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결속이라 했더냐? 감히 너희들이 합심한다면 황실을 발밑의 끄트럭처럼 굴릴 수 있다고 여겼느냐? 그게 너희들이 바라는 결속이더냐?!’
‘처,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황후 마마! 절대 그렇지 않사옵니다!’
황후는 덜덜 떨고 있는 윤명을 바라보았다.
‘윤명, 네가 말해 보아라. 애초에 정통의 발아래서 씨받이 노릇이나 하던 신통을 이만큼 끌어올린 것이 누구인가?’
윤명은 초점 흐린 눈으로 황후를 바라보다, 떨리는 몸을 부복하였다.
‘…황후 마마이십니다.’
그에 눈치를 살피던 희종이 이때다 싶어 냉큼 절을 올렸다.
‘장차 신통의 모든 복록이 황후 마마와 태자 전하의 어깨에 걸려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사옵니다!’
‘저희들의 충정을 믿어 주시옵소서!’
‘믿어 주시옵소서!’
손바닥 뒤집듯 일제히 반색한 가신들의 열렬한 추앙이 이어지고, 그토록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목도하던 해운은 문득 벼락바람이라도 맞은 듯 온몸이 추웠다.
‘그간 신통이 깔고 앉은 구름 방석은 그저 허황된 망집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가. 어리석고 얄팍한 과대망상에 집단으로 사로잡힌 따름이었는가.’
기실은 태자뿐만 아니라 신통 사람들 모두가 황후의 꼭두각시였던 것이다. 그들은 일제히 황후의 검은 손바닥 위에서 왜틀비틀 우스꽝스러운 망석중 춤을 추고 있었다. 반송장이 되어 축 늘어진 노수를 묵묵히 내려다보던 해운은 찬찬히 고개를 들어 자신의 어머니를 노려보았다.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세상을 뒤흔들고 어지럽힐 만한 미모가 사람들의 찬앙 속에 발쪽 웃고 있었다.
***
“…….”
간밤의 기억을 떠올리던 해운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사실 그도 지금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노수의 상황이 안타까운 것과 별개로 나름 벽해의 향선으로서 황후의 전횡에 무척 화가 났지만, 반항은 꿈도 꿀 수 없다는 것이 실질적인 그의 처지였다. 상황을 정돈한 황후는 그 이후 따로 해운과 대윤을 불러 오랜 시간 차담을 가졌다.
황후는 태자의 앞길에 놓인 불순물을 자신의 정부와 그 아들이 치워 주길 바랐다. 그래서 해운은 그 불순물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는 정녕 노수와 사염이 말하는 것처럼, 신통을 분탕 치기 위해 내게 접근했던 것이냐?”
대관절 무슨 말이기에 저리 뜸을 들이는가 했더니, 기대한 스스로가 뱅충이였다. 홍의는 답답증을 느끼며 황망히 인상을 썼다.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 누가 누구에게 접근했다는 겐가?”
“같잖은 정력제를 매개로 하여 내게 접근했잖은가.”
홍의가 고개를 설레 저었다.
“나는 다만 가녀린 여인이 내 눈앞에서 몹쓸 꼴을 당하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그때 해어화 연홍을 겁탈하려 했던 것은 누구도 아닌 해운 자네였고, 나는 나름의 궁여지책으로 정력제를 이용해 회유를 도모한 게지. 그때 내게 회유 외에는 다른 방안이 없었기 때문이야.”
“…….”
“애초에 나를 황후 마마께 천거하고 방중술에 능하다고 직고한 것은 자네이지 않은가? 또한 싫다는 나를 색신에 두어 태자 전하를 모시게 한 것도 황후 마마이시지. 상황이 이러한데 내가 모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네에게 접근했다는 말은 지나친 어폐가 아닌가? 눈 가리고 아웅도 정도껏 하란 말이다.”
해운의 붉은 입술에 비소가 걸렸다.
“겁탈이라.”
“…….”
“네놈이 연홍의 기둥서방이라도 되느냐? 아니면 해어화들이 떠받든다고 정녕 영웅호걸이라도 된 듯싶어? 애초에 해어화들이란 나라를 위해 몸 바치는 향선들에게 부족한 음기를 채워 주고자 모아 둔 꽃들인데, 내 집 앞마당에 핀 꽃을 꺾는다고 그것이 어찌 겁탈이 되느냐?”
순간 홍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달래의 누더기 검은 치마가 아삼아삼 스치는 듯했다.
‘유녀 환갑은 서른이라는 말이 있지요.’
사랑을 받던 아름다운 사람도 나이가 들어서 늙으면 그 사랑을 잃어버린다는 색쇠애이의 이치대로, 해어화들은 나이 서른이 되면 금성을 떠나도록 지엄한 국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육 년 전, 드디어 서른이 된 달래는 그 어느 때보다 선선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서른이 된 지금에야 숨이 쉬어지는 기분입니다. 온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서 어디로든 사부자기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한데 나리는 어찌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
‘나리는 좋은 분입니다. 고물 취급을 받으며 뒷방이나 지키던 저에게 와 틈만 나면 도톰한 누빔 옷과 달콤한 정과들을 몰래 두고 가셨지요? 처음엔 저분이 왜 선뜻 다가오지 않을까, 조바심이 나기도 하였습니다. 나를 취하고 싶은 것이라면 굳이 이런저런 방물을 전하지 않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인데, 참 사서 고생하는 바보 같은 사내도 다 있구나… 하였습니다.’
‘…미안하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저를 바라볼 때마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으로 붉어지던 나리의 눈시울을 저도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습니다. 나리의 앞날에 누를 끼치거나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요. 고맙습니다. 나리 덕분에 이 고독한 얼음의 광실이 마냥 춥거나 괴롭지만은 않았답니다.’
달래는 가벼운 봇짐 이고 가분히 세상 구경을 나아갔다. 멀어지는 좁은 등을 바라보며 홍의는 망연자실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알면서도 지켜 주지 못한 무능이 거듭 죄스러울 따름이었다. 나라를 지키는 향선들의 삶만이 거룩한가? 참혹한 희생의 삶은 도처에 즐비하였다.
“…앞마당에 핀 꽃이라고?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별안간 독을 곤두세운 홍의가 답삭 해운의 멱을 잡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그 아이들에게 정녕 일말의 미안함도 없단 말이야?!”
“미안 같은 소리하네. 쌀눈이 미안이다!”
버럭 맞받아친 해운이 제 멱을 잡쥔 홍의의 손을 확 쳐내고는 옷깃을 툭툭 털어 내며 말했다.
“태자의 용정을 받아 냈다며?”
“…….”
“생각보다 쓸 만한가 보군. 고자라고 우려가 많던 태자를 파정에 이르게 하다니 말이야. 뭐, 밤새도록 야무지게 조여 주었나?”
제 버릇 개 못 준다. 는질맞은 눈빛으로 엉덩이를 힐끔거리며 킥킥 웃는 버러지를 상대하려니 더러운 흙탕물이라도 삼킨 듯한 기분이었다. 침을 칵 모으며 한마디만 더 하면 이마에 뱉어 주려고 벼르고 있는데, 해운이 다음 말을 꺼내는 순간 멈칫하였다.
“태자와의 수업을 중단하라신다.”
“…….”
홍의의 표정이 굳었다.
“태자께서 용정을 내었으니 더는 곁에 색신을 둘 필요가 없는 게지. 앞으로는 태자궁에 들지 않아도 된다는 하교가 내렸다.”
“…허면, 나는 더 이상 전하의 양기를 보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덧붙여 너의 존재 자체도 말이야.”
하하. 핫하하! 해운은 양 주먹을 허리춤에 얹고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며 얄미움의 극치란 것을 몸소 선보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 심했는가 싶어 곁눈질로 홍의의 안색을 살폈다.
그런데 홍의는 얼마간 놀란 것은 분명하나, 그다지 충격 받은 표정은 아니었다. 새파랗게 질려 발이나 동동 구르리라 기대했던 해운은 예상과 적이 다른 홍의의 반응에 잠시 머춤했다.
‘…그래,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정말로 화가 나면 도리어 머릿속이 식고 침착해지는 것이 홍의가 타고난 성격이었다. 처음부터 홍의는, 황후와 신통을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태자와 합한 것은 그조차 뛰어넘는 강렬한 연정 때문이었다.
‘황후는 처음부터 나를 이용한 거야. 나의 존재는 애초부터 용정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지. 전하의 든든한 벗이 되어 곁을 지켜 달라던 말 또한 구색 좋은 미끼에 불과했던 거고.’
중심을 잡아야 했다. 제아무리 황후라고 할지언정 지금 당장 태자와 자신을 떼어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태자의 까칠한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황후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해운을 두어 미리 언질을 한 것은, 한마디로 홍의의 심중을 떠보기 위한 술수일 터였다.
‘이대로 반발하기보다, 그들이 예상치 못한 대응을 하여 혼란을 주는 편이 낫겠지.’
짧은 사색을 마친 홍의는 곧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해운을 향해 뻔뻔히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나는 자유의 몸이 되겠군.”
“…….”
그 대답에 해운은 당연히 벙벙하였다. 홍의는 팔짱을 끼고 커다란 목소리로 읊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태자 전하를 연모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간 성교육 스승이자 색신으로 붙매이면서 평생 할 개고생을 다 한 것도 사실이거든. 또한 연모의 감정이라는 것이 꼭 방사를 통해 증명되는 것도 아니니 말이야.”
기가 막혀 멀거니 보기만 하는 해운에게 한 발 다가간 홍의는, 이내 씽긋 웃으며 해운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좋네! 앞으로 색신 안 하려네!”
그런데 마주 잡은 손등으로 검은 태사혜가 확 날아와 부딪쳤다.
“…이게 뭐지?”
“…이게 뭐야.”
흠칫 놀란 홍의와 해운이 동시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단단히 뻗친 나뭇가지 위에 희읍스름한 백포가 언뜻번뜻 비치는 듯하고, 다음 순간 나뭇가지가 흔들흔들하더니 나머지 신발 한 짝도 날아와 해운의 왼쪽 눈에 박혔다.
“악! 어떤 자식이야!”
발광하는 해운을 뒤로하고 홍의는 주춤주춤 물러나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이마에 받치고 높은 곳에 초점을 맞추려 눈시울을 좁혔다. 그리고 입을 떡 벌렸다. 맨발의 태자가 커다란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죽어라고 홍의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