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몌별
황후궁을 중심으로 황실 여인들의 전각이 모여 있는 금성 서단은 사내들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성역과 다름없었다. 물론 그만큼 혈기왕성한 사내들의 전폭적인 관심을 받고 있으니 저질스러운 야담의 원천지가 되기도 했다. 강건하실 적엔 여색을 즐겼지만 이제 합방은커녕 제대로 운신조차 못 하는 황제의 가엾은 후궁들이 긴긴밤 끓어오르는 정욕을 누르지 못해 아리따운 사내들을 모색한다느니, 결국은 월담을 하여 밤새도록 왕의 여인과 놀아났다느니 하는 여느 향선의 영웅담이 끊임없이 불거져 나왔다. 실제 여부를 떠나 눈 트이고 귀 뚫리게 하는 육담이란 언제나 기름지고 맛있는 법이었다. 그토록 거시기에 환장하는 꼴이 타국에서는 흠이요 벽해에서는 복이라, 안으로는 날마다 연놈들의 교합 소리가 끊이지 않게 하리라면서 밖으로는 불교의 나라를 지향한다니, 홍의는 이 같은 모순과 위선이 사뭇 궤란쩍고 한심스럽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토록 말 많고 탈 많은 금성에서 바로 이 준명궁만큼은 언제나 청정 구역으로 통했다. 야담은커녕 고리타분한 사람살이 이야기 한 자락 새어 나오는 법이 없을 만큼 바람막이가 튼튼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봤다간 신통의 해운이 여동생을 욕보였다며 펄펄 뛸 것이 자명하고, 정확히는 나라의 실세인 황후의 고명딸을 감히 혀끝으로나마 능욕할 수 없다는 게 맞았다.
“…향선 홍의, 태자비 마마를 뵙습니다.”
그토록 고벽이 단단한 난공불락의 성에 뜻하지 않게 발을 들인 홍의와 새옹은, 불안한 속내를 추스를 겨를도 없이 안뜰의 누각에서 그 주인에게 예를 다해 절을 올려야만 했다.
“…….”
“…….”
금성의 연례행사 때 먼눈으로나 설핏 보았던 황태자비를 이토록 가까이서 마주 뵌 것은 처음이었다. 태자비는 하늘하늘 마른 몸피에 창백하리만큼 새하얀 살성을 지니고 있었다. 황후의 풍만하고 요염한 아름다움과는 달리, 어딘지 병약하고 가련해 보여 사내들의 보호 본능을 더욱 자극하는 청초 미인이었다.
“그대가 향선 홍의인가요.”
“그러하옵니다, 태자비 마마.”
한쪽 무릎 꿇은 홍의를 향하여 태자비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리고 꽃잎처럼 가분히 몸을 돌리어 시종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홍의는 잠시 코끝을 찡긋거리다 이내 표정을 묵묵히 정돈하고 그녀의 앞에 마주 앉았다.
문득 지난봄에 황후와 처음 대면하여 차를 마시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아니, 오히려 몇 곱절은 더 민망하고 미치고 팔딱 뛸 것만 같은 대면의 장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깎은서방님을 사이에 둔 조강지처와 첩의 서슬 파란 첫 만남이 아니던가. 이야기책에서나 보던 장면을 실제로 겪으려니, 그것도 ‘깎은서방님’쪽이 아니라 ‘첩’의 입장에서 이 난국을 헤쳐 나가려니 자괴감이 해일처럼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너무 갑작스럽잖아.’
홍의는 애써 혼란을 억누르며 찻잔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니까, 태자가 마침 석강에 나섰으니 망정이지, 이제 좀 운신이 편하여 태자궁의 뜰을 산책하는 와중 대뜸 준명궁의 사자가 찾아들어 어찌나 당황스러웠는지 모른다. 검둥개들 때문에 안에 들어오지는 못하고 담벼락에 얼굴을 내민 채로 좋게 갈 것인지 끌려갈 것인지 정하라고 엄포를 놓는 꼴이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차마 귀하신 분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 오기는 왔다만, 썩 내키는 자리라고는 입치레로도 주절거릴 수 없을 것이었다.
“…….”
또한, 평소 홍의를 가장 따르는 부관이라는 이유로 동석을 강요당한 새옹은 차를 코로 들이부으며 힐끔힐끔 태자비의 얼굴을 훔쳐보고 있었다. 황후의 어릴 적 미모를 그대로 빼쏘았다는 태자비의 미모야 저자를 지나가던 멍첨지도 알아 모실 만큼 유명하다지만, 실제로 가까이에서 보니 그야말로 월궁항아의 재림이 따로 없었다. 그 주인의 해사한 외모에 비하면 주변에 만발한 장화조차 할미꽃으로 보일 지경이었으니.
‘…고우시다. 참으로 고우시다.’
감히 뚫어져라 볼 수는 없어 자꾸 시선을 내렸다가 올렸다가 하는데, 마침 새옹의 무엄한 눈짓을 낌새챘는지 꼿꼿이 턱을 든 자세에서 눈동자만 굴려 이쪽을 힐끗 보는 태자비였다. 그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귀하신 분께 무엄하고도 객쩍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 새옹의 귀뿌리가 확 달아올랐다. 허둥지둥 고개를 숙이고 찻잔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했다. 괜히 내정을 크게 훑어보고 다시금 용기 내어 태자비 쪽을 응시하였을 때, 그녀는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정면을 보는 옥안에 어쩐지 단호하고도 새침하게 꼭 다물린 입술이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은연중 피력하는 듯했다.
“예국에서 저희 마마를 위해 특별히 보내온 숙차입니다. 향긋하고 오장육부에 두루 좋아 이만한 약차가 또 없습니다.”
말수 적은 것은 누구를 탁한 것일까. 나이가 제법 있는 여비가 상전 대신 엄숙하게 읊으며 다기를 들어 올렸다. 홍의와 새옹은 갓 끓인 숙차로 찻잔을 한 번 세차한 뒤 두 번째 우린 푸르고 깊은 찻물을 쪼르륵 따라 내는 일련의 과정을 물끄러미 구경하였다.
“향선 홍의.”
“예, 태자비 마마.”
입이 붙었나 싶을 만큼 말이 없던 태자비가 음성을 낸 것도 그때다. 옆에서 듣던 새옹이 숨을 죽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목소리도 얼굴만큼이나 곱고 낭랑한 여인이다. 그녀가 무슨 말로 다음을 이으려는지 내심 흥미진진하게 느낀 새옹은 탁상 밑에서 땀 찬 손바닥을 닦았다. 이러다 담이 들겠거니 하는데 마침 태자비가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의 구멍이 그리도 삼삼한가요?”
“풉.”
새옹은 경악을 하다 못해 의자와 함께 공중제비를 돌았고 홍의는 마시던 차를 무지개다리처럼 쭉 뿜었다.
“제가 태자궁의 시비들을 찔러보노라니 전하께서 하루라도 그대를 맛보지 않으면 양물에 가시가 돋칠 지경이라고 하시더군요. 아, 얼마나 쫄깃한 후장이기에 그 목석같던 분이 정신을 못 차리고 해롱거리는 것일까요? 후후, 할 수만 있다면 이 쓸데없는 자궁이라도 떼어 드리고 싶은 심정을 아실는지 모르겠어요.”
“…….”
“그러고 보니 제가 일전부터 몹시 궁금했던 점이 있었는데 말예요. 혹 전하께서 작은집(뒷간)에 운신하실 적에도 그 더럽고 냄새나는 천 쪼가리를 두르시는지요? 아, 물론 그대를 작은집에 비유한 것은 아닙니다, 오해는 마시었으면.”
꽃망울 타지듯 발쪽발쪽 웃으며 자분자분 풀어 놓는 말들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미리 본 게 있으니 얼마간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도저히 소화가 안 되는 경악스러운 화법이다. 홍의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려 했으나 붉어지는 얼굴과 흐르는 식은땀은 도통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에야 어지간히 깨달았다. 황후와 태자는 차치하고 신통과 여러 번 대작하면서 느낀 점이기도 한 것, 그들은 하나같이 입으로 뱉기 전에 머리를 거친다는 옳은 화법의 생리를 무시하고 날것 그대로 비수를 쏟아붓기에 특화된 주둥이를 지닌 족속들이라는 사실 말이다.
“마마, 부디 언중하여 주시옵소서.”
보다 못한 시비가 나서자, 태자비는 작고 뾰족한 턱을 들고는 붉은 입꼬리를 매혹적으로 말아 올렸다.
“어머, 엊그제 목침 맞을 뻔해서 그래요.”
“…….”
“그리고 제가 틀린 말을 했나요…? 지금도 모든 대소 신료들이 이러쿵저러쿵 쑥덕공론을 늘어놓는데 말만 다르지 뜻은 그것이 그것 아니었나요? 홍의가 궁둥잇짓으로 태자 전하를 녹였고 허울 좋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던 태자비는 아니나 다를까 어김없이 소박을 맞았노라고,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떠들어 대고 있질 않나요? 이 와중에 제가 언중하고 싶겠나요?”
따귀, 차 뿌리기, 심하면 멍석말이까지… 갖은 예상을 하고 들른 준명궁이지만 이런 식으로 귓구멍을 뚜드려 맞을 줄은 몰랐다. 말은 또 어찌나 청산유수인지, 그녀가 빠른 말말의 끝을 탁탁 올려붙일 때마다 정신이 없다 못해 눈이 다 풀리는 것 같았다.
“흐응. 꿀이라도 먹었어요?”
고개를 기울이며 의뭉스레 묻는 모습에 홍의는 그제야 마른 입술에 침을 축였다.
“송구합니다, 마마. …다만.”
한참 말을 고르던 홍의는 곧 아무런 적의도 두려움도 없는 눈빛으로 태자비를 똑바로 마주하였다.
“마마께서 무분별한 힐난을 목적으로 소인을 다령시키셨다면, 기꺼이 용도에 맞게 처신할 따름입니다.”
태자비가 턱을 약간 기울였다. 상대를 보다 유심히 살피려는 행동이었다.
“부끄럽지 않은가요?”
“부끄럽지 않습니다.”
“두레박끼리 만나는 일이 벽해에서는 흔한 일이라서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일 뿐입니다.”
“태자 전하를 사람으로 여기는 이가 벽해에도 있었군요. 용안을 뵈었나요?”
“뵈었습니다.”
“용기가 가상하시네요. 뭐 사실 나로선 별로 궁금치도 않고 관심도 없는 사안이긴 하지만요.”
‘…태자 전하의 용안이 궁금치도 않고, 관심도 없다고? …부인인데?’
태자비는 홍의가 사색에 잠길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너무 굳어 있군요, 그대. 따스한 술과 마작상이라도 가져다 놓을 것을 그랬나요? 그리 긴장하시라 부른 자리가 아닙니다.”
태자비는 처음의 연약해 보이던 기색은 어느덧 간데없이, 명랑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이 되어 있었다.
“알다시피 제게는 그대 말고도 잉첩이 셋이나 더 있답니다. 애초에 전하를 모시는 일은 저를 돕는 일에 다름 아니고, 결국은 같은 사내를 섬기며 막막궁산에 갇힌 처지에 굳이 얼굴을 붉힐 필요가 무에 있답니까? 우리끼리 아웅다웅해 보았자 쓸데없는 시간 낭비, 감정 소모에 지나지 않지요.”
“…….”
“그러니 우리, 앞으로는 함께 궁원도 가꾸고 차담도 나누며 서로 경계 없이 오가는 게 어때요?”
발씬 웃는 볼로 쏙 들어가는 볼우물이 참으로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이런 제안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하였기에 얼마간 당황스러웠지만, 똑바로 태자비를 응시하던 홍의는 이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소인은 마마의 잉첩이 될 수 없습니다.”
“…….”
“또한, 전하를 모시는 일이 어찌하여 마마를 돕는 일로 귀결되는지도 참으로 의문스럽습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은 소인의 성미에 맞지 않습니다.”
악당을 자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하의 귀천과 남녀의 성별과 처첩의 관계성을 조목조목 따져 가며 가식적으로 착한 척하기도 싫었다. 어쨌거나 홍의는 이 판에서 굴러 들어온 돌이었고, 지난번 노수 사건으로 인하여 대대적으로 신통의 눈엣가시가 된 셈이었다.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너무도 잘 알기에 더욱이 비굴해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나를 거절할 만한 입장도, 주제도 안 될 텐데요.”
“휘어지거나 꺾이거나 땅으로 처박히기에는 매한가지입니다.”
“뭐 좋아요. 나와 살갑게 왕래하기가 언짢다는 그대의 본심을 아주 잘 알았어요. 대신 청 한 가지쯤은 들어줄 수 있겠지요?”
이제야 본론인가. 홍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르십시오, 마마.”
태자비는 찻잔을 내리고 상체를 뒤로 물렸다.
“오는 병일에 태자 전하와 저의 합방일이 잡혔다는 것은 미리 들어 알고 있을 겁니다. 그대를 향한 전하의 굄과 편애가 그토록 지극하니, 전하를 설득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요.”
“…….”
“병일, 태자 전하를 반드시 이곳 준명궁으로 거둥케 하세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세요. 그대가 직접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잠시 말을 끊은 태자비의 고운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더니 사나운 들창눈으로 홍의를 쏘아보았다.
“천박하기 짝이 없는 네놈의 불알을 뽑아서 입에 물려 줄 것이다. 어차피 쓸모도 없을 테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