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73화 (73/111)

#73

예우령 정임과 함께 물자 조달을 맡은 홍의는 댓바람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인력이 부족하여 무동들과 함께 몽근짐을 나르고 잠깐의 쉴 짬도 없이 오전 내내 발품을 팔다가 간신히 문성의 집무실에서 가솔들과 만나 점심을 먹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가솔들과 상봉의 기쁨을 나눌 새도 없이, 소의가 경천동지할 선언을 했다.

“저, 향주(香主, 원주의 부인이자 다향원의 안주인)가 될 거여요.”

문성은 입에 담고 있던 수정과를 뿜었고 홍의는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냐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소의를 바라보았다.

“말릴 생각 마세요. 저보다 한 살이나 어린 뒷집의 초옥이는 작년에 시집을 가서 내달이면 만삭이래요. 저도 달거리 시작한 지가 벌써 이태나 흘렀으니 응당 시집갈 때가 된 것이 아니겠어요?”

“달거….”

“달….”

“소의야! 아비와 오라비 앞에서 참으로 못하는 말이 없구나!”

‘왜 저래.’

호들갑을 떨며 네발질을 하는 오라버니와 이미 온 얼굴이 벌게져서 망부석이 되어 버린 아버지를 보며 소의는 같잖다 못해 한심한 기분이 되었다. 아니 저희들은 이미 할 거 다 해 봤을 거면서 어디서 순진한 척인고?

“허면 제가 백날 천날 아기일 줄 아셨어요?”

“그게 아니라 네 말에 너무 두서가 없질 않으냐! 입으로는 말을 하여라! 방귀를 뀌지 말고.”

금이야 옥이야 곱게 기른 막내딸의 거침없는 발언에 문성은 반쯤 얼이 나가 버렸다. 휘몰아치는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홍의는 평정을 찾으려 애썼다. 차분하게 아버지의 턱에 흐르는 수정과를 닦아 드리고 소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소의는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눈을 댕그랗게 뜨고 있었다.

“무얼 간다고?”

“시집이요.”

“누구한테?”

“원주 미함 공한테요.”

“네가 그 염라대왕을 어찌 알아?”

“저의 낭군이 되실 분이니 알지요?”

코를 들고 쏘아붙이는 모양새가 여간해서는 뜻을 물릴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소의는 냉큼 다리에서 일어나더니 쪼르르 탁상을 돌아 부자 앞에 섰다. 이윽고 밥 먹는 아버지와 오라비 면전에 보란 듯이 오리 궁둥이를 쑥 내밀고는 짝짝 내려치기 시작한다.

“초옥이가 그러는데, 제 엉덩이가 마을서 제일로 푸짐한 것이 기침만 콜록해도 아들을 쑥 뽑을 실팍한 궁둥짝이래요.”

사실 유달리 하체가 튼실한 것은 문성네 가문 내력이었던 것이다. 파르라니 두고 보던 문성이 홍의에게 몸을 기울이고 울울하게 속삭였다.

‘되바라져 입찬 것이 꼭 지 어미 처녀 때를 보는 듯하구나.’

홍의 역시 복화술하듯 자근자근 읊조렸다.

‘어머니도 틈만 나면 말씀하셨지요.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는 소고집이 꼭 지 아비를 탁해 버렸다고.’

‘…상황 파악 못 하고 말말이 대꾸하는 것은 오라비를 닮았고나.’

‘허면 우리 가솔들의 단점은 죄 모아 둔 셈이네요.’

서글프게 모인 부자의 눈빛은, 어느덧 비장하게 합장하며 고전법을 선보이고 있는 소의의 뒷모습에 아스라이 꽂혀 들었다.

***

태자는 예국 사신이 당도한 날 오후, 부쩍 용체에 이상을 호소하는 황상을 뵈러 황후와 함께 대궁에 들었다. 강건하실 적에도 언제나 면사를 쓰고 뵈어야 했기에 데면데면하기가 남보다도 더한 부자지간이었다. 하지만 십여 년 전 헌칠했던 인물은 간데없이 꼬치꼬치 말라 버린 팔다리를 들여다보려니 남 보듯 무심했던 마음에 가만히 안타까움이 깃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레 전까지만 해도 미음이나마 쩌금쩌금 젓수는가 싶더니, 이제는 맹물조차 쉬이 넘기지 못하시는구나.”

황후는 죽어 가는 남편을 둔 여인치고 몹시 냉랭하고도 담담하였다. 황제는 어느 날 갑자기 병마에 묶인 것이 아니라, 나날이 사위어 가는 과정을 거쳐 불혹이 된 지금은 끝내 설 수조차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채로도 젊을 적 색탐이 유별나게 심했던 당신답게 그나마 정신이 온전하고 병에 차도가 들 때는 고운 시비를 불러다 머리맡에 꿇어앉히고 난잡하고 괴상한 짓거리를 요구하곤 했다. 잘 보이게 다리를 벌려라, 홀로 손가락으로 장난을 쳐 보아라, 내가 죽으면 같이 묻혀 달라….

산송장 다름없는 몸뚱이에 성욕이 남았을 리 없었다. 밥술조차 뜨지 못하는데 양물을 세울 수 있을 리도 없다. 다만 그는 기억을 먹이 삼아 추루하게 살아 있었다. 신성한 황제이기 이전에 죽어 가는 사내인 그는 희망조차 없는 삶의 끝자락에 누워 사지육신 멀쩡했던 영광의 시절을 곱새기며 너절한 하루하루를 간힘으로 연명해 낼 따름이었다. 젊은 여인을 취한다고 병마를 이기고 세월을 거슬러 갱소년할 수 있겠는가. 한심하고도 무력하였다. 고약하고도 추악하였다. 태자는 죽어가는 아비의 기행을 전해 들을 때마다 삶의 음습한 단면을 본 듯 넌더리를 쳤다.

“…그게 무엇이냐?”

“태후전에서 보내온 중초약이옵니다. 낮전에 달여 젓수시게끔 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고 하옵니다.”

“흥, 늙은이가 노망이 든 게지. 이미 갖은 탕제를 대령했지만 효험을 보지 못했거늘, 새삼 새로운 약방문을 썼다가 더욱 탈이 나면 그땐 어찌하려고?”

시비가 나타나 사발에 탕약을 받치고 들어오자 황후는 짐짓 새된 목소리로 가로막았다.

“필요 없으니 갖다 치워라! 태후전의 시종에게는 옳게 쓰임새를 다하였다고 적당히 둘러 전하는 것 잊지 말고.”

“예, 황후 마마.”

시비는 나붓이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나려 하였다. 그때 면사를 쓴 채 가만히 관망하던 태자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리 와라.”

“…예?”

도깨비라고 소문난 태자의 난데없는 부름에 시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쟁반에 들린 사발이 달그락, 흔들리며 쓴 물을 흘렸다.

“가까이.”

시비가 애써 침착하며 안전으로 다가들자, 태자는 사발을 들고 황제의 머리맡에 앉았다. 황후는 난데없는 태자의 행작에 당황하여 잠시 지켜보았다.

태자는 황제의 등 밑으로 팔을 밀어 넣고 일으켜 앉혔다. 말라 빠진 병자의 몸에서는 역한 쉰내가 났다.

‘…한 품은 되려는가.’

자신이 커졌는지 아니면 원래 이토록 작고 마른 아버지였는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렸을 때도 어리광을 부리며 안겨 본 적이 없었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잠시 회의에 젖어 든 태자는 허옇게 더뎅이가 일어난 아비의 입술에 사발을 갖다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답답하시겠습니다.”

황제는 힘겨운 눈을 가물가물 뜨고 얼굴 맡에서 흩날리는 검은 면사를 가까스로 응시하였다. 혼미한 정신에 든든히 등을 받쳐 주는 상대방의 단단한 가슴팍이 어릴 적 유약했던 아들의 몸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는 듯했다. 다만 향긋한 난향과 함께 나직한 저음의 음성이 놓쳐 버린 세월을 상기시키는 듯해 황제의 흐릿한 눈동자에 쓰라린 상실의 빛이 어렸다.

“살려 다오….”

태자가 멈칫하여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간힘을 다해 읊조린 것이다. 덜덜 떨리는 비쩍 마른 손가락으로 아들의 옷깃을 힘겹게 붙들어 쥐고 다 쉬어 색색대는 탁한 음성으로 간절하게 애원하고 있었다.

“내가 몹시 괴롭다. 아프다, 고통스러워…! 제발 나를 살려 다오…. 누가 나를 좀 살려 다오…!”

참혹한 외침이었다. 어딘지 공포에 질린 것 같기도 했다. 태자가 서늘한 한기를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던 그때, 황후가 달려와 낚아채듯 사발을 거두고는 차갑게 일갈하였다.

“문후는 끝났다. 어서 편전으로 가 진연의 절차를 살피고 사신단을 맞을 준비를 하라.”

곧이어 태자의 얼굴도 차갑게 굳었다.

“…….”

“…….”

가족 간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미묘하고도 괴괴한 적막이 흘렀다. 태자는 천천히 면사를 젖히고 싸늘한 푸른 눈으로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그 찌르는 듯한 시선에 잠시 못 박힌 듯 굳어 있던 황후가 이내 왁살스레 인상을 찌푸리고는 천장이 다 울리도록 크게 소리쳤다.

“숭하구나!”

그 외침이 어찌나 쨍하고 날카롭던지, 귀가 다 멍멍한 기분에 태자의 미간도 살며시 일그러졌다. 다음 순간 컥컥거리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던 황제가 쥐고 있던 옷깃을 놓치며 혼절하고 말았다. 태자는 어머니를 보던 시선을 거두고 품 안의 황제를 내려다보다가 황급히 침상에 누였다. 그리고 무어라 대거리를 하려고 다시 황후가 있던 공간을 돌아보았을 때, 언제 나섰는지 부랴부랴 내실을 빠져나가는 붉은 옥의 자락이 비쳤다.

“태, 태의를 불러오겠사옵니다!”

내내 부복하고 있던 시비가 헐레벌떡 일어났다. 사발과 쟁반을 챙겨 서둘러 내실을 나서려는데, 문득 차갑고 단단하고 커다란 손아귀에 팔뚝을 덥석 붙들렸다. 시비는 기함하여 돌아보았다.

“네가 황제 폐하의 탕약을 달이느냐.”

여상한 어조였다. 시비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성정은 포악한 인숭무레기요, 외모는 저자의 곱사등이만큼이나 추악하다는 태자 전하는, 어쩐지 귓구멍이 녹아내릴 정도로 부드럽고 나지막한 옥음을 지니고 있었다.

“예, 예, 태자 전하. 그러하옵니다.”

시비는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하였다. 태자가 면사 쓴 얼굴을 기울였다. 그리고 잡고 있던 시비의 팔뚝을 들어 올려 그녀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지저분하군.”

나지막한 읊조림이 흐르자 깜짝 놀란 시비가 퍼뜩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시커먼 때가 잔뜩 낀 손가락을 얼른 곱혀 감추었다.

“그리 더러운 손으로 황제를 모셨더냐.”

“소, 송구하옵니다, 태자 전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근심이라 하옵니다…!”

“내 오늘부로 너의 근심을 덜어 주지.”

“…….”

“화경.”

문간을 향하여 이르자 충실히 대기하고 있던 화경이 곧바로 들어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년을 데려가 목을 베어라.”

“예, 전하.”

한마디 호곡할 겨를도 없었다.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지르는 시비를 어깨에 들치고, 화경은 빠르게 침전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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