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전하.”
“…응?”
“어수요. 어서요.”
태자가 별수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손등을 감싸는 홍의의 손길이 무척 부드럽고 포근한 것이다. 태자를 바라보는 홍의의 눈빛에는 염려만이 가득했다.
“어찌 이 귀한 어수로 그리 험한 짓을 한단 말입니까?”
홍의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노수와 사염이 그리 흠씬 당하는 것을 보니 고소하고 속 시원했다. 좋아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공은 공이고 사는 사였다.
“아무리 전하의 위가 높다 한들, 신통 귀족들을 그리 험히 다루는 일은 국법이 금하는 일입니다. 또한, 혈기왕성한 향선들이 술 마시다 시비가 붙고 주먹다짐을 하는 것은 도처에 널린 일이고요. 일일이 신경 쓰고 걸고넘어졌다간 나 스스로 견디지 못할 뒷말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귓전을 파고드는 곳이 곧 다향원이란 말입니다. 그때마다 전하께서 나서서 이런 사달을 내실 겁니까? 참으로 걱정입니다. 소신보다도 전하께오서 어떤 불이익을 당하실까 그것이 가장 걱정입니다.”
‘홍의는 화가 난 게 아니구나.’
속 편할 대로 판단한 태자는 제 손등을 감싼 홍의의 손을 뿌듯하게 바라보다가 은근슬쩍 깍지를 끼워 넣었다.
“그렇구나. 내가 잘 몰랐어.”
“…….”
홍의는 뱁새눈을 치떴다. 아니 이 어린 노무 자식이…. 속으로 무엄한 망발을 삼키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태자가 어느덧 뱀처럼 교묘하게 끼운 손깍지를 은근하게 조물거리며 지그시 눈을 맞춰 오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정신이 다 아뜩해지려 했다.
‘어디서 이딴 수작질에만 자알 타고나 가지고…! 제대로 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만날 애만 태우고!’
야속한 마음에 막상 손을 빼자니 그건 또 아쉬웠다. 하는 수 없었던 홍의는 여전히 손은 잡혀 있는 채로 싫은 척 콧방귀나 뀔 따름이었다.
“…전하는 가끔 다른 분 같으십니다.”
홍의는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세상 둘도 없이 유순하시다가도 돌연히… 돌연히 다른 사람 같은 눈을 하시니, 가끔은 두렵습니다.”
지분지분하던 손길이 멈추었다. 그리고 쳐다보는 눈빛이 ‘그대도 두려워하는 게 있어?’라고 묻는 듯하여 순간 긴장이 조금 풀렸다.
“아까는 사실 소신도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신통 놈들… 아니, 노수와 사염은, 평시 해운의 입 속의 혀처럼 구는 듯하지만 알고 보면 고 세 치 혀로 어리숙한 해운을 부추기고 조종하지요. 그놈들 눈에 신통이 아닌 자는 모두가 하천인일 따름입니다.”
“죽일까?”
“아이고.”
홍의가 제풀에 웃었다. 여상하게 묻긴 하였지만 태자는 진심인 듯했다. 그는 신통 사람들과 다른 듯하면서도 어쩔 도리 없이 닮아 있었다. 홍의는 그런 태자의 양면적 모습이 가끔은 두려웠고, 한편으로는 기이하게 아름다워 보였다. 그 잔혹한 아름다움에 빠질까 봐, 그래서 자신조차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할까 봐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극존을 안전에서 능멸하다니, 물론 그놈들은 재삼재사 죽어 마땅하지요. 하오나 남의 악담에 곧이곧대로 상처받고 화내고 반응하면 결국 상대방의 의도에 휘둘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소신이야 일개 범부일 따름이라 경거망동의 우를 범할 때도 있으나, 전하께오선 말 한마디조차 태산을 옮기듯 무겁고 진중하게 행하셔야 합니다. 군주가 어찌 누군가의 말질 따위에 일희일비하겠습니까? 스스로의 분노도 다스리지 못하는 군주가 어찌 평천하를 이루겠습니까?”
태자가 여전히 손을 맞잡은 채로 천천히 탁상 위에 엎드렸다. 그리고 깍지 낀 손들을 가만히 응시하였다. 빤히 지켜보던 홍의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심정이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요.”
“…….”
“소신도 어릴 적에는 어머니가 잔소리하실 때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전하처럼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드랬죠.”
태자는 무심하게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좀 집중하여 들어 주십시오. 소신이 이래 봬도 전하의 스승입니다.”
“…….”
말하고도 아차 싶고 민망한데 듣는 상대는 오죽했으랴. 태자가 그건 아니지 않으냐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자 홍의는 괜히 인중을 늘렸다가 줄였다가 하며 코 옆을 긁는 척했다.
“그대는….”
태자는 낮게 운을 떼었다.
“너는 어릴 때 어떤 아이였어?”
“소신이요? 소신은 동백골의 제일가는 사랑둥이로 통했지요? 그나마 소신이 그 작은 촌구석의 웃음보따리이자 활력을 불어넣는 존재였다고 할까요.”
‘재앙을 불어넣는 존재였겠지.’
태자가 여전히 엎드린 채로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어릴 때 분한 일이 생기면 도롱뇽이나 개구리를 잡아 괴롭혔어. 그 여리고 숨탄것들의 배를 가르고 눈을 파내면서.”
“…….”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의 눈도 이렇게 파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 그러면 모두가 앞을 보지 못하니 굳이 내가 면사를 쓸 필요도 없잖아.”
홍의의 눈빛이 흐려졌다. 태자는 남의 말을 대신하듯 무심하게 외웠다.
“수신제가 연후에 치국평천하하리라. 심신을 닦고 집안을 정제해야만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한다…. 제왕의 도는 너보다도 내가 잘 알걸.”
“아시면서 안 따르시니 문제지요.”
홍의가 눈을 흘기는데 태자가 깍지 끼운 손을 잡아당겨 홍의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보드랍고 말랑하고 촉촉한 입술의 감촉과 함께 따스한 입김이 훅 끼쳤다. 홍의가 손등을 움찔거리다가 이내 입술을 감쳐물고 눈을 부릅떴다.
“바로 이러시는 것을 양면적이라 하는 겁니다.”
“?”
“괜히 김칫국 건네지 마십시오.”
“김칫국이라니?”
정녕 어리둥절해 보이는 표정에 홍의는 이가 다 갈렸다. 댓바람부터 동쪽 장터까지 나가서 녹빈이 놈에게 한바탕 쪽은 다 팔고, 빨래하다가 흠씬 읃어맞기나 하고.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누구 때문이더라? 생각할수록 야속하고 억울하였다.
“전하는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분입니다. 연일 이리 하셨다가 저리 하셨다가 성심이 널을 뛰시니 소신이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무얼 말하는 건데?”
이 인간이 정녕 몰라서 묻는 것인가 아니면 시침을 떼는 것인가. 홍의는 망설이며 입술을 짓깨물다가 고개를 들었다.
“간밤에 왜 그냥 침수 드셨습니까?”
“…….”
“소신이 옆에서 있는데 정녕 아무런 성욕도 일지 않으셨습니까?”
“일었지.”
홍의의 얼굴이 왈칵 붉어졌다. 슬슬 씨근거리는 모양이 범상치가 않았다.
“헌데 왜요!”
일었다니, 일었으면서 그냥 잔 게 더 나쁘지 않은가. 예상치 못한 홍의의 분기탱천에 흠칫 놀란 태자가 의자와 함께 끼긱, 조금 물러났다. 마침 정자 밑을 서성이고 있던 화경은 저분들이 또 시작이구나, 아무나 이기라면서 씁쓸한 입맛이나 쩝 다셨다.
“사내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소신의 허벅다리를 주무르시다 말고 침수나 드시는 것이, 그것이 말이나 됩니까?”
“…….”
홀로 짭짭대던 화경이 흠칫하여 정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게. 그건 전하께서 잘못했네.
“전하는 이제 소신과 하기 싫으신 게지요? 소신이 조루라서 실망하신 게지요?”
전하 저도 궁금하옵니다. 화경은 덩달아 심각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거야 네가 워낙 더럽게 못하니까.”
“…….”
“그렇잖아. 어차피 파정도 못 할 거 세워서 뭐 하나 싶었지.”
그 가차 없는 대꾸에 화경은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주먹으로 손바닥 위를 탁 쳤고, 홍의는 의자를 우당탕 넘어뜨리며 솟고라지듯 벌떡 일어섰고, 아차 싶었던 태자는 의자에서 내려가 탁상 밑에 은신하여 숨을 죽였다. 폭풍전야처럼 싸늘한 침묵이 사위를 맴돌았다. 고요가 길어지자 태자는 탁상을 쥐고 눈만 슬쩍 내밀었다. 예상대로 홍의는 곧 뭔가로 변신할 기세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별안간 우렛소리를 내질렀다.
“소신! 향선 홍의! 금일 전하의 침전에서 수청을 들겠습니다!”
“…….”
“화경!”
“예, 예? 홍의 님?”
정자 밑에 붙어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화경이 불에 덴 것처럼 놀라 냉큼 답을 올렸다. 홍의의 눈에 감파란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당장 옥지를 불러 침전에 술상을 보아라!”
***
기별을 전해 들은 옥지는 옳다구나, 외치며 당장 생과방으로 달려가 거사 준비를 하였다. 곶감을 열두 절개로 오려 꽃 모양을 낸 곶감 오림과 네모지게 반죽하여 잣을 뿌린 모약과와 아기자기한 삼색 경단, 그리고 연씨와 찹쌀, 누룩으로 빚은 연꽃 술을 다시 한번 약재와 함께 증류한 붉은 홍로주를 차리고, 곳곳에 붉은 꽃을 꽂아 어여쁘게 장식하였다.
또한 세답방에서 막 세탁한 새하얀 기숫잇과 베갯잇, 그리고 감잡이로 쓰일 수건 등으로 태자의 침상을 야무지게 정돈하였다. 보침 위에 은은한 향분을 묻히고 곳곳에 영롱한 향초를 켜고, 어디 부족한 곳은 없는지 빠진 것은 없는지 매의 눈으로 방중을 휘둘러 살피었다. 마지막으로 콧김을 슁 뿜어낸 옥지는 떨리는 손으로 보자기를 풀어 향유와 춘화집, 각신 등으로 침상 옆 협탁 위를 화룡점정 하였다. 모두 황후궁에서 보내온 것들이었다.
‘우리 전하 파정 기원.’
음구들 앞에 비장하게 합장하는 와중, 갑자기 내실 문이 열리고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다.
“…….”
손바닥끼리 붙인 채 너무 놀라 얼어 버린 옥지의 옆을 금빛 옥의 학처럼 떨쳐입은 황후께서 우아하게 지나치더니 마찬가지로 협탁 위에 합장을 하며 눈 감고 알 수 없는 염불을 외셨다. 신줏단지를 앞에 두고도 저 정도로 정성스레 기도를 하시진 않으셨던 듯한데. 옥지의 시커먼 눈 밑이 움찔거렸다. 곧이어 황후의 감겼던 눈이 번쩍 뜨였다.
“인사 안 하느냐.”
“…화, 황후 마마!”
옥지는 그제야 납죽 엎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