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신통 것들 상종을 못 하겠다.
막 준명궁을 나선 홍의는 덩두렷한 달을 향하여 팔짱을 끼운 채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불알을… 뽑….”
여전히 얼혼이 쑥 빠진 새옹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입에 물려 준다니… 대체 그 아리따운 얼굴로 어찌 그런 무시무시한 발상을….”
그러게. 차라리 황후에게 당한 것처럼 따귀나 몇 대 맞고 끝났으면 이토록 정신적으로 피폐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아무튼 새옹은 어지간히 충격받은 몰골이었다. 홍의가 어깨를 도닥이며 그저 술이나 한잔하고 잊어버리라는 말로서 되레 위로를 해 주었다.
“주군, 우리 주군… 오기 부리시다 참말로 고환 뽑히시면 어쩝니까…?”
“네 고환 떼어 주면 되지.”
홍의가 싱긋 웃자 새옹은 그제야 머릿속이 식고 이성이 돌아와서 차분히 정색을 할 수 있었다.
한참 생각하던 새옹은 의아하게 물었다.
“그 말인즉슨, 참말로 태자비 마마의 하명에 반하겠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홍의가 헛웃음 쳤다.
“내가 무슨 재주로 감히 싫다는 전하를 준명궁에 바치느냐? 또한, 그러기도 싫고.”
태자비와 태자가 합방하는 것이 싫다는 뜻이었다. 불경스럽다고 느낀 새옹은 자기도 모르게 황망히 인상을 찡그리고 대거리했다.
“양전의 합방은 인륜지대사이기 전에 벽해의 백년대계입니다. 주군께서 희떠운 감상에 빠져 좋네 싫네 판단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걸 누가 모르느냐. 허나 머리로는 해야지, 하면서도 마음이 따라 주지 않는 일도 있는 법이란다.”
‘…갈 데까지 가셨구나.’
새옹은 아스라이 아랫입술을 떨었다. 도대체 사랑이 뭣이관데, 매사 총명하고 야무졌던 홍의를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도 못 하는 뱅충이로 만들었을까. 사실 근래 들어 홍의의 평판이 말이 아니었다. 특히 악에 받친 사염과 무동들이 태자가 키우는 검둥개들까지 연관 지어 차마 입에 담기도 역겨운 음해를 퍼뜨리는 바람에 슬그머니 다른 향선에게로 갈아탄 무동들도 더러 있을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코앞에서 자신의 상관이 그런 모욕과 괄시를 당하였으니, 새옹은 적잖이 울컥하고 말았다.
“태자 전하를 연모하십니까?”
“…….”
다짜고짜 물으니 홍의가 몹시 희한한 것을 보듯 내려다보았다.
“망발도 이런 망발이 없구나. 네놈이 이제는 상관의 사심까지 캐묻는단 말이냐?”
“그게 아니라면 빚 청산도 끝낸 마당에 이토록 얼치기처럼 구실 이유가 없으니까요. 가뜩이나 신통의 견제가 심해지고 입지가 좁아지신 이 시국에, 다향원을 떠나 보란 듯이 태자궁에 입성하신 것은 자충수가 될 뿐입니다. 주군이 그 정도로 무지한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차마 끝 모르고 까불대다가 반강제로 끌려갔다고 토설할 수는 없어, 홍의는 잠시 먼눈을 팔았다.
“게다가, 어쩌면 마지막 방패막이 될 수도 있는 태자비 마마의 제안까지 거절하셨습니다. 나름 쥔 패가 있으셔서 그런 것이겠지요?”
“쥐뿔도 없는데?”
“…….”
새옹의 고개가 아래로 처박혔다. 저 인간 맞다. 그냥 태자한테 홀딱 빠져서 앞뒤 구분 못 하고 설치는 거 맞다. 자신의 예상이 똑 맞아떨어짐을 짐작한 순간, 새옹은 이제 그만 속세를 등지고 남산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홍의는 보기보다 더 답답한 인간이었다. 정치판에서 적절한 아첨이나 아전인수는 별로 커다란 흠도 아닐진대 홀로 고고하게 벼리며 진창에 섞이길 거부하니 권력자들 보기에는 얄밉고 꼴같잖을 노릇이었다. 그가 만산성 접전 끝에 향선이 되었으나 금성에서 그 사실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문 이유도 이와 상통했다. 가뜩이나 청렴결백의 대명사로 불리며 인망이 두터운 정통계 미함의 갖은 도발로 골머리를 앓는데, 어디서 미함하고 똑 닮은 놈이 나타나서는 마찬가지로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도저히 곱게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홍의가 어린 나이에 전장에서 세운 공은 신통에 의해 철저히 은폐되었고, 음해되어 왔다.
상황이 이러하면 나서서 해명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갈수록 평판은 바닥을 치고 헛소문도 판을 치는데, 정작 장본인은 허허실실 모르쇠와 뜬구름만 잡고 있으니 이 어찌 답답하지 않을쏘냐.
“다향원에는 언제 돌아오실 겁니까.”
홍의는 코를 후비며 대꾸했다.
“당분간은 못 간다. 사신연이 끝날 때까지만 무동들을 잘 달래 두어라. 또한, 너는 외따로 태자비 마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틈날 때마다 나에게 보고하고.”
“뭣이요? 미쳤습니까? 한갓 무동이 준명궁을 기웃거렸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불알이나 똑 따이라고요?”
새옹이 펄펄 날뛰자 홍의는 자기 불알이 아니니까 괜찮다는 말로서 오장육부를 더 뒤집었다.
그렇게 발광하는 새옹을 뒤로하고 걸으면서, 홍의는 이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엊그제 침전에 쳐들어왔을 때 서로 간에 질세라 악담을 퍼부었던 것은 둘째 치더라도, 방금 태자비와의 대면에서 확실히 깨달은 게 있었다. 태자비는 태자를 미워한다. 태자 또한 태자비를 경멸한다. 부부가 서로를 은애하지 않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증오하고 있었다. 일단은 그 이유를 알아야 했다.
***
예국 사신단이 당도하였다. 동역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벽해국과 예국은 불교와 유교를 동시에 받드는 종교 국가로서, 각자의 속국을 보다 원활히 다스리기 위해 평화 협정을 맺고 친선을 나눈 지 백 년째였다. 군우령 대윤과 그의 아들 해운이 접반사가 되어 예의 사신인 왕조오를 직접 영접하러 나섰다. 행차 길에 청룡사에서 양국의 화합을 기리는 불교 행사를 치르고, 왕릉에 들러서는 참배 의식을 거행하였다. 금성의 궁인들은 올해를 통틀어 가장 큰 연회 준비로 분주하게 뛰어다녔고, 나흘에 걸쳐 열리는 벽해의 가장 큰 축제이니만큼 황족뿐만 아니라 도경 밖 귀족들과 그 족친들까지 빠짐없이 참석하게 하였으니 금성의 구지 앞은 전에 없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바야흐로 생명이 있는 힘껏 아우성을 하는 푸르른 녹음의 계절. 난생처음으로 동백리를 벗어나 도경 나들이를 나선 문성 공의 영애 소의 낭자는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으리으리한 성문을 넘자 갖가지 꽃향기가 훅 풍겨 들며 눈앞에 진풍경이 차고 넘쳤다. 붉고 푸른 피륙과 갖가지 상화로 길을 낸 대궁 앞을 지나자, 웃통을 벗은 목수들과 무동들이 연회를 설행할 각종 가건물을 별도로 짓고 꾸미느라 힘차게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전각마다 따로 둔 숙설소에서는 기름에 음식을 지지고 부치는 고소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무용수로 뽑힌 해어화들이 악공들과 함께 정재를 습의하는 듯 연두저고리 다홍치마 차리고 꾸밈음에 맞추어 나붓나붓 춤을 추었다.
“유모, 유모! 오라버니는 어디에 계실까?”
소의가 꽃분홍 댕기 두어 곱게 반 묶은 머리로 두리번거리며 상기된 음성으로 재잘거렸다. 다람쥐처럼 재빠른 아기씨 쫓아다니느라 속곳에 땀이 찰 지경인 유모가 아이구, 하며 먼지 묻은 치마폭을 찹찹 털어 주었다.
“우리 아가씨가 오늘따라 어찌 이리 자발 맞으실까? 주인 어르신께서 입궁하고 함부로 쏘다녔다간 혼쭐이 난다 하신 걸 잊으셨어요? 사자 말로는 잠시 집무를 보고 계신다니 볼일만 마치면 금세 마중을 오실 거예요. 우리 그때까지 조기 그늘 아래서 다리쉼 좀 해요.”
그러나 소의는 듣는 시늉도 하지 않고 반짝이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암, 금성은 우물도 많고 꽃도 많구나! 세상에 이리 너르고 휘황찬란한 집이 또 있을까?”
그때 수많은 악공들이 커다란 악기를 든 채 별안간 우루루 쏟아져 나와서는 유모와 소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도글도글 인파 틈으로 소의를 부르짖는 유모의 간절한 외침이 어렴풋이 울려 퍼졌다. 당황하여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소의의 입가에 곧 얄망궂은 미소가 쏙 스몄다. 소의는 망설임 없이 주먹을 쥐고는 팔랑 몸을 돌리어 인파를 헤치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피리와 대금과 장구와 거문고가 경쾌한 곡조를 빚어낸다. 젊은 미남 미녀가 짝을 맞춰 노닐며 춤을 추기도 하고 새살을 까기도 하고 꽃을 구경하기도 한다. 구름 한 점 없이 쨍하게 맑은 여름 햇발 아래 한참 홀린 듯 가경을 좇다 보니 이곳이 바로 금성에서 가장 활기찬 장소로 꼽히는 다향원이었다.
마침 축국 경기가 한창이었는지, 내정에는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탄성 소리가 드높았다. 오라버니 닮아 성정이 안차고 다라진 열다섯 소의는 덩굴무늬 수놓은 비단신에 먼지가 묻는 줄도 모르고 이쪽저쪽 연해 돌아다니다 곧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경꾼들이 몰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끙끙거리며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기어이 작은 얼굴 쏟 내밀자, 탄탄한 상반신 벗은 미남자들이 축국 경기에 한창이었다.
“나함!”
“나함이 구를 받았어!”
사내들의 고함 소리에 귀가 따가웠다. 소의는 깨금발을 든 채 폴짝거리며 고개를 쭉 빼고 경기장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홍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의의 입술이 작은 새의 꽁지깃처럼 비쭉 내밀리던, 그때였다. 문득 향기 나는 옷소매가 눈앞을 스치는가 싶더니 헌칠한 엄장을 지닌 사내가 상체를 굽혀 시선을 맞추어 왔다.
“꼬마 소저께서 금성 나들이에 정신이 팔리셨군.”
당황하여 한 걸음 물러선 소의의 낯빛이 저녁놀처럼 붉어졌다. 공자는 흙먼지가 보얗게 묻은 옥 빗을 손에 든 채였다. 깜짝 놀라 소맷자락을 뒤지던 소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정신없는 틈에 칠칠맞게 물건을 떨어트리고 만 것이다. 부끄러워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사내는 희고 가지런한 잇바디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고운 낭자의 머리카락에 흙먼지가 묻어서야 되겠는가. 자, 이것은 녹주옥이다. 둘 중에 무얼 가질 테냐?”
공자의 뒤편에는 향선의 정복을 입은 멋진 사내들이 여럿 서 있었다. 그들을 거느린 공자는 아주 높은 사람인 것 같았다. 자상한 말씨와 끌밋한 몸맵시에서 대저 본 적 없는 기품이 흘렀다. 특히 웃을 때 찡그리듯 휘는 눈꼬리가 굉장히 매력적인 사내였다. 소의는 공자가 양손에 내밀고 있는 옥빗과 녹색 구슬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뽀얀 손가락으로 살그머니 녹주옥을 집었다. 공자가 호탕하고 시원한 소리로 웃었다.
“그래야지.”
“…….”
“어느 댁 소저인가? 금성은 넓어서 홀로 다니다간 길을 잃을 수 있다. 초탁.”
“예, 미함 공.”
“이 아이를 가솔들에게 안전히 데려다주어라.”
“알겠습니다.”
가분히 몸을 일으킨 공자는 성근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더 이상의 일별 없이 소의를 지나쳐 걸어갔다. 화창한 햇살 아래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파랬다. 여름 잎사귀를 눅인 듯 푸르고 청초한 녹빛 구슬은 매끈하고도 단단하였다. 소의는 비밀하게 들썽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가만히 손바닥 위의 녹주옥을 소중히 감싸 보았다. 발그레 번지는 열다섯 소녀의 볼웃음이 세상을 눅일 듯 몽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