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74화 (74/111)

#74

금성의 연회가 시작되었다. 만조백관들은 모두 대궁의 연무장으로 모이라는 지시를 받고, 홍의 역시 향선들 틈에 섞여서 대궁으로 향했다. 상석의 진어상 앞에는 대리청정 중인 태자가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고 위엄 있는 예복을 꾸린 채 면사를 쓰고 앉아 있었고, 그의 양옆에는 마찬가지로 아름답게 단장한 태자비와 황후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막 사신관에서 휴식을 취하고 돌아온 왕조오가 연무장 한가운데에 서서 황족을 뵙고 예국 황제의 칙서를 올렸다. 태자는 공물로서 보답하고 귀한 술을 내리며 긴 여정의 노고를 치레하였다.

칙사 왕조오는 벽해의 신선이라 불리는 향선들의 면면이 몹시 궁금한 눈치였다. 그에 황후는 속히 다향원 명부를 가져오게 하였다. 원래는 절차에 없었지만 연회에 참석한 열다섯 명의 향선이 모두 사신 앞에 불려 나가 자기소개를 외치며 읍을 올리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마지막 차례로 호명된 홍의는 붉은 정복을 갖춰 입은 채로 상단에 나아갔다. 공식 석상에서 태자와 마주친 것은 처음인지라 어쩐지 열없고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왕조오를 향하여 읍을 올렸다.

“향선 홍의, 왕 대인을 뵙습니다.”

“오오, 벽해 최고의 미남인 해운 공을 위협할 만큼 아름답고 강건한 청년입니다.”

“호호, 그렇소이까? 저 아이가 공을 위해 벽해의 전통 기예를 준비했다니 차차 두고 즐기시오. 자, 모든 악공들은 풍악을 울려 풍취를 돋우라!”

황후와 왕조오가 떠드는 사이, 홍의는 몰래 시선을 들어 상석에 자리한 검은 면사를 힐끗 보았다. 내내 이쪽을 보고 있었는지 긴 소맷자락 사이로 엄지손가락 하나가 쏙 드러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면 안 되는 상황인데도 주책인 입꼬리가 제멋대로 슁 올라갈 듯하여, 홍의는 남몰래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마 저 멀리 면사 속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태자비가 어이없다는 듯 태자와 홍의를 번갈아 노려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악공들의 연주가 높아지고, 따뜻한 술 몇 잔에 곤드라지게 취한 왕조오는 문득 감상에 젖어 운을 떼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세의 가르침이 참으로 틀리지가 않습니다. 그토록 조그마했던 태자 전하께서 이제 육 척이 넘는 헌헌장부가 되셨으니 말입니다.”

사신으로 행차한 왕조오는 대대로 예국 황실을 보좌한 무장 가문 출신으로, 거느린 사병의 수만 오만을 넘는 세력가이자 제후나 다름없는 귀공이었다. 그는 꼭 십육 년 만에 건너온 벽해에 남다른 관심을 품고 있었다. 예국인들은 벽해에 관해 공맹의 도를 어기는 족속이라 폄하하고 속으로 무시하지만, 물론 왕조오도 그에 어느 정도 동조하는 바이지만, 십육 년 전 벽해의 황제 은종과 막역 군신을 맹세하는 약주를 나누었으니 정이 도타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자는 면사 너머의 왕조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또한 다섯 살배기 때 잠깐 마주쳤던 왕조오를 기억하고 있었다. 왕조오는 그 시절 유일하게 태자를 귀애하여 껴안아 주었던 어른이었다. 답답하겠노라며 면사를 들추려 들어서 지켜보던 관료들과 시비들을 경악케 한 장본인이기도 하고 말이다.

“또한 그리 강녕하셨던 폐하께서 이제는 연회에 참석조차 하지 못하실 만큼 옥체 미령하시고, 태후 마마 또한 아니 보이시고, 그 당시 폐하께 가장 아끼는 동모제라고 소개받은 바 있던 미함조차 보이질 않으니…. 십육 년 만에 벽해의 벗들을 만날 생각에 기꺼웠던 소장으로선 참으로 섭섭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미함은 원주의 위에 올라 다향원을 돌보느라 참석하지 못하였구려. 대신 명일은 태자와 함께 청유를 즐기심이 어떠하오?”

황후 옥명이 넌지시 운을 떼었으나 왕조오는 여전히 못마땅한 눈치였다. 부러 궁중 무용수를 총동원하고 해어화 중 어여쁜 여인만 추려 내 술 시중을 들게 했지만 좀처럼 그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바보가 아닌 바에야 황후가 일부러 이 연회의 장에 정통의 중추들을 걸러 냈다는 사실을 어찌 낌새채지 못하겠는가. 왕조오는 십육 년 전과 달리 아예 신통 밭이 되다시피 한 금성의 전경이 영 께름칙하고 불쾌하기만 했다.

그를 가만가만 살피던 황후는 곧 눈초리를 가늘게 좁혔다.

‘왕조오.’

예국 황제의 최측근이자 오른팔. 그가 하는 말이 곧 황제의 뜻. 당시 적통이 없어 치열한 내분이 있었던 예국 황실에서 서열조차 들지 못했던 지금의 황제를 보좌하여 옥좌에 올린 인물이다. 아랫사람에게는 더없이 자비로운 덕장이요 윗사람에게는 한없이 믿음직한 충신이라, 나이가 들면서 전선에서 물러나 풍류랑을 자처하여 각국을 돌아다니며 문물 구경을 즐기지만 그저 이빨 빠진 호랑이로 치부하기엔 단단히 틀어쥔 권세가 여전히 하늘을 덮는 노련한 늙은이였다.

“벽해의 황실은 참으로 독특합니다. 특히나 혼법(婚法) 말입니다.”

좌중이 묘하게 고요해졌다. 왕조오는 취기를 발판 삼아 아까부터 옴찔거리던 입 구멍을 놀리기로 작정하였다. 대저 남의 집 싸리울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밑두리콧두리 주워섬기는 짓은 대장부의 몫이 아니라고 여겨 왔지만, 넘어가자니 온 창자가 비비 꼬이는 듯 짜증스러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예국의 황상께서 종종 벽해에 관해 이르길, 무릇 파벌이라 함은 아비의 혈맥을 따르고 대대로 존속되게 마련인데 희한하게도 옆나라 벽해의 인통 체계는 부계가 아닌 모계 혈통으로 이어지니 천자로서 사직을 돌보고 왕릉을 받들기가 참으로 애꿎어라, 하셨습니다.”

황후는 애써 웃었다.

“예국의 황상께서 우리 벽해의 지밀까지 통찰하고 계셨단 말이오?”

“실지로 벽해의 혼법이 워낙 공맹의 도와 어긋나다보니 예국에서도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지요. 벽해의 황제께서 태후 마마의 통을 따라 정통이고, 그 적자인 태자는 황후 마마의 통을 따라 신통이라… 부자지간이 속한 세력이 다르다면 어찌 그것을 옳은 적통이라 하겠습니까?”

“…….”

“외람되지만 태자비 마마는 어느 가문의 인통이신지요?”

태자의 옆에 붙어 앉아 어떠한 말도 움직임도 없었던 태자비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어렸다. 커다랗고 찬찬한 두 눈을 굴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던 태자비가 곧 황후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황후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굳었다.

“지금 감히… 한갓 칙사로서 내국에 든 왕 공이, 우리 벽해의 황실을 대놓고 모독하자는 것이오?”

“벽해의 황실이 아니라, 황후님의 황실이겠지요. 또한 소장은 칙사의 의무로서 예국 황제 폐하의 뜻을 전달하리라는 사명에 충실했을 따름입니다. 황실 모독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왕조오는 혀를 차며 술잔을 기울이는 척했다.

“민가에서도 남의 집 안마당 사정을 꼬치꼬치 캐물었다가는 된서리를 맞는 법이거늘, 예국의 황제께서는 참으로 말 많은 벗을 곁에 두셨소이다.”

“벗이라기보다는 형제에 가깝지요. 우리 예국 황제 폐하와 소장은 몇십 년째 호형호제하는 사이라 말입니다.”

“…….”

“방금 소장의 질문이 정녕 황실 모독이었습니까? 그렇다면 그토록 경천동지할 대역죄를 저지른 소장을 당장 벽해의 유궁에 가두셔야지요.”

왕조오는 물끄러미 황후를 바라보았다. 황실 모독죄를 붙이고 그를 유궁에 가두는 순간, 그간 쌓아온 양국의 관계가 모조리 무너지는 것이었다. 명백한 도발에 잠시 이맛살을 구기던 황후가 곧 담담하게 정비한 얼굴을 치켜들고는, 한숨처럼 답하였다.

“태자비는 신통 가문 사람이오. 나와 군우령 대윤의 딸이지.”

“이런…!”

왕조오가 과하게 놀라는 짓시늉을 하며 황후를 바라보았다.

“허면 또 근친혼이었단 말입니까?”

좌중이 일시에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모두가 허를 찔리기라도 한 듯 곤혹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연신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태자는 태연자약하게 젓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미끈하고 달달한 전복 회를 집으려는데 면사 때문에 안 보여서 잘되지 않는 것이다. 이럴 때 옥지가 있었으면…. 고개까지 기울이고 집중하고 있는데 옆에서 억장이 무너지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태자비가 나지막이 욕설을 씹어뱉었다. ‘미친 고자 놈.’

“저희 예국에서는 연전부터 벽해의 이 누습에 관해 참으로 우려가 많았습니다. 하여 벽해의 황제께서 누이이신 황후 마마를 정비로 삼으신 이십일 년 전에도 숱한 구설이 오고 갔지요. 헌데 또다시 그 무지몽매한 혼도를 이어 나가실 작정이십니까? 태자 전하와 태자비 마마는 씨는 달라도 어엿한 남매지간이 아닙니까?”

이를 악문 황후가 사나운 두 눈을 치떴다. 분노에 못이긴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바람에 가체에 달린 떨잠이며 꽂이가 흔들릴 지경이었다.

“참으로 못 배운 소리를 하는구려. 예에는 예의 법이 있듯, 벽해에도 벽해의 법이 있는 것이오. 이 모든 것이 황족의 신성함을 지키기 위한 벽해의 오랜 전통일진대, 감히 타국의 도에 이러쿵저러쿵 마구발방을 한단 말이오?”

“불교와 유교를 동시에 숭상하나, 유교의 경전을 독해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는 우리 유자들의 눈에는 이 나라의 혼도가 참으로 배덕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국에서 이러한 혼도가 행해진다면 즉각 삼강과 오상을 위배한 강상죄로 처결이 날, 삿되고도 엄중한 사안이지요.”

“그 또한 예국의 잣대로 벽해 황실의 가법을 잰 것이 아니요? 애초에 양국의 도가 다른데 옳고 그름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외다.”

“허면 오래도록 황통을 배출해 온 가문인 ‘정통’을 박대하는 진의는 무엇입니까?”

결론은 이것이었다. 왕조오는 벽해를 집어삼킨 신통 사람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황후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황족의 신성함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라면, 어찌 신통이 정권을 장악하고 정통을 홀시한단 말입니까? 신통은 대대로 정통을 모시던 노비의 가문이 아닙니까!”

“이보시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어찌 이런 모욕을!”

“아무리 예국의 칙사라 하나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망언이올시다! 당장 황후께 엎드려 사죄를 하시오!”

난리굿 판이었다. 벌떼처럼 일어난 군우령 대윤과 신통 가문의 귀족들이 곧이라도 상을 뒤엎을 기세로 이마까지 벌게져서 삿대질을 해 가며 펄펄 뛰었고, 몇몇은 의원을 부르짖으며 목을 잡고 눈을 까뒤집는 시러베장단을 선보였다. 뿐만 아니라 왕조오를 섬기는 수하들 또한 흰 눈을 부릅뜨고 예국말로 무어라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데 아무래도 욕설인 것 같았다.

그렇게 벽해어와 예국어로 고성과 쌍욕이 고래고래 오가는 와중, 태자는 홀로 고요하게 전복 회 집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참을 씨름하던 끝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배릿한 것을 집어 기름장에 적시고는 슬쩍 면사를 걷고 입술 사이로 넣었다. 싱싱한 전복이 오독오독 으깨졌다. 씹을수록 시원하고 고소하였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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