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전하가 왜 저기서 나오지?’
홍의는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이윽고 둥치 뒤에서 기다렸다는 듯 장정 몇몇이 튀어나와 발악하는 해운을 들쳐 업는데, 개중엔 화경도 섞여 있었다.
“웬 놈들이냐! 이것 놓지 못할까!”
사내들은 일시에 파밧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나 두고 가지 마. 홍의는 차라리 해운처럼 납거라도 당하고 싶은 심정에 멀어지는 그네들의 등짝에 아련히 손짓하였다. 그러다가 도로 나무 위를 보았다. 대관절 저 인간은 왜 저기 걸려 대롱거리는 걸까.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은 것이며?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말도 안 나오는 법이었다. 그러는 동안 태자는 날래게 이 가지 저 가지 훌떡훌떡 타고 내리더니 마침내 사뿐 풀밭을 딛고 섰다.
“…….”
“…….”
엊그제 죽은 시어미를 만난 며느리의 심정이 이러할까. 널따란 뜨락을 돌아 미지근한 바람이 들이쳤다. 태자의 눈빛이 똑바로 쏘여지는 순간, 홍의도 주춤 뒤로 물러났다. 태자는 얼어붙은 바다처럼 냉랭한 눈동자로 홍의를 옭아매고 한참 동안 놓아주지 않았다. 씹어 죽일지 삶아 죽일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야.”
계속 호흡만 내쉬던 태자가 메마른 음성으로 말을 낸 것도 그때였다. 귀에 선 호칭에 홍의가 두 눈만 끔적거리는데, 태자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예의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너 아까 한 말 다시 해 봐.”
등거리가 축축이 젖어 드는 느낌을 받았다. 홍의는 진정하라는 듯 양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전하, 이, 일단 소신의 말부터 들어보십시오. 제가 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
“색신을 안 하겠다고.”
“…….”
“자유의 몸?”
다 들었네. 다 들었어. 결국 입을 벌리고 턱을 달달 떨다가 뱅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 그와 동시에 긴 묶음 머리를 야무지게 쥐어 잡혀 고개가 홱 쳐들렸다. 꽥! 눈을 홉뜨며 외마디 비명을 지르기 무섭게 어디론가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전하, 아픕니다, 아파요! 이것 좀 놓으시고….”
궐에는 벽에도 귀가 달리고 눈이 달린 것이 아니라, 벽이건 나무건 모든 곳에 태자가 대롱대롱 매달린 게 아닐까. 고작 나흘을 못 버티고 일거수일투족 감시하고 미행까지 했단 말인가. 경천동지할 노릇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막 또 싫지만은 않은 이 기분은 뭐지! 다팔거리는 소맷자락 사이로 콰직 힘줄이 돋은 태자의 팔뚝을 보려니 꽁지머리를 잡힌 채로도 아랫배가 시큰거리는 것이다. 참으로 배은망덕한 아랫도리였다.
개백정에 팔려 가는 강아지처럼 깨갱깨갱 우는 소리를 내던 홍의는 결국 등불 하나 없는 서고로 끌려 들어가 먼지 가득한 바닥으로 철푸덕 내팽개쳐졌다. 홍의가 드러누운 자세를 수습하기도 전에 태자가 발로 일어나려는 몸을 턱 눌러 막았다. 맨발이라 아프지는 않았지만 당황스러웠다.
“전하, 아무리 그래도 이것은 좀….”
“선.”
태자의 발을 잡으려던 홍의는 그대로 멈칫하였다.
“넘지 말랬잖아.”
“…….”
태자의 표정은 묵묵했고 음성도 나지막했다.
“선 넘지 말랬는데.”
혼잣말처럼 읊조리는 입술은 붉었고, 미간은 곧았고, 눈동자는 비어 있었다.
…아, 이거 야단났구나.
홍의는 그제야 허튼 말수작 따위로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지금 태자의 분노가 한계에 달했음을 어느 때보다 절감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 분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태자의 분노는 왕의 그것이다. 여염에 널린 여느 비루먹은 사내가 부리는 야료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무엇에 저토록 대노를 하였는지는 차치하고, 일단 홍의는 누워 널브러진 자신의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었다. 손바닥을 맨바닥에 공수하고 엎드리는 형상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느덧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등골이 축축이 젖어 들었다.
“홍의.”
낮고 울림 좋은 어성에 홍의는 바닥을 짚었던 손을 오므려 주먹을 쥐었다.
“예, 전하.”
“홍의야.”
“예, 전하.”
“고개 들어.”
홍의는 고개를 들었다가, 어딘지 아슬아슬하고도 위험한 푸른 눈을 보고는 황급히 고개를 떨궜다. 이대로 발길질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은 눈빛이었다. 언젠가 저 고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무작스러운 폭력을 몸소 겪어 봤기에 더욱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홍의는 가슴께에 고개를 파묻듯 떨구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뭘 잘못했는데.”
숙인 시야에 들어온 발은 미동이 없었다. 음성도 절제되어 어찌 들으면 다정하기까지 하였다. 홍의의 목덜미를 탄 땀방울이 바닥에 똑 떨어져 내렸다.
“소신이… 전하의 곁을 지키는 과분한 직책에 감히 꺼리는 기색을 드러내고… 그것을 남에게 성토하였습니다.”
“또.”
“…그로 인하여 소신에 대한 전하의 망극한 믿음을… 소신 스스로가 저버렸습니다.”
“또.”
“…….”
“더 없어?”
“저, 전하의 종이자 전하의 소유물로서… 감히 전하께오서 탐탁지 않아 하고 깊이 미워하는 해운과 신체를 접촉하여… 스스로를 더럽혔….”
“그럼 알면서 그랬다는 거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보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황급히 변명을 덧붙였다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결국 안 하느니만 못한 변명이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태자는 한층 더 뚝 떨어진 낮은 음성으로 일갈했다.
“정복 벗어.”
홍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쩐지 까마아득해 보이는 존안을 올려다보았다. 단순히 의복을 벗으라는 명과 굳이 향선의 정복을 벗으라고 콕 집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 의미가 달랐다. 평소였다면 벗으라고 명을 내리기에 앞서 태자가 손수 벗겨 주었을 것이다. 홍의는 본뜻을 파악하기 위해 태자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죽은 자의 그것처럼 생기 한 점 없는 얼굴에서는 무엇도 읽어 낼 수 없었다.
홍의는 잠자코 일어섰다. 천천히 요대를 풀었다. 장유를 끌어 내리고 저고리를 벗고 가반 끈을 풀고 신을 벗었다. 땀받이로 걸친 속적삼까지 벗어 내리자 아랫도리의 속곳만이 남아 있었다. 이유 없이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고 숨이 가빴다. 태자는 묵묵히 서서 홍의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느리게 훑어 살폈다. 상대의 노골적인 시선이 몸에 고일 때마다 흐린 수치심이 들솟는 것을 느꼈다.
“그건 왜 남겼지?”
태자는 흥미롭다는 듯 홍의의 아랫도리에 눈짓하며 물었다. 마른침을 삼키던 홍의는 자기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태자의 수족들이 급히 공수해 놓은 듯 열댓 개의 초가 일렁이며 간신히 봉사 신세를 면해 줄 뿐, 지게문을 다 내려놓은 서고는 동굴처럼 어두웠다. 홍의는 잠시 허리춤에 걸린 속곳을 양손으로 잡고 뜸을 들이다, 아래로 쑥 내려서 발을 빼었다. 차마 속곳은 바닥에 두지 못하고 손에 쥔 채로 앞을 가리고 서 있었다.
차가운 서고 바닥의 한기가 발바닥을 뚫고 종아리까지 아스스 타고 올라왔다. 홍의는 눈을 들어 태자를 바라보았다. 태자가 뚫어지게 홍의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한 차례 저었다. 홍의는 가슴이 들썩일 만큼 깊게 심호흡을 하다, 손에서 속곳을 떨어트렸다. 파르라니 떨리는 양 주먹을 허벅지께로 물리고, 차마 한곳에 시선을 두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지금부로 네 향선 직위를 박탈한다.”
옷을 다 벗자 태자는 담담하게 하교했다. 홍의는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또, 앞으로는 내 안지밀에 거주하며 일거수일투족을 허락받아 움직여라.”
처음엔 요연하던 홍의의 안색이 점차 백지장처럼 질렸다.
“왜 그리 놀란 얼굴이지. 정복을 벗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건가.”
“전하.”
“내가 보고 있을 줄 몰랐다고?”
“…….”
“허면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는 그간 무슨 짓을 해 온 거야?”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몸도 맘도 모두 전하께 바친 소신에게 무슨 욕심이 더 있겠습니까, 다만… 응!”
태자가 홍의의 젖꼭지를 쥐었다. 홍의는 왈칵 붉어진 얼굴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 손이 해운의 손이었어도 너는 그렇게 콧소리를 냈겠지.”
“…으읏, 저, 전하….”
“한껏 사내다운 척, 매사에 올곧은 척하다가도 자지만 들어오면 기꺼이 잘근잘근 씹어 댈 거고.”
확실히 몸의 반응이 전과는 달랐다. 메마른 손가락으로 꼬집듯 비틀어 쥐는데도 유두에서부터 시작한 찌릿찌릿한 쾌감이 피돌기처럼 전신을 타고 돌아다녔다. 태자가 젖꼭지를 연해 둥글리며 귓가에 조곤조곤 못된 말을 퍼붓는데, 홍의는 태자의 어깨를 으스러져라 쥐고는 몸을 떨기에 바빴다. 형형하던 눈빛은 어느덧 물큰하게 흐무러져 허공을 더듬었다.
“너는… 못된 거짓말쟁이잖아.”
“핫, 으응, 전, 전하.”
“아니야?”
태자가 홍의의 허리를 감아 끌어당기면서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미끈하고 촉촉하고 뜨끈뜨끈한 입술이 부드럽고도 녹진하게 맨살을 훔쳤다. 홍의가 숨이 말려드는 탄성을 끊어치며 움찔움찔 어깨를 떨었다. 아랫배가 오싹오싹하였다.
“아, 아흑,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태자의 손이 홍의의 엉덩이를 콱 움켜쥐고 이악스레 주물렀다. 헉, 홍의가 입을 벌리고 숨을 삼켰다. 손안에 가득 차오른 살덩이를 옆으로 잡아당기자 아직 붓기가 남아 발갛게 부푼 구멍이 드러났다. 그곳이 공기에 노출된 것만으로 야릇한 쾌감이 저릿저릿 등골을 쓸었다.
“…이렇게 발정 난 개 같은데?”
태자가 귓전에 대고 속달거렸다. 아까부터 태자의 샅을 찌르며 선액을 줄줄 흘리고 있는 홍의의 물건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