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태자궁의 침전에는 전에 없이 강강하고 묵직한 분위기가 흘렀다. 탁상에 금성 내부를 상세히 기록한 지도를 펼쳐놓고 상석에 자리한 태자는 싸늘한 눈빛으로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곁에 앉은 옥지는 작은 붓을 쥐고 수첩에 무언가를 쉴 새 없이 기록하였다. 화경은 낮고도 신중한 음성으로 태자를 향해 아뢰었다.
“생각보다 일과가 빠듯하여 은밀히 구심을 파고들기에 녹록잖은 상황이옵니다. 또한 이동 경로도 수시로 바뀌는 터라, 오랜 시간 터를 잡고 잠복하기에 맞춤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 사료되옵니다.”
옥지가 고개를 들었다.
“미욱한 소인이 판단한 바로… 이곳이 요충지이옵니다.”
옥지는 지도에 그려진 황가의 서고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강강하게 아뢰었다.
“이곳은 고목이 우거진 탓에 후미져서 주둔지로 삼기에 유리할뿐더러 향선들이 장악한 연무장과도 접경하고 있으니, 경로를 살펴 신속히 거사를 진행하시기에 보다 편리할 것이옵니다.”
태자는 턱을 괸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목표물은 대충 언제쯤 이 근처를 지나지? 홀로 있을 때를 노려야 하는데.”
“목표물은 기상 직후 동료들과 조식을 먹은 후, 연무장으로 향하여 개인적으로 체련을 마친 뒤, 무동들과 함께 남천에서 다시 한번 단체 체련을 하옵니다. 아무래도 조식 직후가 가장 적합한 때가 아닐는지요?”
“일리가 있군.”
그때 내실 밖을 지키던 병사가 아뢰었다.
“전하, 시종 녹빈 존전에 들었사옵니다.”
“들라 하라.”
드르륵, 내실 문이 열리고 시녀복을 차린 녹빈이 성큼성큼 들어서서 읍을 올린 뒤 우렁찬 육성으로 소리쳤다.
“목표물은 현재 조식을 마치고 연무장으로 이동하여 다른 향선들과 노닥거리고 있습니다! 목표물이 오전 중으로 무동들과 합류하기 직전, 그러니까 연무장을 나서기까지 대략 두 식경 정도의 시간이 남은 듯하나이다!”
“…노닥거려? 지랄하네.”
턱을 괸 태자가 앵순을 삐죽거리자, 어쩜 전하는 욕설도 색스럽고 고급지게 하신다며 녹빈이 간살을 떨었다.
“빈이가 귀를 빼고 훔쳐 듣노라니, 전하께서 친히 신통 향선 노수의 몸뚱이에 문신을 새겨 주셨다고요? 어마, 박력! 좌우지간 정통 향선들이 홍의 님을 붙들고 자초지종을 묻는데, 홍의 님이 참말 애를 먹고 있더라고요.”
“아. 그런 일도 있었지. 홍의랑 뒹구느라 다 까먹어 버렸네.”
녹빈은 얼굴이 다 빨개져서 꺅꺅대며 우람한 덩치로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전하 전하, 우리 전하 파정 기념으로 빈이가 작은 조공을 드렸사옵니다! 홍의 님 손에 들려 보냈으니 긴긴밤 두 분이 요긴하게 쓰시어요? 꼭이요?”
“…조공? 무언데?”
내내 시큰둥하던 태자가 회가 동한 듯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에 또 화제가 삿되게 흘러감을 예견한 화경이 헛기침을 하면서 녹빈과 태자 사이에 팔을 끼워 넣고 위아래로 그었다. ‘이 아재는 꼭 이렇게 훼방이더라!’ 기분 상한 녹빈이 치맛자락을 휙휙 여미어 팔짱을 끼었다.
마침 시간을 가늠하던 옥지가 슬슬 일어나 백포를 벌리며 다가왔고, 태자는 소매로 팔을 끼워 넣었다. 그렇게 태자가 나들잇벌을 차리는 사이 녹빈은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데 전하, 굳이 홍의 님의 동선을 파악해 오라는 것이 어인 명이신지요?”
“…….”
그 질문에 붉은 정복이 마치 곡두처럼 시야를 흐르는 듯하였다. 태자는 소년 같이 수굿하게 고개를 내리더니, 가냘프게 중얼거렸다.
“…나흘이나 어떻게 참아.”
그리고 입술을 빙 돌려 핥았다.
***
해어화들에게 다향원에서 가장 몸을 섞고 싶은 사내를 꼽아 보라면, 두말할 것 없이 홍의를 들었다.
사람은 같아도 이유는 가지각색이라, 여인에게 절대로 드세게 굴지 않고 체련에만 정진하고 무동들을 살뜰히 챙기는 청빈한 면모가 하나요, 누구에 견줄 바 없이 산뜻한 외모에 부드러운 미소가 둘이요, 그중에서도 남성미를 물씬 풍기는 육덕 하체가 제일이라 하였다.
“어머머, 저것이 돌매야, 허벅지야?”
“얘 나는 아까부터 배꼽 밑이 시큰거려서 죽을 맛이다! 밤일을 잘하려면 허리가 생명이라지만, 고 허릿심도 결국은 실팍한 허벅지에서 나오는 법!”
그러나 그토록 튼실한 홍의의 하체라는 것이 널리 여인들에게 이롭게 쓰이기보다 한 사내의 양물을 요분질하는 데에만 헛심을 쓰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뭣보다 홍의는 그것이 문제라는 자각조차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등거리까지 모두 벗어 던지자 볕에 그을린 등허리로 비지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홍의는 홀로 연무장 한가운데 서서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린 채 여러 차례 기를 모으고 있었다. 여인들이 아무리 몸을 배배 꼬며 유혹의 시선을 던져도 아랑곳없었다. 외마디 기합과 함께 단전에 꽉 힘을 준 홍의는 점진적으로 가랑이를 벌려 땅으로 내려앉기 시작하였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제 사타구니가 다 얼얼한 기분에 몸서리를 쳤다. 현재 홍의가 행하는 수련은 내근을 늘려서 하체를 탄탄히 하고 정력을 증진하여 젊음을 되찾는다는 고전법(股戰法)이었다. 가랑이를 양옆으로 쫙 벌려 가랑이 안쪽으로 바닥에 내려앉는, 한마디로 고도의 유연성을 요하는 수행법이라는 것이다.
“홍의 님, 고개를 좀 숙여 주시어요! 소녀가 땀을 닦아 드리겠어요!”
“아니어요! 소녀가 닦아 드릴 거여요!”
애타는 연심을 어쩌지 못한 여인들이 결국 비단 수건을 든 채 우르르 몰려와 서로 땀을 닦아 주겠노라 법석을 피웠다.
“이러지들 말게. 아직 수련이 끝나지 않았으니 물러들 가 주게.”
홍의는 여전히 가랑이를 반쯤 찢은 채 단호한 표정으로 거절의 손날을 착 들어 올렸다. 그에 여인들이 일제히 앙가슴에 주먹을 모아 쥐고 난 몰라 난 몰라 몸을 배배 꼬았다. 모르면 시집이나 가거라! 지켜보던 향선들은 코 평수를 넓히거나 돌부리를 걷어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홍의는 여인들을 물리고 다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체련에 정진하니, 이제나저제나 피도 눈물도 없는 목석간장이 따로 없었다.
“아아,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저 너른 가슴팍에 폭삭 안겨 보았으면!”
“오늘따라 홍의 님의 눈빛이 더욱 사내답고 경건하지 않니?”
“그러게 말이야. 허구한 날 여인만 보면 바지 끈부터 풀어 젖히는 누구들이랑은 차원이 다른 저 신중하고도 맑은 눈빛!”
꺄르르 번지는 여인들의 웃음소리도, 거 옷 좀 입고 하자고 투덜거리는 사내들의 딴죽도 겉귀로 흘려들으며, 홍의는 눈을 질끈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강인해져야 한다. 보다 체력을 다져서 일곱 번 싸질러도 여덟 번 일어나는 정력을 길러야만 해.’
그래야만 태자의 꼬마둥이와 대적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태자의 귀애가 저를 떠나지 않을 것이란 확신 아래 홍의는 눈을 내리감고 심호흡을 하였다. 그리고 발가락 끄트머리를 꼼질꼼질하여 가랑이를 한 치쯤 더 찢었다. 고통의 신음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오려니, 이 수련으로 하체를 단련한 희대의 요부 하희는 나이 쉰이 되어서도 젊었을 때처럼 방사를 즐겼다고 하였다.
“체련을 하려면 그에 맞는 무복이나 차릴 것이지, 웃옷은 왜 홀라당 벗어 던져?”
“가랑이는 왜 또 쫙쫙 찢어?”
“저게 다 노느니 염불하는 걸세. 홍의를 전과 같이 무르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이야.”
향선들이 끓어오르는 강샘으로 폭풍 부채질을 하는데, 초탁만이 설렁설렁 접선을 부치며 있지도 않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신통의 태자와 붙어먹었는데 아무렴, 이제 홍의도 신통 사람 다 됐다고 봐야겠지.”
“허면 엊그제 노수가 태자에게 칼부림을 당한 것은 무어란 말인가?”
“흥, 그거야 알 바 없는 집안싸움이지. 홍의를 두고 저희들끼리 치정 놀음이라도 하는가 보지. 신통 가문 놈들은 본시 남색도 마다 않는 광란자들이 아닌가? 그 집안 내력일세!”
그에 정통 향선들이 부러 만들어 낸 웃음을 터뜨리는데, 문득 초탁의 정수리 위로 커다란 손바닥이 올라와 앉았다.
“누가 태후의 왈왈이 새끼들 아니랄까 봐 어지간히도 짖어 대는군.”
“뭐야?”
돌아보니 검은 정복 갖춰 입은 해운이 서 있었다. 대관절 부제 향선이자 신통의 수장인 해운의 등장이라니, 정통 향선들은 놀라서 입을 벌렸다. 해운이 정통들 모여 있는 곳에, 그것도 혼자 나타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해운은 화양각 연회 이후로 사가에서 휴가를 보내고 오늘에야 입청한 참이었다. 오랜만에 궐에 들었으면 제 구역부터 찾아갈 일이지 왜 정통들 모인 곳에 끼어들어 좌중을 압도하는가. 아닌 게 아니라 이미 향선들은 이미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싹 다물고 있었다. 워낙 신통 아닌 사람은 죄 무시하고 멀리하는 게 일과인 인사라, 이토록 가까이서 해운을 본 것은 처음인 자도 있었다.
‘…잘생겼다.’
‘목소리 낮추게. 들리겠네.’
‘아니, 얼굴만 잘났지 성질머리는 고약하다고.’
‘그래도 저 정도면 거의 불가침의 영역에 놓인 미모가 아닌가?’
‘목소리 낮추라니까!’
‘네놈이 더 시끄럽다!’
딱 치고 쿵 치는 소리와 함께 정통 향선들이 우격다짐하는 사이, 초탁은 애써 침착하며 헛기침을 했다.
“자네가 우리 정통 향선들에겐 무슨 볼일이 있어 찾아왔는가?”
“너 찾아온 거 아니다. 못생긴 게 말 걸지 마라. 귀 썩는다.”
초탁의 눈이 돌아가며 앉은 채로 휘청거리는데, 해운은 마침 멀찍이에서 여전히 가랑이를 찢고 있는 홍의를 발견했다.
“…대체 저게 뭔 지랄이야?”
“…….”
그에 마찬가지로 홍의를 돌아보던 나머지 사내들의 표정도 미묘하게 썩어 들었다. 처음으로 정통과 신통이 일심동체가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