어요! 우리 꽃 공자님은 무엇이 그리 안달 나고 갈급하여 고 수줍은 발걸음을 예까지 잉챠잉챠 하셨을꼬?”

“헐헐헐, 내 잠시 지켜보니 이 공자님께서 여간 수줍음을 타시는 게 아니더라고. 공자님, 저기 저 녹빈이라는 놈이 아랫도리 사정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이 분야 박물군자입니다요. 허심탄회하게 여쭈시고 좋은 물건 얻어 가십시요잉?”

중노미는 낄낄거리며 팔자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불알친구라더니, 이러한 수작을 한두 번 맞춰 본 게 아닌 듯했다. 어쨌든 동무가 힘써서 물어다 준 물고기를 놓칠세라, 녹빈은 완강히 거부하는 홍의의 손목을 붙들고 가판 앞으로 끌어당기기에 이르렀다. 무엄하다고 호통 칠 새도 없었다. 붉은 피륙 위에 각양각색으로 늘어선 음구들과 춘화집을 접선의 틈새로 발견한 홍의의 두 눈이 단숨에 휘둥그레졌다.

“본디 색사의 세계란 광대하고 기이한 것! 이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찬란한 귀물들을 찬찬히 살펴보시지요. 혹 공자님께서 찾으시는 요물이 이 현옥환(懸玉環)은 아닐는지요? 이 옥 반지로다 말할 것 같으면, 양물의 뿌리에 끼워서 피가 쉬이 돌지 못하게 하여 찍찍 울던 조루도 일각은 더 힘을 쓸 수 있게 하는, 그야말로 조루들에게 있어서는 빛과 소금 같은 존재다, 이 말이지비!”

…뭣이라고? 일각씩이나? 홍의가 순간적으로 그 커다란 옥환을 향해 손을 뻗으려다가 필사의 힘으로 눌러 참는데, 녹빈은 벌써 재바르게 다음 물건을 끌어다 놓고 구구절절 사설을 읊었다.

“아니면 이 봉제고(封臍膏)라는 미약은 또 어떠합니까? 이것을 배꼽 아래 붙이면 정력이 종마처럼 증강하여 마치 하룻밤이 두 밤처럼 기일게 느껴지는 신묘한 고약이지요!”

“…….”

“또 또 요 면령(勉鈴)을 보시지요! 이것은 면전국(緬甸國, 미얀마) 이라는 나라의 토산품이온데, 이태 전 타국을 통해 벽해로 은밀히 밀수되었습니다. 요 앵두같이 작은 알맹이로 말할 것 같으면… 아아.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손에 한번 세게 쥐어 보시겠어요?”

녹빈은 홍의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서 손바닥 위에 작은 알맹이를 올려놓더니 억지로 꼭 쥐게 하였다. 그런데 열을 머금은 알맹이가 얼마 후 부르르 떨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저절로 진동하는 것이 아닌가. 이, 이게 뭐지? 놀라 굳은 홍의의 귓전으로 녹빈의 매작지근한 입김이 훅 끼쳤다.

“나리.”

“…….”

“이것을 어디에다 넣을까요?”

푸더더덕!

기함한 홍의는 날갯짓 치듯 팔을 푸덕거리며 고대로 면령을 던져 버렸다. 마찬가지로 놀란 녹빈이 간신히 몸을 던져 잡아채고는 두 눈을 매섭게 부리부리 떴다.

“에나, 참말 기함을 하겠네? 이 비싼 것을 어찌 그리 험히 취급하셔요? 설마 이조차 공자님의 성에는 차지 않는단 말씀이신가요? 옳아, 이제 보니 샌님이 아니라 순 색정광에 저질이었구먼?”

파는 놈이 사는 놈더러 저질이라고? 헛숨을 삼키던 홍의는 결국 접선을 착 접고 얼굴을 드러냈다. 그리고 얄미운 녹빈의 코를 있는 힘껏 콱 비틀어 쥐었다.

“악! 나, 나리?!”

“야 이 허랑방탕한 놈아, 뭐 어디에다 뭘 넣어? 네놈 콧구멍에다 넣어 주랴?”

“으헉! 아고고, 이거 놓지 못해요!”

녹빈은 콧대가 다 왁살스레 비틀리는 느낌에 소중한 면령이 허공에 날아가는 줄도 몰도 모르고 발악을 하였다. 홍의는 기가 찬다는 듯 외쳤다.

“대체 네놈의 정체가 뭐냐? 기루에서 노닐다 시녀 노릇 하더니 다향원을 들쑤시질 않나, 이제는 하다 하다 장터에서 음구를 팔다니!”

“아이고, 그러는 나리야말로 왜 내가 가는 곳마다 쫓아와서는 깽판이에욧?!”

“깽판? 네가 진정한 깽판의 맛을 보고 싶어 그러느냐?”

“이미 실컷 봤네요 뭐! 코 떨어져!”

한참을 그렇게 푸닥거리를 하다가 간신히 홍의의 매운 손을 떼어 낸 녹빈은 알알한 코를 싹싹 비볐다. 대낮에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벌겋게 코주부가 되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 나리가 진짜 사람 잡겠네! 대체 또 뭡니까? 왜 예까지 쫓아와서 지랄이야 지랄이!”

녹빈이 벌건 코를 붙들고 정색을 하며 꽥꽥대자 순간 홍의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제가 예까지 왜 왔더라, 싶은 것이다.

‘…내가 조루라는 사실을 꼭 이놈 앞에서 떠벌려야 하는가.’

사실 정력 강화제야 제 손으로도 얼마든지 사부작사부작 만들어 낼 수 있지만, 반대로 정력이 너무 넘쳐 발병한다는 조루 증세는 어떤 묘약으로도 완화가 어려웠다. 그런데 도경에 얼마 전부터 기묘한 음구를 들여 조루를 지루로 만들어 준다는 상점이 열렸다기에 잔뜩 기대를 하고 왔더니만, 그 주인이 녹빈이었을 줄이야. 천신 무심하신 것이야 하루 이틀 겪는 바가 아니지만 이는 해도 해도 너무한 것이다.

아무튼 이번에도 사실대로 털어놓으려니 영 체면이 안 산다. 크큼, 헛기침을 한 홍의가 뒷짐을 졌다.

“근자에 음란한 성기구를 들여와 벽해의 풍기를 문란케 하는 황음무도한 놈이 있다는 밀보를 받았다. 해서 벽해의 향선인 내가 이렇게 미복잠행을 하여 그놈을 처단하러 온 것이지.”

별 개소리를 듣겠다는 듯 녹빈의 눈이 게슴츠레 뜨였다.

“그것이 참말이에요?”

뜨끔. 홍의는 속내를 애써 감추려 더욱 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참말이고말고?”

“물건 사러 온 게 아니고요?”

“이딴 걸 무엇에 쓴다고 사러 오냐, 내가?”

“아니 가래떡도 좋다고 챙기신 분이 난데없는 청백리 시늉을 하니 빈이가 어이가 없어서 그러지요. 이럴 거면 가래떡은 왜 받아 갔대?”

“…네 이놈! 이렇게 상점까지 열고 팔난봉을 부리는 것을 알면 군부에서 당장 경치러 올 것이다.”

어설프게 말 돌리는 수작을 노련한 녹빈이 못 알아챌 리 없다. 졸아들기는커녕 콧김을 팽 뿜으며 팔짱을 끼는 것이다.

“흥! 군부 나리들은 뭐 얼마나 음전해서요? 귀족분들이 낮에는 접선 들고 우아한 체 점잔을 빼다가 밤만 되면 뒤에서 신나게 호박씨 까는 것을 빈이가 모를 줄 알아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딱 그 꼴이네 증말!”

“이놈이?”

“게다가! 우리 홍안 상점은 언감생심 병졸짜리들은 상종도 못 할 태자 전하께서 떡하니 뒤를 봐주고 계신데, 두려울 게 무어예요?”

“…뭐?”

태자가 뒤를 봐주고 있다는 소리에 찬물이라도 쏘인 듯 홍의의 표정이 굳었다. 내키는 대로 말을 쏴붙이던 녹빈도 제풀에 당황하여 입을 싹 다물고 홍의의 눈치를 보았다.

“전하께서 뒤를 봐주고 계시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재우치는 홍의의 두 눈에서 곡괭이가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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