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68화 (68/111)

#68

“…지금 소신더러 아주 어전에서 생활하라는 말씀입니까?”

태자가 문득 지그시 인상을 쓰며 시선을 내렸다.

“나 앞으로는 바빠. 파정이 성사되어서 어머님이 일과표를 조정하셨거든.”

홍의는 인자하게 태자를 바라보았다.

“도통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소신이 아는 바로 전하의 일과라면 그저 먹고, 놀고, 저한테 치근덕거리고, 감시하고 미행하고….”

“곧 타국 사신단이 도착할 텐데, 그리되면 지금처럼 우리가 편히 왕래할 수 없다는 말이야.”

“괜찮습니다. 지금처럼 왕래했다간 소신은 전하 배꼽 밑에서 송장이 되어 나올 테니까요.”

“…….”

낮거리 한 판에 십 년 늙는다더니 옛말 하나 틀린 거 없다면서 홍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결국 태자의 입꼬리가 웃을 듯 말 듯 묘하게 샐긋거렸다. 고새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끝 모르고 지절대는 모습에 제가 졌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태자가 책을 내려놓고 곱게 미소 지었다.

“이리 와.”

“…….”

이윽고 단단한 품에 벅차도록 상체를 껴묻긴 홍의는 너른 어깨 위로 눈만 내민 채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영 이상했다. 홍의는 본디 나이 어린 사내에게 온 치부를 내어놓고도 남부끄러운 줄 모르는 백치가 아니었다. 허나 사랑은 첫사랑이 뜨겁고 바람은 늦바람이 무섭다고 했던가. 자신이 여인도 아닌 사내에게 이토록 매료될 줄은, 더구나 능력도 가문도 적당히 비등비등한 상대가 아니라 함부로 눈조차 마주쳐서는 안 될 황족, 그것도 황태자를 사랑하게 될 줄이라곤 꿈에도 몰랐다. 사랑이라는 요사가 두려운 것은 인간의 귀를 막고 눈을 막아 버리기 때문이다. 그가 찡그려도 어여쁘고 화를 내도 사랑스럽고,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그를 사랑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홍의는 잠시 몸을 떼어 뱁새눈으로 게슴츠레 상대를 보았다. 심술이 슬슬 차올랐다. 일부러 태자의 얼뺨을 조물조물 주무르고 부드레한 입술도 아프지 않게 꼬집어 보았다. 태자는 마음대로 하게 두었다. 그래서 기분이 더 이상했다. 지금은 이렇게 온순한 강아지처럼 말끄러미 바라보며 얌전히 홍의의 손길을 허용하고 있지만, 또 조금이라도 수가 틀리면 냉혹하게 돌변할 것을 알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그가 태자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 하늘 아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는 막비왕신의 황족, 그 정점에 선 인물이었다.

“…전하, 밉습니다.”

태자는 귀가 간지러운 느낌에 오묘한 표정으로 홍의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밉습니다.”

“왜.”

“왜냐고 물으셨습니까? 왜냐고?”

홍의는 기함한 표정을 지으며 태자를 밀어냈다.

“허구한 날 자초지종은 들어 보지도 않고 화부터 내시고! 아주 그냥 한 번만 더 전하 성질 건드렸다간 천지가 개벽을 하겠습니다. 저 같은 일개 백성은 무서워서 숨이라도 쉬겠습니까?”

“…네가 늘 도망갈 생각만 하니까 그렇지.”

태자는 눈빛이 다시 사나워졌지만, 아까처럼 독기가 들끓는 눈은 아니었다.

“제가 이토록 은애하는 전하를 두고 당최 어딜 간다고요?”

“그간 네가 한 짓을 생각해 봐. 대체 내가 어찌 믿겠는지.”

홍의는 대거리를 하려다 말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신은 전하 두고 어디 안 갑니다.”

태자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목이 떨어져도?”

“목이 떨어져도.”

홍의는 다시 태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태자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신의 몸은 신의 것이 아닙니다. 몸도 마음도 모두 전하께 바쳤으니 전하의 것입니다.”

태자가 한쪽 눈썹을 들었다.

“엉덩이는?”

“…….”

“엉덩이 아프니 나흘간 금욕하라던 건 뭐야, 그럼. 너는 목 떨어지는 일보다 내 물건 받는 게 두려운가봐?”

“…그건 제 엉덩이뿐만 아니라 전하의 옥경에도 열상이 있어 뵈기에 걱정이 되어… 아 뭐 어찌 되었든, 예, 엉덩이도요. 전하 다 가지세요. 엉덩이 좀 아작 나면 어떻습니까, 예….”

홍의는 씁쓸히 말하다, 곧 별수 없다는 듯 웃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신이 가장 두렵고 걱정되는 것은 전하의 안위입니다. 전하께서 안온히 황제의 위에 올라, 황후 마마의 섭정에서 벗어나 홀로 서시는 것만이 제게 가장 중합니다.”

“…….”

“하여, 지금 신이 황후 마마의 명에 반하는 것은 시기상조라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일단은 수긍하는 척 해운과 황후 마마를 속이고, 차후 다른 방법을 강구할 예정이었습니다. 전하께서도 이대로 계속 황후 마마의 명을 어기고 내자들을 물린 채 소신과 잠통을 나누실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태자가 상체를 숙이고 홍의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깊게 눈이 맞았다.

“너는 날 믿지 못하는군.”

“…….”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약속이나 잘 지켜.”

태자가 다시 자세를 바로 두더니 홍의의 뺨을 잡아 쭉쭉 늘렸다.

“무흐 야호이오?(무슨 약속이요?)”

뺨이 당겨지는 탓에 새는 발음으로 묻자, 태자는 나지막이 대꾸했다.

“나 두고 어디 안 간다는 말.”

“…….”

“넌 그거면 돼.”

…아, 귀여워. 태자는 볼이 늘어난 홍의를 향하여 읊조리며 웃었다. 홍의는 문득 명치가 콱 조여드는 것 같았다. 이 욕심을 어쩔까. 이 탐심을 어찌할까. 연심이란 것은 괴물처럼 인간을 뼈째 살라 먹는 감정인가 보았다. 무엇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는 얼치기에 반편이가 된 기분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입으로 섣불리 뱉어 버린 다짐과, 그가 지켜달라는 약속이, 향후 가장 지키기 어려운 다짐이자 약조가 될 것만 같다는 서글픈 예감이 들어 버렸다.

“…태자비 마마는 어떤 분입니까?”

홍의는 결국 내내 가슴에 껴묻고 있던 질문을 꺼내 놓고야 말았다. 그러자 태자는 아주 의외라는 듯 멈칫했다.

태자의 정실, 대내외적으로 태자의 곁을 보좌하고 지밀을 지키는 가장 가까운 반려이자 만인이 우러른다는 그 높고도 아름다운 여인.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실제로 태자와 통하는 내내 마음에 걸렸던 사람이었다. 더구나 태자의 파정이 성공한 지금, 홍의가 계속 태자와의 관계를 유지한다고 한다면 더 이상 그녀와의 적대적 관계를 피할 방도가 없었다.

홍의는 어쩐지 떨리는 심정으로 마른침을 꼴깍이며 상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한참 동안 묵묵히 시선을 맞받던 태자는 이윽고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착잡하고 울울하게 중얼거렸다.

“걔 그냥 미친년이야.”

“…….”

괜히 물어봤다.

***

깜박 잠이 들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이경이 훌쩍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남의 눈을 들쓴 것처럼 두툼하게 부풀어서 제대로 뜨이지도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고, 홍의는 눈앞에 화려한 휘장의 향연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물론 낯선 곳은 아니었다. 태자궁의 침전이었다. 며칠 못 온 사이 여름 단장을 했는지 붉은 계열이었던 휘장들이 시원한 푸른색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못 보던 그림들도 몇 점 새로이 걸려 있고, 오동으로 짠 거문고 갑도 내실 한구석에 곱게 세워져 있다. 뭐 세간살이야 방 주인 내키는 대로 들였다가 바꾸고 하는 것이니 하등 이상할 것도 없었다. 문제는.

‘…내 매화도잖아.’

분명하다. 홍의는 눈가장을 가늘게 좁히고 보았다. 재작년 즈음엔가, 노느니 앓자고 장거리에 나섰다가 앉은 자리에서 그림 그려 팔고 딱 한 장 남은 것을 다향원 처소에 걸어 두었더랬다. 헌데 저걸 훔쳐와 보란 듯이 제 방에 걸어 둔 것이다.

분노한 홍의는 침상에서 몸을 빼려다가 순간적으로 허리를 우지끈 강타하는 격통에 기함하였다. 엉덩이를 하늘을 향해 쭉 뻗어 올린 채 고양이 자세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 내실 문이 드륵 열렸다. 홍의는 신의 속도로 포단을 싸매 제 몸을 가렸다.

낯모를 시비들이었다. 옥지는 보이지 않았다. 각자 품에 한 아름 안고 온 짐바리를 턱턱 내려놓고 일사불란 정돈을 하는데, 그 물건들도 영 눈에 익었다. 잡다한 화구들뿐만 아니라 전용으로 쓰는 활과 칼, 궁시와 경식과 관모까지 모두 홍의의 것이었다. 진정 저 투박한 잡동사니들이 이 휘황찬란하고 아름답고 세련된 세간들로 가득 찬 침전에 어우러질 거라 여긴 것일까. 그렇다면 참으로 갑갑한 일이다. 당장이라도 침상을 박차고 나가 너희들이 뭔데 내 방을 털었느냐고 성깔을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알몸이다. 그것도 울긋불긋 혈음이 가득한.

“어휴, 이 속곳 꼬락서니 좀 봐. 이 작자는 빨래도 안 하고 사는가 봐. 대체 어느 집 자식인지 면상 한번 보고 싶네.”

꾸깃꾸깃 구겨져 먼지 폴폴 날리는 홍의의 낡은 잠방이를 들어 올리며 한 시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얘, 목소리 낮춰. 태자 전하 들으시면 경칠라.”

“흥, 너도 참 어지간한 쫄딱보다. 전하는 지금 목간 중이신데 한참은 더 걸리실걸? 그보다 대체 이것들은 누구의 물건이지? 이딴 지저분하고 촌스러운 물건들을 들여놓자니 애먼 침전 분위기만 해치겠어.”

“말은 그러면서 왜 그 잠방이는 손에 꼭 쥐고 있는 건데? 너어… 그것 몰래 가져가서 어디에 쓸라구?”

“뭐? 이 년이 말이면 단 줄 아나. 개나 주려고 그런다! 개나 주려고!”

화가 난 시비는 들고 있던 잠방이를 돌돌 말아 구의 형태로 만들더니 반대편 시비의 얼굴에 냅다 집어 던졌다. 똥이라도 묻은 듯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털어 대던 시비가 씩씩거리며 잠방이를 집어서 혼신의 힘을 다해 반대편에 던졌다. 홍의는 이리저리 허공을 가로지르는 자신의 잠방이를 망연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팔짜리 계집들의 장난질이란 것이 이토록 야속할 줄 미처 몰랐다. 나중에는 아주 깔깔거리며 상대의 머리에 잠방이를 씌워 버리는 꼴에 지켜보던 홍의의 영혼이 파삭파삭 바스러졌다.

“지금 뭣들 하는 게야!”

다행히 내실 문이 열리고, 옥지가 들어섰다.

“헉, 옥지 님!”

“아니, 옥지 님, 제 말부터 들어 보셔요, 쫑쫑이 저것이 이 더러운 잠방이를 소녀의 얼굴에….”

“닥치지 못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천한 목청을 높여! 혀가 잘리고 싶으냐?”

태자궁 제일 시녀의 푸르뎅뎅한 서슬에 어린 두 시비는 머리를 어찌할 바 모르고 덜덜 떨었다. 사실 태자궁의 모든 궁인들은 입궁한 순간부터 어떤 상황에서든 입조차 벙긋해서는 안 된다는 함구령에 매인 터였다.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달을 사전에 방비하자는 황후의 입김이었으나, 천진난만한 소녀들의 말구멍을 옥죄기란 이토록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옥지는 한참 동안 매섭게 시비들을 혼내고 단속하여 내실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푸른 휘장 너머 침상 안쪽을 조심스레 건너보았다.

“홍의, 기침해 계십니까?”

차라리 여직 기절 중이었으면 좋으련만, 포단이 한차례 꿈틀거리더니 홍의의 창백한 낯짝이 쑥 드러났다.

“어, 그래… 좀 전에.”

“…송구합니다. 입궐한지 얼마 되지 않아 철없는 아이들이니 부디 아량을.”

“아니다, 아니야. 모르고 그런 것인데 너무 책잡지 말거라.”

홍의는 행여 자신의 몸이 옥지에게 보일까 전전긍긍하며 열심히 포단을 여미었다. 얼굴만 동그랗게 남겨 두고 턱 밑에서 고이 포단을 잡쥔 모습이 어째 우습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다. 옥지는 흔치 않은 미소를 살짝 머금었다.

“헌데, 나의 물건들은 왜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냐?”

“전하께오서 명하셨습니다.”

홍의는 잠시 사색에 잠겼다. 황후가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동안 옥지는 대야에 받쳐 온 얼음물을 협탁에 올리고는 깨끗한 명주 수건도 고이 접어 옆에 두었다.

“태자 전하 납시었습니다.”

마침 위병의 음성이 울리고, 태자가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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